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악회양이 마조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눈에 마조가 법기(法器)임을 알아보았다.
회양은 좌선하고 있는 마조를 찾아가 물었다.
대덕(大德)은 무엇을 얻으려고 좌선을 하는가?
마조가 대답했다.
불성(佛性)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자, 회양은 부근에 있던 기왓장 하나를 집어들더니 마조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물었다.
기왓장은 갈아서 무엇에 쓰실 겁니까?
회양이 대답했다.
거울로 쓰려고 하네.
이에 마조가 빈정거렸다.
그런다고 기왓장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양이 일갈했다.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좌선으로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회양이 말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마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불(坐佛)을 흉내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좌선(坐禪)을 배우고 싶은 것인가? 만일 좌불을 흉내내고 싶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좌선을 배우고 싶다면, 선이란 결코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법은 영원히 계속 이어질 뿐, 결코 머무는 적이 없다. 좌불을 흉내내는 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앉음새에 집착하면 정작 깊은 이치에는 이를 수가 없다.
마니샤 , 우리는 마조(馬祖)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강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 강의의 제목은 <빈 거울:The Empty Mirror>이다.
경전에 들어가기 전에, 마조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마조는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는 세상이 애써 무시하려는 천재들이 있다. 세상은 그런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으려고 노력한다. 마조는 그런 불행한 천재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중의 에고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천재의 존재는 그대를 열등한 인물로 강등시킨다. 그래서 세상은 모든 천재들에게 해를 입히려고 기도해왔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깨달은 스승은 그대가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스승의 존재는 그대의 어둠을 빛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무지의 구름을 걷어내고 올바로 볼 수 있는 투명한 눈을 갖는 것, 그대의 어둠을 찬란한 아침 햋살로 변형시키는 것은 아주 대단하고 어려운 과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마음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마음은 어려운 일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마음의 모든 야망 뒤에는 특별해지려는 욕망이 숨어있다. 그리고 특별한 존재가 되려면 특별한 일을 달성해야 한다.
선(禪)을 수행할 때 생기는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선은 그대가 아주 평범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선은 특별한 존재를 원치 않는다. 이것은 마음의 욕망자체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마음은 항상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작은 현상이 아니다.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수 많은 생을 통해 쌓아올린 엄청난 욕망의 집합체이다.
마음은 이해하지 못한다.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왜 평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마음은 무겁다. 마음은 과거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겸손하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붓다를 보는 순간, 마음은 즉시 그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마음을 이루는 구조 자체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마음은 아주 가볍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대는 텅빈 거울이 되어야 한다.
마조(馬祖)는 서기 709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조혜능 이후, 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일찌기 육조혜능은 남악회양(南岳懷讓)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대의 발 아래에서 말 한마리가 나와서는 천하 사람들을 발길질로 차 죽이리라.
중국에서 마(馬) 는 말을 의미한다.
마조는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지냈으며, 이십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출가승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조는 천재로 태어났다. 여러 스승들이 그에 관해 위대한 스승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으며, 그 예언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런 일은 가능하다. 어떤 아이가 사회에 물들기 전에 스승의 눈에 띈다면, 스승은 그 아이의 잠재성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다른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인 혜능이 남악회양에게 말한 내용이다.
혜능은 보디달마 이후 여섯번째 선의 법통을 잇는 선사이다. 혜능은 회양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위대한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를 눈여겨 지켜보라.
예언대로 마조는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혜능 이후 두번째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혜능의 예언은 기대 이상으로 성취되었다. 마조는 혜능이 예언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조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마조가 너무 시대를 앞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군중의 마음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묘해서 일반적인 마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마조를 다시 되살리려 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의식의 역사에 초대하기를 원한다. 깨어있는 의식의 세계, 그 곳이야말로 마조가 속해있던 곳이다.
경문을 보자.
남악회양이 마조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눈에 마조가 법기(法器)임을 알아 보았다.
스승의 눈은 명확하다. 스승은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대 존재의 신비, 그대의 잠재성은 비가시적(非可視的)이다. 그러나 스승에게 있어서 그것은 활짝 펼쳐진 책과 같다. 스승은 그 책을 읽는다. 그런 스승, 즉 그대의 잠재성을 읽을 수 있고, 그 잠재성에 따라 그대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남악회양이 마조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눈에 마조가 법기(法器)임을 알아 보았다.
이 <법기:法器>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말은 마조가 사방에 빛을 뿌리는 큰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수 천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중력에 이끌리듯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갈 것이다. 누구에게 끌려가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들은 스승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의 에너지를 느끼고 갈증을 해소한 뒤에야 그 신비한 힘을 이해할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미묘한 힘이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운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는 물에 대해 신비한 민감성을 갖고 있다. 그 문제를 연구하던 과학자는 이백피트 떨어진 곳에 물을 나르는 파이프가 있을 뿐, 사방에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무는 뿌리를 파이프쪽으로 뻗어서 파이프를 뚫은 다음, 물을 빨아마시고 있었다.
과학자는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나무가 뿌리를 뻗어 파이프를 뚫고 물을 빨아마시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그는 수수께끼에 봉착했다. 어떻게 나무가 이백피트나 떨어진 곳에 있는 수관(水管)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나무는 다른 방향으로는 뿌리를 뻗지 않고 곧장 파이프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무는 물없이 살 수 없다. 나무는 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지혜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설령 물이 이백피트 밖의 파이프 속에 있다해도 나무는 그것을 감지하는 민감성을 갖고 있다.
그대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정으로 진리에 목말라 한다면, 그대는 수 천리 떨어진 곳에서도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으로 끌려갈 것이다. 존재계는 물을 창조한 다음에야 갈증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갈증이 있다면 어딘가에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물이 있음에 틀림없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 제자가 되어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존재계는 그들이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들 안에서 장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스승,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되도록 도울 수 있는 스승을 존재계는 마련해 놓고 있다.
스승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스승은 선교사가 아니다. 스승은 그대를 세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세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스승은 그대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빼앗아간다. 그대의 마음 자체를 없앤다. 그래서 그대 존재의 순수한 공간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위대한 스승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제, 진리에 대해 황금같은 질문을 던지던 시절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간혹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라고? 그런 사람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붓다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목적은 진리에 대한 황금의 질문을 세상에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 안에서 무엇인가 딸깍 소리를 내며 수 백년동안 닫혀있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진리를 조명한다. 내가 말하는 모든 스승은 진리를 조명하는 다양한 각도, 다양한 접근 방식에 다름아니다.
회양은 좌선하고 있는 마조를 찾아가 물었다.
대덕(大德)은 무엇을 얻으려고 좌선을 하는가?
이 귀절에 주목하라. 그 당시 회양은 이미 잘 알려진 선사였으며 마조는 일개 수행승에 불과했다. 그런데 회양은 마조를 대덕(大德):your reverence 이라고 불렀다. 스승에게 있어서 그대의 현재는 현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대의 미래이기도 하다. 스승은 그대가 언젠가 붓다가 되리라는 것을 안다. 며칠이 걸리든, 또는 몇 년, 몇 생이 걸리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회양은 마조의 불성(佛性)을 본다. 그래서 그는 일개 젊은 제자를 대덕 이라고 부른다.
고탐 붓다(Gautam Buddha)의 전생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아직 붓다가 되지 못했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위대한 스승의 소문을 들었다. 그는 스승을 찾아갔다. 그는 도대체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스승을 만나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사실, 그는 그렇게 행동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스승의 에너지권 안에 들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일어났다. 그는 왜 자기가 스승의 발을 만지고 있는지 깜짝 놀랐다. 그는 제자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승의 곁에 가자마자 그의 가슴 안에서 무엇인가 마구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마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의 핵심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가 스승의 발을 만진 것은 순전히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의 발도 만진 적이 없었다. 그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도전적인 젊은이였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다른 사람의 발을 만지다니? 그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이번에는 스승이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만진 것이다.
그가 당황해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처음에 저는 당신의 발을 만질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당신의 발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은 저의 발을 만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저는 깨달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대는 자신의 씨앗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언젠가 그대가 붓다가 되리라는 것을 안다. 과거에 나는 붓다가 아니었지만 현재는붓다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그대는 붓다가 아니지만 언젠가 붓다가 될 것이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사소한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무 차이도 없다.
회양은 좌선을 하고 있는 마조에게 말한다.
대덕은 무엇을 얻으려고 좌선을 하는가?
마조가 대답했다.
불성(佛性)을 얻으려 합니다.
불성(buddhahood)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라. 불성은 이미 그대의 본성이다. 만일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놓치고 말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을 방임하고 그대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 뿐이다. 그러면 붓다가 깨달음의 광채를 뿌리며 이미 그 곳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얻는다. 는 말은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얻는다 는 말은 그대가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 그대는 얻는데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얻음(得) 은 항상 외부세계, 객관세계에 대한 것이다. 부(富), 명성, 권력등. . . . .
그러나 불성은 얻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기억하는 것과 같다.
그대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분명히 어떤 것을 알고 있는데 혀 끝에서 빙빙 돌기만 할 뿐 기억할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안다. 눈을 감아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혀 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상한 느낌이다. 그대는 분명히 그의 이름을 아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모든 노력이 마음을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긴장할수록 더 닫힌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정원에 나가 꽃을 돌보거나 물을 주는 일이다. 혀 끝에 빙빙 도는 사나이의 이름은 완전히 잊어라. 장미나무에 물을 주는 것처럼 뭔가 단순한 일에 종사하라. 그러면 마음이 긴장을 풀고 느긋해지기 시작한다. 밀폐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때, 돌연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게 하나의 이름이 표면에 떠 오른다.
그대가 노력할 때는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아무 노력도 않고 얻으려는 생각조차 버렸을 때 그것은 엄청난 힘으로 밀려 들어왔다.
붓다가 되는 것도 이와 똑같다.
내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철학이 아니다. 사실, 가르침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긴장을 풀도록 도울 뿐이다.
그 기억은 그대의 불성(buddhahood)에 대해 인식하게 만들 것이다. 그 기억은 성취가 아니다. 왜냐하면 붓다는 이미 그대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얻는다 는 말은 옳지 않다. 하지만 좀더 자비심을 갖고 마조의 대답을 이해하라. 그는 붓다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의 삶에 빠져있는 그 무엇, 삶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붓다 라는 단어는 단지 마조가 의식의 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이다. 마조는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조에게 있어서 얻는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는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열망은 옳다. 그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 다만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구도자일 뿐, 아직 스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회양은 부근에 있던 기왓장 하나를 집어들더니 마조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물었다.
기왓장은 갈아서 무엇에 쓰실 겁니까?
선의 스승들은 제자를 일깨우기 위해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이상하고 즉흥적인 방식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무도 그렇게 한 이가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남악회양만의 방식이다.
마조가 물었다.
기왓장은 갈아서 무엇에 쓰실 겁니까?
회양이 대답했다.
거울로 쓰려고 하네.
이에 마조가 빈정거렸다.
그런다고 기왓장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양이 일갈했다.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좌선으로 부처가 되겠는가?
그대 자신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선방에 앉아있다고 붓다가 될 수 있겠는가?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으로는 붓다가 될 수 없다! 붓다와 똑같이 가부좌를 틀고 앉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붓다를 흉내내 앉는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대의 노력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도다.
마음을 가는 것 만으로는 붓다가 될 수 없다. 회양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대는 마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붓다는 거울이다. 붓다는 그저 비출 뿐,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거울처럼 비어있다. 거울앞으로 사물이 오고 가지만 거울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마조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회양이 말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는가?
마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불(坐佛)을 흉내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좌선(坐禪)을 배우고 싶은 것인가? 만일 좌불을 흉내내고 싶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붓다는 어떤 때는 서 있고, 어떤 때는 걷고, 어떤 때는 잠잔다.
그리고 좌선을 배우고 싶다면, 선이란 결코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법은 영원히 계속 이어질 뿐, 결코 머무는 적이 없다.
법(dharma)은 특별한 형태도, 특별한 장소도 없다. 법은 여러 형태들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대는 어떤 형상, 어떤 육체, 어떤 자세에서도 법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법은 그대 가슴의 공(空:emptiness)안에서만 발견된다. 공은 앉을 수도, 설 수도, 누울 수도 없다. 공은 공일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비어있다. 단 하나의 영원한 것, 그것은 그대의 비어있는 가슴이다.
법은 영원히 이어질 뿐, 결코 머무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앉음새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좌불을 흉내내는 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대놓고 말하는 것, 이것이 선의 위엄이다. 여타 종교는 그런 용기가 없다.
회양은 마조에게 말한다.
좌불을 흉내내는 것은. . .
부처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 . .
. . . .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 . .
부처는 숨을 거두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상(像)을 만들지 말라.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세로 앉으면 부처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가? 오늘 날, 불상은 어느 누구의 상(像)보다도 많다. 실제로 아라비아어(語), 페르시아어, 우르두어에서 조상(彫像)을 가르키는 말은 budt'이다. budt 는 buddha'에서 나왔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에서 buddha'의 어원은 buddh 이다. 그러므로 buddh'에서 budt 라는 단어를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모하메드교인들이 어느 누구의 상(像)보다도 부처의 상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모하메드교인들은 상(像)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상(像)을 파괴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파괴했다. 그런데 상(像)에 반대한다는 것이 곧 상(像)을 파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대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리는지 알 수 있다.
고탐 붓다는 말했다.
나의 상(像)을 만들지 말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부좌를 하는 것만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는 형태가 없다. 그대는 내면에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불상에서는 깨달음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니 불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오도(誤導)하지 말라. 인간의 마음은 오도되기 쉽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것에도 쉽게 집착한다. . . .
한 여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작은 황금 불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절 저 절을 떠돌면서도 항상 그 불상을 지니고 다녔다. 그녀는 아침마다 향불을 사르며 자신의 불상에 예불을 드렸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향은 그녀의 불상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절에 있는 다른 불상들에게도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황금불상이 앞에 앉아있는데 향은 다른 불상들에게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렇지만 절에는 많은 불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불상에 집착해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불상과 다른 불상들. . . .
마침내 그녀는 향이 자신의 불상에게 전달될 수 있는 꾀를 생각해 냈다. 그녀는 속이 빈 대나무 안에다 향불을 피웠다. 그리고 대나무 끝을 자신의 불상 코에 갖다댔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불상의 코가 새까맣게 그을린 것이다! 그녀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휘황찬란한 황금불상에 까만 코라. . . .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불상은 흑인처럼 보일 것이다. !
그녀는 원로 승려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찌해야 합니까? 만일 대나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 . . 향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향은 다른 불상들에게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불상에게만 예불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대나무 때문에 제 불상의 코와 얼굴 일부가 까맣게 그을렸습니다.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원로 승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어리석은 여인네로다! 모든 불상은 똑같은 한 사람의 상(像)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구나. 그대는 자신의 불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 분의 가르침은 옳다. 집착이 그대를 오염시키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집착을 경계하라! 세공장이에게 가서 그대의 불상을 깨끗이 청소하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대의 불상이 아니라 부처님에 대해 생각하라. 향이 어떤 부처님에게 날아가든 그것은 그 부처님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라. 왜냐하면 모든 불상은 똑같은 사람의 상(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붓다의 마지막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의 상(像)을 만들지 말라. 나를 형태없는 채로 놔 두라. 나를 꽃이 아니라 향기로 놔 두라.
또 하나의 극단이 있다. 모하메드교인들은 조각상에 반대한다. 만일 석상을 숭배한다면. . . . 그것은 돌이다. 돌을 숭배하는 것은 신을 숭배하는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장애물은 제거되어 마땅하다.
그래서 모하메드교인들은 모든 조각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종교인의 장애물까지 제거하는데 발 벗고 나섰다. 마침내 모하메드교인들의 역사는 온통 조각상을 파괴하는 일로 점철되기에 이르렀다.
불상을 숭배함에 의해 붓다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불상을 파괴한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대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영원한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좌불(坐佛)을 흉내내는 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앉음새에 집착하면 정작 깊은 이치에는 이를 수가 없다.
깊은 이치, 본질적인 이치는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주체성(subjectivity)이다. 본질적인 이치는 형태가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공(空)이다. 본질적인 이치는 거울과 같다. 그것은 비추기만 할 뿐, 선악과 미추(美醜)를 판단하지 않는다.
'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1.과학과 불교(연재를 시작하며) (0) | 2010.04.29 |
---|---|
[스크랩] 쓸 마음도 없고 닦을 道도 없다 (0) | 2010.04.29 |
[스크랩] 마음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 (0) | 2010.04.16 |
[스크랩] 업을 녹이는 마음 (0) | 2010.04.13 |
[스크랩] [만공스님] 나를 찾는 법 - 참선법(參禪法) (0) | 2010.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