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아서
(서프라이즈 / 격암 / 2009-02-16)
한국이 참 답답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는 길게 남았고 경제위기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나라가 어딘지 모르게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용산 참사에 대해 이메일을 보낸 것에 대해 개인적인 일이라고 해명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며 전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노무현 정권때라면 정권타도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일이나 세간의 반응은 이제 지쳤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기자도 지치고 국민도 지쳐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난번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한국은 지쳤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참여해서 뭘 해도 안될 거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사실 폭력시위를 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 이상의 참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폭력으로 이긴다면 이기지도 못하지만 이겨도 문제이기에 이젠 방법이 없는 거 아니냐는 절망이 한국을 무겁게 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절망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은 실상 이명박에게 반대한다는 공감대만이 시중에 있을 뿐 이명박 반대의 공감대를 던져버리고 나면 이 나라는 이미 산산이 부서져 아무런 상호 신뢰가 없게 되어졌다는 느낌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대통령 선거 다시 하는 기적이 생긴다고 해도 다시 세상은 보기 흉하게 갈라질 뿐이고 지금의 집권세력이 거의 그대로 들어설 거라는 예상이 사람들을 누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욱 더 힘을 내서 이기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욱 더 많은 지식을 통해 세상을 조종할 힘을 얻어보고자 하지만 제 생각에 희망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 봉합과 구분하지 않음을 실천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을 갈가리 찢어놓는 것 중의 하나는 조선말엽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를 이 땅에서 다시 만들려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봅니다. 미국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유학파 지식인들은 이 땅을 미국으로 만들고자 하고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프랑스며 독일이며 유럽을 이 땅에 재현하고자 합니다. 이 땅의 오래된 부자층들은 그들이 지켜온 일본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거나 고의로 숨긴다는 점입니다.
이명박정권에서 입만 열면 떠드는 실용정치란 실상 일본처럼 되자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건 영주님을 국민들이 떠받들며 엘리트가 권력을 행사하는 나라입니다. 정신이니 문화니 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두지 않는 실용주의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본일까요.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군주가 일본의 천황이나 쇼군과 비슷합니까?
우리나라를 미국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한국의 사법부가 미국의 사법부와 비슷합니까? 한국의 인간관계로 이리저리 이어진 사회가 미국이라는 커다랗고 개인주의적인 나라와 비슷합니까?
우리나라를 유럽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우리나라가 유럽 같은 부자입니까? 유럽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과거로부터 많은 지적인 재산적인 문화적인 유산을 물려받아 부자로 사는 나라입니다. 유럽은 커다랗게 지역의 여러 나라가 뭉칠 수 있는 기반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가 유럽입니까?
자동차 한 대를 수리하는데 누구는 한쪽에 커다란 트럭용 타이어를 끼우고 누구는 스포츠카용 조종간과 유리창을 달고 누구는 소달구지 몸체를 갈아 끼운다면 남는 것은 파쇠뿐일 겁니다.
그래놓고 평준화가 필요하니 안 하니 세금을 내야 하니 안 내야 하니 재벌 운영이 이래야 하니 저래야 하니 노조나 비정규직 관례나 부동산 문제를 논하는데 물론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상대적인 것입니다. 소달구지를 만들 생각이면 필요없는 게 있고 스포츠카를 만들 생각이면 꼭 필요한 게 있지요.
뭔가 근본은 건드리지 않고 말단을 가지고 시끄럽게 굴기만 해서 사람들이 전부 갈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이란 건 결국 이론이나 지식이나 외국의 예나 사상을 떠나 도대체 한국에서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그림이 필요하고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느낌입니다.
좌익과 우익이 싸우는 건 이런 것에 비하면 맛있는 음식 먹자고 했더니 짠 게 좋다 단 게 좋다고 싸우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짜도 맛있는 게 있고 맛없는 게 있으며 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들어간 해물탕인지 그라땅인지 아이스크림인지 과일 화채인지보다 분명한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림이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하늘 위에서 싸울 것이 아니라 각자 그렇게 살아서 보여주면 됩니다. 정치적 그림이란 결국 같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각자가 어느 정도까지는 각자 공동체를 만들어 연대하고 연결하여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공장도 없고 물건도 없이 미래는 이런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떠드는 식의 난장판보다 각자 작은 공동체로 뭉쳐서 행복하게 살다 보면 자연히 어느 쪽이 매력적인가가 판가름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진보건 보수건 세상에는 참 옆집에 있으면 같이 살기 싫은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같은 마을에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 논리가 아니라 분위기와 행동으로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작은 공동체라고 말했지만 요즘 세상에는 작을 필요도 없습니다. 인터넷이 전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이어주니까요. 어떤 이상과 논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서로 돕고 살고 분업하기에 잘 먹고 잘산다는 것입니다. 말싸움만 잘할 뿐 서로 돕고 살 수 없는 인간들 잔뜩 있어봐야 좋은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이제 강력한 반대로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네거티브 정치운동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동의할만한 기본적 인권마저 깨어진 독재시대에나 통하는 것이고 이제는 장사판 정치운동이 필요합니다. 뭐가 됐건 실제로 돌아간다는 증거가 있는 아이디어를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일본이 어떻고 유럽이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작게라도 되더라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만 계속될 뿐이며 분열만 계속될 뿐입니다.
서로 뜻이 달라 서로 다른 자동차를 만들더라도 우리는 서로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뭐가 되든 잘 가는 멋진 자동차가 나오면 사실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죠. 실제로 돌아가는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뭉친다는 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누가 옳은지 따지는 것은 최소한만 하고 그래서 구체적으로 지금 뭘 할 수 있으며 할거냐는 것을 따지고 그걸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죠.
바닥은 따지지 않고 우리가 정권 잡아 엄청난 세금 써서 이렇게 저렇게 크게 움직이면 지상낙원 온다는 식의 비전은 이제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게 옳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끝으로 한나라당식의 정치는 영원히 끝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10년으로도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바꿀 수 있다는 호언장담은 허구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특히 민노당쪽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지금 천국일 것이라고 합니다. 강력히 노무현을 비판하고 노무현과 이명박이 차이가 없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사람 대통령 시키면 나라가 반석에 설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못하는 것은 수많은 다른 바보들, 다른 사악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절망도 충분히 깊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절망이 충분히 깊어지고 나면 국민들 사이에 자각이 일 거라고 봅니다. 정부 쳐다보고 있거나 거시적 정부정책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작게라도 스스로 연대하고 행동하는 쪽으로 가서 살 방법을 찾는 게 빠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국민은 산산이 흩어져 있는데 청와대가 국민을 이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희망은 이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민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 격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