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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의 많은 방편

장백산-1 2024. 6. 28. 15:24

많은 종교의 많은 방편

 

불교의 핵심을 말하라면 부처가 되는 것, 견성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불교의 핵심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임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그대로 온전한 진리의 나툼이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 진리임을 부처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찬’에서는 이를 ‘대도상재목전 수재목전난도’라 하여 ‘큰 도는 늘 목전에 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온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판단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제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여기고 괴로운 존재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분별심이 우리 마음 가운데 중생심의 대표적인 작용인데요, 이 분별심은 나아가 이 몸과 생각, 느낌, 욕구 같은 색수상행식을 전부 진짜 자기라고 여기면서 아상을 키워가게 됩니다.

 

바로 이 아상, 색수상행식, 육식, 십팔계 이런 것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분별심이라고,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 이 분별심과 상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망상으로 그린 세계만 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실상은 공하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분별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중생들은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아니까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본래면목이니, 불성이니, 주인공이니, 본성, 자성, 법, 도, 마음, 혹은 신이라고 수많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사실 많은 종교, 사상들이 있지만 그 또한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면 바로 이 참된 본성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터치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참된 진리를 불교만큼 확연하게 직접적으로 가리켜 보여주고, 견성 이후의 보림수행까지를 체계적으로 이끄는 방대한 실천체계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지요.

 

인도의 유명한 수행자나, 역사 속에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들, 요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적인 거인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그것이 불법에서 말하는 본성을 얼핏 본 사람이거나, 쉽게 말해 견성을 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공부까지 수순하게 끝마쳐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사실 마음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견성이 아니라 견성 이후의 보림 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보림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바른 가르침은 오직 불교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다만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도 일부 견성이라고 할 만한 성품에 대한 언급은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모든 참된 종교나 사상의 전통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사실 세상 모든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창조주라고도 굳이 방편을 써야 한다면 창조주로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노자나 장자는 이것을 도라고 하고, 무위자연이라고 합니다. 도덕경에서는 ‘억지로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힌두교, 브라만교에서는 범아일여라고 하여, 내가 창조신인 범과 하나가 되어야지, 분별망상으로 제 멋대로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방편을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느 종교적 전통에서든지 비슷한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어 보입니다. 다만, 그 자리에 확실히 계합하지 못하다보니, 이렇듯 약간은 어설픈 방편에 집착하게 되어, 진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 속의 수많은 사상들을 보았을 때, 불법을 만났다는 건 그야말로 놀라운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