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날마다 나아지고 있는 우리

장백산-1 2024. 5. 15. 17:05

날마다 나아지고 있는 우리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우주법계의 이치, 즉 진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법계는 언제나 항상 우리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돌봐줍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근원은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들 모두는 무조건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부처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부처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은 퇴보가 아니라 진보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 지옥이나 아귀로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도 더러 있던데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퇴보하기 보다는 나날이 진보하고, 날마다 삶을 통해 진실을 깨달아가는 진일보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귀의(歸依)라는 용어가 바로 본래의 부처 자리라는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진리의 전통에서 원(圓)을 진리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다시 본래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귀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두려운 것 투성이고, 믿지 못할 것 투성이고, 나는 항상 부족하다 생각하고 ‘아, 나는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라는 이 두려움의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전환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집니다.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가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삶이라는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자비의 방향으로, 완전한 깨달음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주법계입니다. 우주법계의 힘입니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법계(法界)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법계는 그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법계는 다시 말해 두려움과 부족함과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고 자비와 풍요와 완전성의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우주법계는,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퇴보가 아닌 진보로 언제나 이끌고 있습니다. 

 

설사 이번 생에 좀 힘든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고, 안 좋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사랑과 지혜로 이끌기 위한 우주법계의 자비로운 배려였다는 말입니다. 자비로서 우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그 일이 내 인생에 나타난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입니까? 여러분들께 위안을 드리려고 하는 빈 소리가 아니고, 실제 진리,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우주법계는 무한한 자비, 무한한 사랑, 무한한 지혜, 무한한 풍요로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다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입니다. 내 생각이 두렵다, 부족하다,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아직 뭔가를 더 갖고 싶다고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언제나 이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를 양산해 내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 아상에 입각한 분별심과 생각들에 휘둘리지만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진실의 자리에 발딛고 서 있습니다. 진보와 성숙이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뿐, 사실은 언제나 진리에 도달해 있습니다. 언제나 진리 위에 서있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낸 허망한 착각의 꿈만 깨면 될 뿐이지요. 그러나 꿈꾸는 순간일지라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 또한 아름다운 꿈이니까요.

 

이처럼 삶은 무조건적으로 언제나 아름답고 장엄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세요.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만 없다면 완전히 안심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