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唯識)을 강의하는 도광(道光)이라는 강사가 대주(大珠)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떤 마음을 써서 도(道)를 닦으십니까?"
대주가 대답했다.
"노승(老僧)에게는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
이것이 주시자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그는 마음을 벗어나 있다. 그에게는 도(道)라거나 법(Dhamma)라는 목적지도 없다. 그 자신이 목적지다. 그 자신이 붓다다. 그 자신이 도이며 법이다. 그는 진리 자체다. 그러므로 마음을 쓴다거나 도라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문제는 없다.
도광이 물었다.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면, 왜 날마다 대중을 모아놓고 선을 배우고 도를 닦으라 하십니까?"
지적인 마음은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그는 대주의 훌륭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대주의 말을 분석하고 모순 점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는 계속해서 대중들을 가르치는가?"
지적인 마음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어떤 식으로 핵심을 놓치는지 보라.
도광이 물었다.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道)도 없다면, 왜 날마다 대중을 모아놓고 선을 배우고 도를 닦으라 하십니까?"
어떤 스승에게도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스승 자신도 이 문제를 우려한다.
전에 말했듯이, 고탐 붓다는 깨닫고 나서 칠일 동안 말이 없었다. 누군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칠일 동안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지 심사숙고했지만 입을 열어 말해야 하는 아무 이유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을 가르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없다. 도달할 목적지가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 듣고 싶어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떤 원인을 제공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낳는 원인은 없다. 그래서 칠일 동안 심사숙고한 결과,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건 정확한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정직하고 진실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내면의 근원으로 가까이 접근해 들어간 사람들에게 다소 냉정한 일이 될 것이다. 조금만 도와주면, 조금만 밀어주면 그들은 붓다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밀어준다면 그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대의 도움이 반드시 자비의 행동으로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밀어줌으로써 그는 전보다 더 추해질지도 모른다. 그는 더 야만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뭔데 나를 미는 것이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가 뭐요? 왜 자꾸 사람을 건드리면서 들추어내는 것이오?"하고 따지면서 싸우려고 덤빌지도 모른다. 스승의 일이 장미꽃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을 붓다가 되도록 돕는 것은 가장 정교하고 세심한 주위를 요하는 일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모든 것을 망친다. 그러나 문제는 스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에게 있다. 제자가 스승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것은 스승의 능력 밖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붓다가 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붓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어둠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 세속에 물든 사람들은 어차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내 시간을 축낼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시간을 빼앗았다고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붓다를 부추기고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당신의 말이 99.9퍼센트 옳습니다. 그러나 0.1퍼센트에 대해 생각해 주십시오. 99.9 퍼센트의 사람들에게는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 명 중의 한 사람이라도 붓다가 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0.1 퍼센트의 성공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나머지 99.9 퍼센트의 실패는 무시해도 좋습니다. 99.9 퍼센트의 사람들은 어쨌거나 붓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0.1 퍼센트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침묵을 지킨다면 내면의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 사람들에게 아주 냉정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조금만 밀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그들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그들은 자기 내면의 깊은 심연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어루만짐, 붓다의 따스함, 당신의 몸짓 하나만으로도......"
결국 붓다가 이 말에 동의했다. 그의 동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다. 그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를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 만약 그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어떤 것이 완전히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그것은 아직도 여기 저기서 기억되고 있다. 아직도 소수의 사람들은 붓다가 되고 있다. 지금도 붓다와 똑같은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군가 이미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 붓다가 된 사람이 있다면 나라고 붓다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큰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나 지적인 마음은 '논리와 인과율에 구애받지 않는 깨달음의 내적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마음은 즉각 "이것은 모순이다!"라고 단정한다. 유용한 정신적 과정(mental processes)은 마음은 없다. 마음에 의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그대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니 정신적 과정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마음 전체를 옆으로 밀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눈앞을 가리는 사념의 장막 없이 곧바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없다. 내면에서 전적인 침묵을 발견하고 그대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순간, 자신의 뿌리를 발견하는 순간, 그대는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내 뒤에, 내 안에, 나의 중심에 숨어 있는 사람을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었다니!"
그러나 도광은 즉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모순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명상과 특정한 방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주가 말했다.
"노승에게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데 어디에 대중을 모았다고 하는가?"
대주는 말한다.
"내게는 대답할 마음이 없다. 내게는 그대가 느끼는 모순을 시원하게 풀어 줄 어떤 마음도 없다."
도광이 소리쳤다.
"선사께서는 왜 사람을 앞에 놓고 거짓말을 하십니까?"
이것이 영원한 문제다. 스승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스승의 거짓말은 자비심에서 나온다. 그의 거짓말은 그대가 도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준비 작업이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 이야기 하나.
어느 나라의 왕이 밤마다 변장을 하고 시찰을 나갔다. 그러던 중 그는 항상 나무 밑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한 청년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석상(石像)처럼 미동도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왕이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서 말(馬)을 멈추고 말했다.
"젊은이, 그대의 명상을 방해해서 미안하오만......"
젊은이가 눈을 뜨고 말했다.
"저는 명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니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자신이 명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호기심을 느끼신다면 아무쪼록 그 호기심을 풀고 가시지요."
왕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왕궁으로 초청하고 싶네. 내가 그대를 돌볼 것이네. 이렇게 나무 밑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붓다처럼 고요한 그대를 보고 나는 그대의 침묵, 그대의 몸짓, 그 부동(不動)의 평온함을 좋아하게 되었네. 그대를 왕궁으로 초대하겠네. 사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라네."
이것이 속된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왕은 젊은이를 자신의 왕궁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젊은이가 초대를 거절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만일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이 젊은이가 왕궁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툴툴 털고 일어나 말했다.
"좋습니다. 자, 가시지요."
즉시 상황이 돌변했다. 왕이 생각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지? 이 자는 왕궁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관심이 있다. 왕의 손님으로 초대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자는 위대한 성자가 아니다!"
이것이 성자에 대한 낡은 개념이다. 낡은 개념에 따르면, 성자는 온갖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불편이 곧 종교다. 질병과 굶주림,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고문하고......그러면 위대한 성자가 된다. 이 젊은이는 졸지에 성스러움을 잃었다. 왕의 마음속에 있는 성자의 개념과 부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의 신분으로 한번 뱉은 말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은 그에게 왕궁에서 최고 좋은 장소를 제공하고, 시종과 아름다운 여자들로 하여금 그를 돌보게 했다. 젊은이는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번 받아들일 때마다 그의 성스러움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무슨 성자가 이런가? 그는 초대형의 멋진 침대를 받아들였고, 왕궁의 온갖 진수성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보고 왕이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 자는 나를 속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속임수를 쓴 것 같다. 그는 내가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그 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붓다처럼 거룩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멍청한 내가 걸려들고 말았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이 녀석을 씹어 삼킬 수도 없고 침을 뱉어 줄 수도 없고......이런 자가 내 왕궁 안에 있다니......"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숨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들이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왕이 넌지시 말했다.
"한 가지 의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네. 그 의문 때문에 지난 여섯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 이 의문을 풀고 싶네만......"
젊은이가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십시오."
왕이 말했다.
"이렇게 물으면 그대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도대체 그대와 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네. 그대도 왕궁 안에 살면서 온갖 사치를 만끽하고 있지 않나? 그대와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젊은이가 말했다.
"언젠가 이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의문은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폐하를 따라 오던 날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폐하는 용기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날 즉각 물어야 했습니다. 왜 쓸데없이 여섯 달 동안이나 끙끙 앓으면서 잠을 설치셨습니까? 폐하의 질문에 대답해 드릴 수는 있지만 여기에서는 곤란합니다. 저와 함께 왕국 밖으로 나가시면 그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먼 길이 아니었다. 몇 마일밖에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왕국의 경계선이었다.
왕이 말했다.
"그 곳까지 갈 필요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대답해도 되네."
젊은이가 말했다.
"안됩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둘 다 강을 건너갔다. 건너 편 기슭에 당도하자 젊은이가 말했다.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제가 앞장 서 가겠으니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대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 내게는 왕국이 있네. 아내와 자식이 있고,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대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가 말했다.
"이제 폐하와 저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떠나겠습니다. 제게는 왕궁도 없고, 아내도 없고, 풀어야 할 문제도 없습니다. 저는 폐하의 왕궁에서 행복했던 것처럼 나무 아래에 앉아서도 행복했습니다.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저의 깨어있는 의식은 왕궁에 있을 때나 숲 속에 있을 때나 똑같습니다."
이 말에 왕이 자신의 추함을 느꼈다. 그렇게 추한 생각을 했던 자신에 대해 큰 서글픔이 밀려왔다. 왕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추한 생각을 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제 눈이 어두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폐하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는 모습을 보니......저는 왕궁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다시 '맙소사! 이 자가 또 나를 속인 것인가?'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떠나게 놔주십시오. 온 세상이 저기에 있습니다. 제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기대앉을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됩니다."
이제 왕이 더 고집을 피웠다.
"안됩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평생동안 후회하며 괴로워할 것입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좋습니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지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폐하는 다시 '도대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이지?'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속된 마음은 오직 평범하고 천한 것만 생각한다. 이런 마음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
대주가 말했다.
"노승은 사람들에게 권장할 혀도 없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제 도광이라는 이 지식인은 더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승 대주는 말한다.
"노승은 사람들에게 권장할 혀도 없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대주가 옳다. 그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하고 속된 세상을 초월한다. 깨달은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존재계가 그 자신을 통해 말하도록 허용할 뿐이다. 그는 보지 않는다. 다만 내면의 붓다가 그의 눈을 통해 보도록 허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충분히 수용적인 사람은 스승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붓다의 눈을 본다. 붓다는 더 이상 자기의 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존재계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더 이상 혀와 눈과 손을 갖고 있지 않다. 이제 존재계가 무엇을 원하든 그는 존재계의 뜻에 따른다. 그는 삶 전체를 존재계에 일임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주는 더 명백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나는 혀가 없다."고 하면서 여전히 말을 한다. 그는 "혀도 없는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는가?"하고 반문한다.
이것이 스승이 당면한 문제다.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진리를 오염시킨다. 아무리 노력해도 진리를 말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약간의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 향기 또한 충분히 지성적인 사람들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은 그대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대의 말이 공허한 반면 스승의 말은 공허하지 않다. 그대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할 때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어쩌면 사회적인 관례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이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문자 그대로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스승의 말은 공허하지 않다.
스승의 말과 행동에 담겨 있는 향기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지성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명심하라. 지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은 다르다. 지식인은 학자다.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라고 해서 반드시 지성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 지식도 없는 농부나 벌목꾼, 또는 어부가 더 지성적일 수도 있다. 그는 전혀 지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행동하는 방식은......
러시아가 혁명을 겪고 났을 때......제정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코바가 아니라 페트로그라드(Petrograd)였다. 페트로그라드는 황제 중의 한 명인 '페테르(Peter)'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 연상 작용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수도를 모스코바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수도를 바꾸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으므로 그들은 할 수 없이 페트로그라드에서 일해야 했다.
황제의 궁전 바로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었다. 이 바위가 행인이나 운송 수단이 궁전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들의 통행으로 황제가 방해받지 않도록 이 바위는 철저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이 바위 때문에 왕궁 바로 앞의 길은 통행이 불가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바위를 치우려고 했지만 그 크기가 너무 거대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다.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불러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바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 위해 궁리해 보았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고심했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늙은 농부 한 명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건축가와 기술자, 정치가들이 의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농부가 나서서 말했다.
"나는 그저 무지랭이 농부일 뿐이오. 당신들이 들먹이는 어려운 용어들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소. 하지만 보아하니 당신들은 이 바위를 옮기고 싶어하는 것 같군요.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오."
이 말에 레닌(Lenin)이 직접 나섰다.
"간단한 일이라고 했습니까? 무슨 묘안이 있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묘안이랄 것도 없소. 바위를 옮길 필요가 없어요. 바위 주변의 흙을 파내시오. 바위 밑의 계속 파내다 보면 결국 바위가 땅 밑으로 파묻힐 것이고, 길의 일부가 될 것이오."
이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지성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건축가와 기술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책과 대학에서 배운 개념적인 지식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당황했다. 이 가난한 노인에게는 실제적인 지성이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오. 먼저 바위 주변의 흙을 파내시오. 그 다음에 바위 밑의 흙을 파내면 될 것이오. 바위는 큰 구덩이 안에 자리잡을 것이고, 길의 일부가 될 것이오. 이 바위는 보기에도 아름다우니 치울 필요가 없소. 오히려 왕궁 앞의 길을 아름답게 꾸며줄 것이오."
농부의 지시대로 행해졌으며, 이 바위는 아직도 페트로그라드의 왕궁 앞에 놓여 있다.
지성은 명확하게 통찰한다. 그러나 지식은 빌려온 것이다. 지성적인 사람이라면 도광(道光)처럼 "스님은 사람을 앞에 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방편과 길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지금 제게는 방편도 없고, 길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이것은 모순 아닙니까?"하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광은 스승과 같은 차원에 오르지 못했다. 높은 봉우리에 있는 것을 저자거리로 갖고 내려와야 하는 스승의 애로 사항을 도광은 이해하지 못했다. 스승은 그대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대 안에 열망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열망 자체가 없다. 그대는 꿈속에서라도 붓다가 되기를 원한 적이 있는가? 이 삶의 근원이 어디인지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목적지가 없다 할지라도 스승은 그대를 위해 목적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훌륭한 구도의 길이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 여행해야 하며 그대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어려운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마음은 분명하고 단순한 것에는 흥미가 없다. 단순한 것은 그대의 에고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대는 "나는 방금 바나나 껍질을 벗기는데 성공했다! 신문에 내 사진이 실려야 한다. 나는 인류 최초로 바나나 껍질을 벗긴 사람이다!"하고 외치면서 거리로 뛰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외친다면 사람들은 그대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그대 자신이 바나나가 될 것이다.
바나나 껍질을 벗기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에베레스트 전상에 오르면 전 세계가 관심을 갖는다. 모든 뉴스 매체가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고 선언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것에 끌린다. 그대의 에고를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간단한 것은 매력이 없다. 간단한 것을 갖고는 에고를 주장할 수 없다. 스승은 그대가 이미 붓다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스승이 "그대는 붓다다."라고 말해도 그대는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스승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날마다 "그대는 붓다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는 진실로 내 말을 믿은 적이 있는가?
화가 난 아난도는 내게 의심스럽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녀는 무엇을 의심하는 것일까? 붓다가 되라고 하는 나의 충동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대를 충동질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그대는 자신의 잠재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머리를 계속 내리쳐야 한다. 내가 이 강의에서 아난도에게 '니베다노의 북'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니베다노는 아난도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날마다 그녀를 내리친다.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이것은 아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지적인 사람들 모두의 문제다. 아난도는 법률을 전공한 지식인이다.
도광이 말했다.
"저는 선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말씀을 하고 계시면서도 '내게는 혀가 없다.'고 합니다. 당신은 방편과 목적지에 대해 가르치면서도 '쓸 마음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주가 말했다.
"이 노승도 모른다."
대주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내가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지는 나를 사용하고 있는 존재계만이 안다. 나는 존재계에 모든 것을 일임했다. 만일 존재계가 나를 통해 거짓말을 하고자 한다면 나는 거짓말을 할 것이다. 존재계가 나를 통해 다른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나는 그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우주의 손에 나 자신을 맡겼다."
대주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스승은 그 자신의 개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不在)한다. 또한 우주적 체험에 관한 한 그는 절대적으로 현존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지성과 가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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