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이어령 선생님 - - 최재천

장백산-1 2022. 3. 9. 15:20

이어령 선생님 - - 최재천


2006년 이화여대에 처음 둥지를 틀었을 때 일이다. 
무슨 까닭인지 6개월이 지나도록 주문한 실험 기기가 들어오지 않아 연구를 시작할 수 없었다.
석좌교수라는 타이틀을 50대 초반 너무 이른 나이에 얻은 터라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하던참이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연구처장실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보고하던 관재과장의 답변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이어령 교수님의 후임으로 오신 분이라 실험 기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공식 표명은 없었지만 학내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내 행사에서 이어령 선생님을 만났다. 이화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내 손을 꼭 쥐어 주셨다. 
선생님은 인문학자이고 나는 과학자이지만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을 두루 통섭하신 선생님은 나의 롤모델이다.

나는 때로 강의 중에 짐짓 진지하게 선생님의 본명이 ‘창의(創意)’였다고 우긴다.
세상 모든 지식을 두루 ‘편안하게 다스린’ 어령(御寧) 이창의(李創意) 선생님이라고.
굴렁쇠에서 ‘디지로그’까지 선생님의 창의성은 한계를 모른다.

지난 몇 년간 선생님이 내게 들려준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광화(光化)’였다.
AI 시대를 열어젖힌 상징적 사건인 이세돌-알파고 바둑 대국이 열린 곳이 바로 광화문 근방이었다며 
우리 민족이 세상을 밝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1426년 세종대왕은 경복궁 정문 이름을 서경(書經)의 구절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영감을 얻어 
광화문(光化門)이라 지었다. ‘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다.

지난 2월 25일 저녁 7시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ㄱ자’로 걸린 거대한 미디어 캔버스에 3차원 영상
‘광화벽화’가 걸렸다. 대한민국이 문화와 기술로 세계를 선도하고자 ‘광화시대’를 열던 그날 밤
선생님은 그 순간을 직접 눈으로 보시지는 못했지만 아마 가슴으로 느끼시며 길 떠날 채비를 하셨으리라.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