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하늘과 바람과 달을

장백산-1 2021. 11. 3. 23:00

하늘과 바람과 달을  - - 법정스님

예전에는 시인(詩人)이라는 직업이 따로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읊고 지었다.
제대로 된 선비(그 시절의 지식인)라면 詩, 書, 畵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인 교양이었다. '승려시인'이란 말도 예전에는 없었다. 
경전을 읽고 어록을 읽을 수 있는 스님들은 그 자신도 삶의 노래인 詩를 짓고 즐겼다.

시(詩)라는 글자를 살펴 보면 '말씀 언 변'에 '절 사'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절에서 수행자들이 주고 받는 말이 곧 詩라는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달과 시냇물과 나무와 새와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중에서는 ,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언어의 결정체인 詩의 분위기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선문 선답도 논리적으로 비약은 심하지만 詩의 형식을 빌린 문답이다.

지는 꽃향기 골짜기에 가득하고 우짖는 새소리 숲 너머에서 들려 온다.
그 절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 산의 절반은 흰구름이어라.

늦은 봄날 절 안의 한가로운 풍경이다. 꽃이 지고 새소리 들려오는 곳,그런 절은 어디 있는가. 
속세의 먼지가 닿지 않는 흰구름 속에 묻혀있는 절이므로 더욱 신선하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어느 산에서 읊은 詩이다.
"초가는 낡아 삼면의 벽이 없는데 노스님 한 분이 대평상에서 졸고 있다
석양에 성긴 비 지나가더니 푸른 산은 반쯤 젖었다."

다 허물어진 암자에 사는 노스님의 모습이 그림 같다. 노스님이라 좌선이 곧 졸음으로 이어진 것.
뻣뻣하게 곧은 자세로 앉아있다면 노스님답지 않다. 조는 그 속에서 선정삼매를 이룬다.

해질 무렵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가자 반쯤 젖은 푸른 산이 대나무 평상에서 졸고있는 노스님을 받쳐주고 있다.
휴정스님의 '초옥(草屋)'이란 詩다.

요즘 큰 절과 암자를 가릴 것 없이 다들 물질적으로는 풍부하게 살기 때문에 퇴락해가는 절을 만나기 어렵다.
큰 절과 큰 암자속에서 사는 처지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으로 보면 번쩍거리는 절이나
암자보다는 얼마쯤 퇴락해가는 절이나 암자의 모습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사방 벽이 무너져 남쪽 북쪽이 다 트이고 추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황량하다고 말하지 말게 누구보다 먼저 바람을 맞고 달을 먼저 본다네

조선시대 환성 지안 스님의 詩인데 곧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 살면서도 궁색한 기색이 전혀 없는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다.
벽이 무너지고 추녀가 벗겨져 나갔지만 도리어 그 속에서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예전 
수행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고고한 하늘과 땅, 바람 달, 시냇물 나무, 산과 강을 큰 집으로 여겼던 것이다.
옛것과 낡은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 세월의 향기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법정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