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엄밀한 학적 논의는 피하고 싶어요. 그저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보편적이고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에 일단은 근거를 두고 살펴보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몸은 ‘사람’의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꼴을 갖추고 있는 측면, 쉽게 말해서 물질로서의 몸뚱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마음은 ‘사람’에게서 육체적인 측면을 제외한 정신적인 측면 즉 사고와 감정 등의 의식 차원뿐만 아니라 비의식 내지 영적 차원도 포함하는 것으로 정리해 두고 살펴보고자 해요.
이런 배경 속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살펴보되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관련 지어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이해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더듬어보고자 해요. 이렇게 살펴나가기 위해서는 서양의 인간 내지 존재 이해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우리의 사고 방향에 영향을 줘 왔으며 그 문제점들은 무엇인지 짚어져야 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 동양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은 어떤 것인지, 그 관점이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지를 모색해 보면서 참된 신앙을 회복해 낼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알아봐야겠어요.
1. 가르고 쪼갬이 빚어내는 죽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본다면 이원대립론적 사고가 아닌가 해요. 무엇이든지 둘로 쪼개 버리는 거죠. 그리곤 그 중에 하나만 취하려는 거예요. 그 둘 사이에 우열의 차이를 설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장 먼저 쪼개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이죠. 하느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그렇게 멀고 아예 본질부터 다른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 이해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정신과 물질을 나누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구분되어지고, 인간에 와서는 몸과 마음으로 쪼개져 버리는 것이죠. 그러면서 한쪽은 귀하고 아름답고 좋고 올바른 반면 다른 한쪽은 천하고 추하고 나쁘고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쪽만 취하고 다른 한쪽은 버리려는 데서 온갖 갈등과 아픔과 불행이 빚어지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이야기가 창세기의 창조설화에 나와요. 즉 인류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고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그때부터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왔다는 사실이에요.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요. 본래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하나로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온전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것을, 둘로 구분 지어 보기 시작하고 반쪽만을 택하기 시작했으니 그 사이에 갈등과 싸움이 생기고 그 결과 죽음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리 신앙 생활을 들여다봐도 기본적으로 이런 시각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요.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일상의 삶과 신앙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겠죠. 거칠게 나눠 본다면 성당이나 교회에서의 거룩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일상의 삶이라는 속된 영역이 따로 있는 거예요.
몸과 마음 역시 이런 기본 구조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여져요. 몸과 마음이 균형을 잡고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참 힘들어요. 심한 불균형 내지 분리 현상들을 드러내고 있죠. 단적인 예가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관심과 힘을 쏟으면서도 마음 내지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시피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그나마 좀 깨어있고 애쓴다는 사람이 주일을 지키고 약간의 기도를 하는 정도죠.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이 기도생활을 봐도 몸과 마음의 분리 현상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 같아요. 기도할 때 몸의 상태 내지 자세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시되고 말아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음과 따로 구분되는 기도의 무슨 특별한 자세가 요구된다기보다는 몸가짐이 마음과 함께 어우러져 기도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예요. 사실 기도란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며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있는 공간의 주위 상황 즉 자연과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며 더 본질적으로는 우주 전체와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그 우주적 변화의 흐름을 타며 순응해나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저 앉아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생각만 좀 하고 그에 따른 감정상의 느낌만 어느 정도 맛보는 그런 것은 기도가 아니죠.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몸과 따로 노는 사고 작용만 열심히 발동시키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생각을 열심히 전개한 결과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약해 말을 안 듣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거예요.
이처럼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은 도처에 볼 수 있어요. 예컨대 미사 때 독서나 복음이 낭독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신부가 강론을 할 때 신부를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요. 대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폼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관상의 자세에 들어가 있기가 일쑤죠. 만남이 이루어지고 관계가 형성되고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은 그런 식으로 귀만 열어 놓고 앉아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이 역시 몸은 없고 생각 중심의 마음만 창백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에요.
거꾸로 성체에 대한 움직임은 몸 내지 물질적 측면에만 과도한 집착을 드러내고, 그 형상 속에 담겨 있는 원리적 측면 내지 마음에는 소홀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속칭 ‘나주의 성모님’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건처럼, 성체가 기이한 현상으로 변화되는 그런 특이한 현상에만 몰두하다 보니 신앙이 건강하질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마는 거예요.
그리고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의 경우에는 미사 전례 안에 여러 가지 몸 동작들이 있지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가톨릭이란 다분히 형식적인 종교라는 비난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하느님을 제대로 흠숭하기 위한 전례 안에 그에 합당한 몸 동작들이 수반된다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이에요.
다른 모든 활동에서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조차 그런 몸짓에 마음이 실리지 않고 그저 기계적인 몸놀림만 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보긴 하지만 말예요. ‘다른 모든 활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일상의 삶 속의 많은 행위들 안에서도 몸 내지 행위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경우는 정말 보기 힘든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더 나아가 행위의 객체와 하나되어 움직이고 있을 때 맛보는 그 체험이란 정말 놀라운 바가 있음에도 그 맛을 아는 이는 드문 것 같아요.
이렇게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비치는 몇 가지 예를 들어봤습니다만, 사실 이런 이원대립론적 사고는 그 뿌리가 의외로 깊어요. 그런 사고 방식이 서구 사상의 주류를 형성해 오고 있는 점만 봐도 그렇죠. 기독교 신앙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셨던 그 근본 메시지가 많은 변형을 겪었던 것이에요. 불변의 존재 개념을 정점으로 실체 중심적 사고를 펼쳐 온 헬라 사상에 의해서 말예요. 그 결과 본래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철저한 일원론적인 관점이 그리스 사상 즉 신플라톤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입각해 신학이 정립되는 과정 속에서 변질되고 말았던 거예요. 서구의 철학사라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원용한다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병폐는 대단히 심각한 거예요.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계의 온갖 어려움, 빈부의 격차, 인간 소외, 유전자 복제 문제 등이 모두 근본적으로 여기에 걸려 있는 거죠.
2. 하나로 아우름에서 샘솟는 생명
서양적 사고만이 참되고 올바르며 과학적이라는 허상 속에서 철저히 교육 받아온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 진통을 그대로 겪고 있죠. 이제야말로 이러한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해요. 그것이 예수님의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죠. 한 마디로 말하면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라는 거예요.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고 마음이 없으면 몸 또한 없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우리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을 바라보던 시각이기도 해요.
동양적 관점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주역(周易)에 나타나고 있는 음양(陰陽)사상이에요. 이 관점은 여기에서 상설할 계제가 되진 못하지만, 하느님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을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상징성의 통합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여기서 음양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니고 현실적인 실체들을 가리키는 상징들이죠. 이 음양이 하나의 태극을 이룬다고 하듯이, 혹은 하나의 태극에서 양의(兩儀)인 음과 양이 나왔다고 하듯이, 서로 대극을 이루고 있는 음과 양이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에 의존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하나의 완전한 존재를 이룬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쉬 선과 악은 완전히 다른 두 존재로 바라보지만 음양의 관점에서 보면 선이 없으면 악도 없는 것이고,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거예요. 선은 악의 이면이고 악은 선의 이면인 셈이죠. 즉 하나이지 둘이 아닌 거예요. 실존적인 차원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은 존재인 것이죠. 이렇게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원대립론적 관점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투쟁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해요. 상호간의 관계가 중요하고, 온전한 생명의 움직임을 좇아 균형을, 중용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지, 선이니 악이니 하면서 본질적으로 다른 두 존재가 대립하는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해요.
우리가 몸과 마음을 알아들을 때도 이런 지반 위에 서서 바라봐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그렇다면 사실 몸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내지 영이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마음이란 사람을 몸의 형태로 드러나게 하는 본질 혹은 존재 원리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몸이 양(陽)이라면 마음은 음(陰)인 셈이죠. 이는 마치 상대성원리에서 이야기하는 에너지와 물질과의 관계와도 같아요. 하나의 존재가 상황에 따라 에너지로도 물질로도 변환될 수 있는 것처럼 말예요. 물론 여기서도 마음에 대한 엄밀한 규정 여하, 즉 마음에 영의 차원을 포함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논의가 달라지기도 하겠지만 말예요. 여하간에 몸과 마음이란 ‘사람’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두 모습일 뿐이죠.
더 나아가 ‘사람’이란 몸만으로도 완전한 사람이며 마음만으로도 완전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현상적으로 드러남에 있어서 몸과 마음이 달리 구별되어 보일 뿐이지 존재원리 차원에서 볼 때는 몸 안에 마음이 완전히 녹아 들어가 있으며, 마음 안에도 역시 몸이 완전히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에요. 양이 음을 포괄하고 있으며 음 또한 양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따라서 몸 절반 마음 절반 하는 식으로 몸과 마음이 합쳐질 때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녜요. 물론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몸만으로는, 마음만으로는 불완전하고 서로 보완되어야만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몸만으로도, 마음만으로도 완전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태극과 음양의 존재원리가 명확해지는 가운데 존재의
참된 생명성 내지 도(道)를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물이 되며, 우리의 마음은 또한 하느님의 존재원리 내지 섭리의 드러남이므로, 결국 우리의 몸은 그대로 하느님의 존재원리를 가시적 형태로 드러내고 있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는 모든 존재자 안에 태극의 원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예요. 이러한 우리 몸의 상징성은 마치
자연계가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는 한데 그것보다 훨씬 더 농축적이고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나 많죠. 이는 마치 우리가 비의식 차원 내지 영적 차원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과도 상통하고, 우리 감관에 포착되는 현상세계를 넘어 하느님의 존재원리의 세계에 대해서 지극히 무지하다는 것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보여져요. 자신의 체형, 표정, 윤곽, 눈빛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내적 존재원리인 마음 내지는 하느님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성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죠.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예요.
사실 우리의 몸이란 완전한 모습 내지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죠. 완전한 구원이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본래 ‘사람’(人)이란 하늘(天)과 땅(地)의 가운데서 양자를 자신 안에 통합해내어야 하는데 이 점이 아직 불완전하고 미숙한 거예요. 마음이 하늘의 변화원리를 온전히 알아들어 그 원리에 좇아 땅에 속해 있는 몸을 조화롭게 다스려야하는데 이 점이 서툰 거죠. 하늘인 양과 땅인 음이 사람 안에서 온전한 조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측면에 있어서 일원론적으로 통합된 모습은 예수님에게서 완벽하게 볼 수 있어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읽어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의지를 이 땅의 상황에 맞춰 그대로 실현해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중(中)의 위치를 확고히 지키며 그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찬 변화의 흐름을 멋들어지게 탔던 거예요. 당연히 기존의 틀에 박힌 규칙에 좇아 움직인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늘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변화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찾으며 움직였던 것이죠. 아버지의 뜻 내지는 의지만을 수행한다는 그 원칙만이 불변일 뿐 다른 모든 행동준칙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었던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사람’의 원형(原型)이 되는 것이죠.
이처럼 예수님의 삶 전체가 철저한 일원론적 통합의 맥락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몸과 마음과의 관계에 좀더 한정해서 본다면 치유의 기적을 들 수 있을 거예요. 복음서 전편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치유사화를 보면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풀고 나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하는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는 거예요. 몸이 낫는 것은 믿음이, 마음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돈되었다는 가시적 표징인 거예요. 몸이 나았다는 것은 마음이 나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나으면 몸이 낫는 것이죠.
3. 열매를 바람에서 풍겨 나오는 고즈넉함
지금까지 지극히 소박하고 피상적으로 신앙인들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움직이고 있는가, 그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디서 해결책을 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봤습니다만,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존재를 이해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서양 것이 아닌 동양 것으로 교육받아 왔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워졌을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물질문명의 도도한 흐름에 휘말려 우리 것의 우수함과 귀함을 땅속 깊이 파묻고 말아버렸던 것이죠.
이제 다시 꺼내 먼지를 털고 그 아름다움을 음미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봐요. 기독교 신앙이 서양 철학의 사고 방식에 좇아 이해되어 왔지만 그 한계성이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에는 동양 철학의 사고 방식에 좇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해요. 적어도 보완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주역(周易)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봐요. 음양(陰陽)이라는 대극을 이루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주축으로 해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해, 죄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해들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 있다고 보여요. 한 마디로 하느님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이러한 주역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 사상사에서 대단히 보배로운 정역(正易)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우리의 전통적인 존재에 대한 관(觀)을 회복시켜 그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전한 복음(福音)의 본래 메시지를 되살려내는 것이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에도 더 이상의 분열과 갈등과 죽음이 넘나들지 않고 온전한 생명과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