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 견성을 말할 뿐, 선정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 - 육조혜능 육조단경
인종 법사가 혜능레게 물었습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께서는 무엇을 그대에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혜능이 답했습니다.
‘특별히 가르쳐 주신 것은 없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 법사가 다시 혜능에게 물었습니다.
‘오조께서는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혜능이 답했습니다.
‘선정이나 해탈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참된 불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법(부처의 가르침)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 혜능은 이후 사냥꾼의 무리에 들어가 15년 정도를 지내며 보림을 이어갔고, 15년이 지난 어느 날 이제 법을 펼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는 산에서 내려와 광주(廣州)의 법성사에 당도해 인종법사의 『열반경』 강의 회상에 나타났다.
여기서 그 유명한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라는 스님들의 논쟁에 혜능은 ‘다만 스님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인종 법사는 그 사람의 비범함을 보고 그가 육조임을 직감한다.
인종 법사가 혹시 오래 전 육조의 의발과 법이 남쪽으로 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혹시 그 행자님이 당신이 아닌지를 물었고, 혜능이 그렇다고 하자, 오조로부터 받은 법은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 선정과 해탈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견성(見性)은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견성은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견성은 불이중도(不二中道)다.
선정은 선정에서 나오는 것이 있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선정에 들지 못한 이가 있고, 선정에 든 이가 있다. 그래서 선정은 둘로 나뉘는 법, 분별의 법이며, 이법(二法)이다.
해탈 또한 해탈하지 않은 중생과 해탈한 부처가 둘로 나뉘어져 있어야만 해탈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 또한 이법으로, 둘로 나뉘는 법이기에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불교는 선정을 닦아 해탈하는 가르침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인종 법사와의 문담에서 에서 육조 혜능의 말씀은 선정도 방편이고, 해탈도 방편이라는 사실에 눈뜨라는 말이다. 일체의 모든 가르침은 방편 아닌 것이 없다. 팔만사천의 모든 경전이 전부 다 방편일 뿐, 쥐고 머물러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처라는 말도 방편이고 깨달음이라는 말도 방편이다. 어리석은 중생에게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나면 부처가 된다고 방편으로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부처’라는 방포ㅛㄴ의 말을 내세웠을 뿐이지,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저 어리석음 없이 살면 될 뿐, 부처라는 말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해탈도 마찬가지다. 해탈하지 못한 자와 상대적으로 해탈한 자가 있을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해탈했다면, 해탈이라는 방편의 말 자체도 필요치 않다. 해탈은 말 그대로 묶인 것에서 풀려났다는 의미다. 묶인 자가 있으니 묶임에서 풀려난 자도 있다. 이처럼 해탈이라는 말 자체도 하나의 분별된 개념이요, 이법(二法)이다.
해탈이라는 말도 하나의 방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해탈이야 불교의 최고의 이상향인데, 해탈이라는 말도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불법의 핵심이다.
일체 모든 가르침, 경전들은 전부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강을 건너는 뗏목에 불과하다. 그 모든 말과 방편은 결국 버려야만 할 것들이다. 그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하여, 반야라는 지혜도 없고, 깨달음, 해탈, 열반이라는 얻음도 없다고 설하고 있다.
불법은 불이법이다. 둘로 나누어 놓고 분별하고 비교하는 것은 중생의 분별심이 하는 일이다. 진리는 그 어떤 것도 둘로 나누지 않는다. 둘로 나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로 나누는 모든 개념들은 전부 방편이요, 뗏목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그래서 혜능은 오조는 단지 견성을 말할 뿐, 선정과 해탈은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성을 밝게 보는 것이 곧 견성이다. 내가 곧 불성이며, 불성이 곧 나였음을 확인하는 것, 불이법의 확인이 곧 견성이다. 여기에는 둘로 나뉘는 것이 없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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