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는 마음으로 설법을 듣지 말고, 그냥 텅 빈 마음으로 들으세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그렇듯, 제가 하는 설법 또한 양변의 방편을 두루 사용하되, 양변에 치우침이 없도록, 세우고 깨부수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이를 선에서는 입파자재(立破自在)라고 하여, 세우고 깨부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한다고 말합니다. 공에 치우친 사람에게 유를 설하고, 유에 치우친 사람에게는 공을 설합니다. 불성, 자성, 본래면목이 있다고 했다가, 또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그런 것은 없다고 설합니다. 수행을 하지 말라고 했다가, 또 다시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을 위해 수행을 하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하되 함이 없이 하라고도 하지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편을 쌍으로 쓰기도 하고, 쌍으로 버리기도 합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 그 양 변을 쌍으로 비추어 드러내기도 하고, 또 그 양 변을 쌍으로 막아버리기도 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듣는 중도적인 자세는, 어떤 법문을 들었더라도, 그것이 좋다고 마음에 새겨서 지침으로 삼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거기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쓰고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때 쓰되, 거기에도 과하게 얽매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중도의 공부가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같은 스님이 어제는 '있음'을 설법하다가, 내일은 '없음'을 설법합니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그 많은 법문들을 보시더라도,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거나, 이렇게 말했다가 또 그 반대로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알음알이, 분별하는마음으로 설법을 듣지 말고, 헤아려 듣지 말고, 머리로 듣지 말고, 필기 하지 말고, 그냥 텅 빈 마음으로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서 '불교의 핵심은 이거야'하고 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들을 뿐! 그러면 저절로 수행 아닌 수행, 즉 중도가 되어집니다. 스승이 쌍차쌍조의 중도로 계속 설하기 때문에, 그 중도에 훈습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안 됩니다. 그저 훈습될 뿐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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