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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교육의 의미

장백산-1 2010. 4. 9. 14:10



여러분은 혹시 교육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자문해 본 적이있는지 궁금하군요.

우리는 왜 학교에 가며, 왜 여러 가지 과목을 배우고, 왜 시험을 치르고,왜 저마다 나은 점수를 얻으려고 경쟁할까요?

이른바 교육이라고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이며,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물음입니다.

학생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학부모, 선생님들,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교육받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까요?

그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젊은 시절에 인생의 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마련하는 데에 교육의 기능이 있는 것일까요?

일자리를 얻고, 생활비를 번다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넓고도 깊은 것입니다.

인생이란 엄청난 수수께끼, 인생이란, 우리가 인간으로 기능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입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준비나 하다 보면 우리는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놓치게 되고 맙니다.

인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수학, 물리학 등

여러분이 뛰어들고자 하는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우리가 왜 교육하며,왜 교육받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다?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삶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것이 아닐까요?

새, 꽃, 푸르른 나무, 하늘, 별, 강, 강에 사는 물고기 이 모든 것이 삶입니다.

삶이란 구차스러운 것이면서도 풍요로운 것입니다.

삶이란 무리, 종족, 국가간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삶이란 명상입니다.

삶이란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있는 미묘한 것들,

선망, 야망, 열정, 공포, 성취와 근심 같은 것들입니다.

삶은 이 모든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이 모든 것의 조그만 귀퉁이 하나만을 이해할 준비나 하는 게 고작입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시험에 합격하고 일자리를 얻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는 나날이 기계를 닮아갑니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삶을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삶에 대해 놀랍니다.



자, 그렇다면 교육의 기능은 우리를 도와 인생의 전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직업, 우리 능력이 허락하는 최상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나 시키는 데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라 성인이 되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자문해 본 적이 있는지요?

보나마나 결혼이나 하고,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에, 혹은 부엌에 싫증을 내게 되고, 점차 일터나 부엌에서 시름시름 시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겨냥하던 삶이 겨우 그겁니까?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던져 봐야 할 물음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부잣집 아들딸들이라면 진작에 보장된 훌륭한 일자리도 있을 테고,

여러분 아버지가 쓸만한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잣집에 시집 장가갈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런데 휩쓸리면 부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인격이 뒤틀리고 맙니다. 아시겠지요?



분명하게 말해 둡니다.

삶이 참으로 미묘하고 엄청나게 아름답고, 슬프고, 기쁜 것이라는,

말하자면 삶의 넓이를 이해시키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교육은 무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학위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이름 뒤로 수두룩하게 직함을 거느릴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일자리에 안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뭡니까?

그러고 나서 여러분 마음이 흐리멍덩해지고 마음 쓰임새에 진력이 나고,

하는 짓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면, 그래서 뭘합니까?

그러니까 젊을 때 인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육의 참기능이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여러분 안에 있는 지성의 잠을 깨우는 것이 아닐는지요?

지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성이란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지성을 통해 자유로이 생각하면 여러분도 무엇이 의미있는 것인지,

무엇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으면 절대로 지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야심이라는 것은

그 겨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근심과 두려움의 씨앗이 됩니다.

따라서 야심은 우리들의 마음을 맑고, 단순하고, 곧고, 따라서 지성적이게 해 주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아시겠지만 젊은 시절에 두려움을 모르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겁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사는 것은 겁내고, 일자리를 잃을까 겁내고, 우리들 관습을 겁내고, 이웃이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겁내고,

남편이나 아내가 무슨 소리를 할까 해서 겁내고, 죽는 것을 겁냅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내부에는 어떤 형태로든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젊은 시절을, 두려워 할 것이 없는,

말하자면 분위기가 자유로운-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환경에서 지내는 것이야 가능하겠지요.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 인생을 경영하면서 우리가 만들어 낸 추한 것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에 대해-조직화한 종교에 대해, 관습에 대해, 지금의 부패한 사회에 대해-모반을 시도한다면

인생의 넉넉함, 그 깊이, 그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의 정수를 맛볼 수가 있고,

인간으로서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알아 낼 수도 있습니다.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교육이란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사회가 요구하는 것,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전하고도 손쉬운 생존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삶일 수는 없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일까요.

여기에는 공포와 부패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산다는 것은 스스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색은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여러분의 내부에 끊임없는 내적 모반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이러한 삶을 고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음을 던지라고 하는 사람, 신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모반을 시도하면, 엉터리인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위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사회는 여러분이 안전하게 살 것을 바랍니다.

여러분도 안전하게 살고 싶어하고요.

안전하게 산다는 것은 모방하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공포안에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능이란, 우리들 개개인을 자유롭게,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교육자인 선생님 몫은 물론이고 여러분 자신의 몫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두려움이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굉장한 일인지 아시겠지요.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늘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가들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법률가, 경찰, 군인, 그리고 저 나름의 지위에 오르고 싶어하고,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 싸움질을 일삼는 야심 만만한 사람들 세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른바 성자들도 있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구루(스승)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이승에서건 내세에서건 권력과 지위를 탐합니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자와 드잡이하고, 사회주의자는 이 양자를 업어치기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한 자리, 권력 혹은 안정된 생활이 있는 지위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상대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서로 반목하는 신앙으로,

카스트(인도의 세습적 제도)와 귀천의 구별짓기로,

분리주의적인 국수주의자들로,

갖가지 우매한 짓거리와 잔혹한 형태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적응해야 한다고,

여러분이 늘 이 한심한 사회의 틀에

적응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들이 바라고, 여러분 역시 여기에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 다 썩어문드러진 사회 질서의 무늬에 여러분을 길들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아니면 여러분에게 자유

-자라서 장차 전혀 다른 사회, 새로운 세상을 지어낼 수 있게 하는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일까요?

우리는 이 자유를 얻고 싶어합니다.

미래에 얻게 될 것을 바라는 게 아니고 지금 얻고 싶어합니다.

얻지 못하면우리 모두 파멸하고 맙니다.

참된 세상을 살고 참된 것을 스스로 찾아내려면,

지성적인 인간이 되려면,

세상을 그저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맞서고 이해하려면,

지금 바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항상 내적으로 깊이 있는 심리적 모반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항상 심리적 모반을 도모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사람은,

이성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사람은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모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찾아내고 신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항상 묻고 항상 관찰하고 항상 배울 때만 가능합니다.

두려워하면 물을 수 없고, 관찰할 수 없으며, 배울 수 없으며,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의 기능은 마땅히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인간의 생각,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사상을 파괴하는 이 두려움을 뿌리뽑는 것이어야 합니다.

출처 :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정심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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