삶의 향기 메일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살아야 부처이다.

장백산-1 2021. 11. 1. 22:10

탈종교 시대와 불교 (4)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살아야 부처이다.

시내 곳곳 수많은 연등과 한 장소 홀로 선 트리는 지향점 달라
트리 꼭대기 ‘별’ 아닌 내 마음 직시하고 세상 밝힐 ‘등불’ 켜야
관념으로 깨달음 추구 말고 오늘 행동·실천해야 미래 부처 돼

지난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원심력이 ‘탈중심적’ 변화와 확산의 힘이라면 구심력은 ‘중심’을 향한 집중의 힘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의 연등과 성탄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두 종교의 이러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그 꼭대기에 별을 달고 불을 밝히듯이 하늘을 향해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중앙집권적’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한 장소에 하나가 놓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이나 미국의 워싱톤 D.C의 광장에도 단 하나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어 모든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집중되게 됩니다. 

여기에 ‘나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없습니다. 반면 우리의 연등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연등은 ‘나의 연등’입니다.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의 연등들이 시내 곳곳, 사찰 곳곳에 매달립니다. 연등은 부처님 지혜의 상징이자 우리 각자 마음의 등불을 상징합니다. 내 마음을 밝혀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하늘로 향하는 각자의 마음을 집합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연등은 부처님의 지혜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으로 확산되는 것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의 깨달음이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모든 생명의 본원적 불성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구심력의 종교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로 요약된다면, 원심력의 종교는 부처님께서 당신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은 60명의 제자들에게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법을 설하라”고 하신 전도선언으로 요약됩니다. 2500년 불교사는 유일자(唯一者)로 확인되는 진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깨달음이 모든 이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확산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기원전 5~6세기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는 당연히 고대 인도의 종교문화와 여러 형이상학적 전제를 그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고(苦)의 속박과 해탈, 윤회, 출가 수행 등은 불교만의 특징이 아니라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종교와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이자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그 ‘인도적’ 특성들은 소위 ‘오리지날’로 고착되지 않고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늘 새롭게 해석되고 실천되어왔습니다. 가장 극적인 최근의 사례는 아마도 불교와 서양 근대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대 과학의 등장으로 직격탄을 맞기도 했고 아직도 그 여파에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교는 과학과의 만남을 통해 그 전통적 해석의 지평을 더욱 넓혀가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의 깨달음에서 시작된 불교의 역사는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부단히 그 형식과 내용을 창신(創新) 해온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기록이며 불변수연(不變隨緣)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단히 변하는 가운데 불교가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소위 불교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듯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핵심가치의 내용을 ‘깨달음’이란 하나의 명사(名詞)로 표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관습적으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깨달음’은 물성(物性, corporeailty)을 가진 사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이란 용어도 ‘buddha’ 즉 ‘깨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비유를 하자면 요즘 세상에서 화두가 되는 ‘행복’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행복한 사람’ ‘행복한 가정’은 가능하지만 ‘행복이 가득한 집’은 수사적 표현일뿐 의미론적으로는 사실상 성립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은 상태가 있을 뿐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말은 의미상 성립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 물성을 가진 사물이 아니라 동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는 깨달음에 반드시 구체적인 상태나 행위가 수반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잠’에 잠 자는 행위가 수반되고 ‘행복’에 행복한 사람의 상태가 수반되듯 ‘깨달음’ 또한 깨달음에 수반되는 상태와 행위가 수반된다는 점입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깨달음을 ‘지혜’(상태)와 ‘자비’(행위)로서 표상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 지혜로운 생각과 자비로운 실천으로써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각각 ‘수영’과 (물에 빠진 자의) ‘구조’에 빗대어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조할 수 있다’와 같은 선후(先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토끼의 뿔’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관념적 허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미움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추구는 ‘지속적이고 늘 유지되는’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이지만 부처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지금 부처로 살지 않으면 장래에도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로 살아야 부처가 된다’고 하는 역설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잠을 자려는 노력 없이 ‘잠’이 오기를 기대하거나 ‘행복’ 하려는 노력 없이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지금’의 부처와 ‘장래’의 부처가 다른 점은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인가 아닌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 범부의 ‘불성’은 때와 장소 그 대상에 따라 드러나기도 드러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성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부처와 (장래) 부처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발트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그의 유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근대의 핵심적 과제를 세속에서 메시아 찾기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맥락적으로 이해하자면 이제 더이상 교회에서는 메시아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이를 불교적 관점에서 원용하자면 ‘일상에서 불성(佛性)을 실천하는 일’이 오늘날 불교의 핵심적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사찰이나 선방과 같은 특별한 공간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가치일 수는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적 가치는 ‘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로 살아야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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