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 7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하지 않고 보기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하지 않고 보기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인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라고 부르고, 제일의제 또는 승의제로 부르는 '진짜 진리'와는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일단 진짜 진리가 방편인 언어로 표현되고 나면 한 번 왜곡되고, 언어라는 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대로를 언어로 짜맞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과라는 진짜 사과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과'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사과'라는 이름 속에는 사과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과라면 사과를 먹고 싶을 때, 그 이름만 들어도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사과라는 이름, 언어에는 사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언어에는 '진짜 깨달음'이 없습니..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 등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있음'이다.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 등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의 당신이라는 존재가 본래 이미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이다.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 등의 방편상의 이름들은 당신이 본래 이미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을 일러주는 말일 뿐이다. 당신 말고 어디 저 멀리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성품(본성, 근원의 성품)이라는 방편의 다른 이름들인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를 확인하게 되면 당신은 그저 그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 뿐이다. 깨달음, 진리, 견성, 도, 부처를 확인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

대상(對相)은 실재(實在)하지 않아… 대상(對相)은 그저 심층마음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뿐

대상(對相)은 실재(實在)하지 않아… 대상(對相)은 그저 심층마음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일뿐 감각되는 모든 것과 삼매까지도 오로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내 업력의 종자가 아뢰야식에 보존돼 있다가 인연(因緣) 만나면 현행(現行) 견성(見性)은 본래 마음을 자각(自覺)…남과 나의 마음 결코 다르지 않아 불자라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유식(唯識)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합니다. 유식무경은 오직 식이 있을 뿐이고 바깥의 경계, 즉 대상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우리 눈앞에 있는 대상(경계), 즉 물리세계(物理世界)가 엄연하게 있는데 이 물리세계(物理世界)가 어떻게 가상(假想)의 세계인가 ..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다운 스님의 遷度 중에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정다운 스님의 遷度 중에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출발지를 댈 것이다. 그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자신의 주소나 원적지를 말할 것이다. 또다시 그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선뜻 입을 열 수가 없다. 부모의 뱃속인가? 본래 없는데 인연 따라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