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21세기 왜 다시 원효인가? - 인간관

장백산-1 2011. 2. 3. 01:08

21세기 왜 다시 원효인가? (김상현 교수)

 

- 인간관

 
 
모든 법은 인연따라
화합한 것이기에
별다른 성품이 없다
 
 
기사등록일 [2005년 11월 15일 17:00 화요일]

 

 

불성의 실체는 일심…일심의 성품은 중도
주체-환경이 교차하는 그 전체가 바로 ‘나’


 

<사진설명>원효대사가 주석하면서 정진했던 부안 개암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핵심은 연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 그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연기의 공식에 의해서 모든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원효도 역시 그랬습니다. 인간은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입니다. 온(蘊)이란 요소라는 뜻입니다.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 중 색은 물질적 요소인 육체, 수는 느끼는 작용, 상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적 작용, 식은 의식작용입니다.

삶이란 오온의 조합이며,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의 조합입니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마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다 변합니다. 그것은 매순간 태어나고 또 죽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 비구여, 오온이 생겨나고 부패하고 사라지는 매순간, 너희들은 태어나고 부패하고 사라지는 것이니라.’

인간은 오온가화합이되, 오척의 신체와 거기에 깃든 마음만이 아니고, 세계 전체가 자기가 됩니다. 주체와 환경이 교차하는 그 전체가 진실한 자기인 것입니다. 정신의학계의 설명에 의하면, 환경세계란 자연환경, 대인관계 환경, 신체환경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사는 물리적 환경이나, 자기가 맺고 있는 대인관계나, 자신의 신체가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 주체인 마음과 자기 환경인 이 세계가 분별되어서는 안 되는 무분별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는 일체의 환경과 교차하고 교감하는 걸까요? 상응부경전에서는 일체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일체라고 하는가? 눈과 물체(의 현상)이니라. 귀와 소리이니라. 코와 향기이니라. 혀와 맛이니라. 몸과 촉감이니라. 마음과 그 대상(法)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 이 일체 이외에 다른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면, 연설일 뿐이며, 물음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으리라.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연기하고, 이를 화엄(華嚴)에서는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라로 설명합니다. 우리 이 작은 몸도 분해해보면 수억만 개 은하계만큼이나 많은 세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몸뚱이 속에 우주가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피 한 방울도 뽑아서 몸 속에 녹아있는 모든 것을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이 그 속에 모든 게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우리를 받아줄 때 우리 또한 우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합일되는 것입니다. 물론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무진연기(無盡緣起)합니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조건에 상호의존하기에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각기 변화하고,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성품, 곧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존재도 도무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술을 하시는 분들이 화엄철학을 공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고는 합니다. 비디오아트 하시는 백남준 선생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의 작품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들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목이 영 엉망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뭡니까. ‘일중일체다중일’ ‘중중무진’ 뭐 이런 식으로 이름붙이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화엄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반대로 극도로 세밀한 것에 대해서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것이 동시에 있다는 점은 원효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원효에는 공자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자는 지나치게 현실적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장자의 멋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현실에서 늘 한 발자국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다릅니다. 현장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무애로 뛰쳐나가잖습니까? 공자와 장자의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걸출한 인물인 것입니다.

『본업경(本業經)』에는 일체법(一切法)을 명료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삼매론』에서 ‘한 법계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열반종요』에서 ‘일심을 불성이라 이름 한다’라거나 ‘불성의 실체는 바로 일심이며, 일심의 성품은 모든 극단에서 벗어나 있다.’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이름하고, 불성은 곧 제일의공(第一義空)이며, 제일의공을 중도라 이름하고, 중도는 곧 불(佛)이라 이름하고, 불을 열반이라 이름 한다.’고 했습니다. 얼핏 어려운 것 같지만 결론은 불성이라는 게 곧 연기라는 겁니다. 깨달음의 핵심은 연기이지만 연기이기 때문에 거꾸로 어떤 핵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핵심이 없는, 알맹이가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해 전달하기 어려우니까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신이라든지 궁극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고정불변의 진리도 아닙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실제(實際)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중도입니다. 일심에 진여와 생멸의 두 문이 있다는 것도 일심이 어떤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일심이 왜 일법계(一法界)일까요? 원효는 깊은 산속의 샘물이 큰 바다와 같고 하나의 티끌이 시방세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의상도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앉아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노래했지 않습니까? 이로 보면, 일심과 법계는 같습니다. 그리고 일심의 원천은 이미 바다와도 같은 것입니다. 원효가 ‘마음의 바다(心海)’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또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바다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나 영혼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러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고 하면 허전해하고 불안해합니다. 이게 곧 무명입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나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영혼을 붙잡고 헤매면 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탁 놔버리십시오. 그러면 편해진다고 부처님께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효도 『이장의』에서 분명한 어조로 ‘오온법(五蘊法)을 떠난 외에 신(神)이나 나(我)는 없다(離蘊法外 無神我故).’고 말했던 것도 이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원효는 또 말했습니다.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성품이 없다. 마치 수레는 멍에채와 바퀴살과 덧바퀴 등이 화합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수레라는 것이 다로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와 같아서 오중(五衆, 오온)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대혜도경종요』)

이렇다고 허무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가합해서 이렇게 70~80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효의 이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이걸 정말 알게 되면 매사에 우리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부모님을 땅에다 묻고 그 땅 밑에 우리 부모님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헛된 집착이고 무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집착할 것도 없이 훌훌 태워버리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인생관이나 종교관, 또 오랜 관습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간단치 않습니다. 저도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집에 가서 형님들한테는 절대 이런 말 안합니다. 제가 막내인데 이런 말 하면 뭔 쓸데없는 소리하느냐고 괜히 욕만 먹고 말겠지요. 그래도 진실은 이겁니다. ‘나’도 없고 ‘신’도 없다는 것.

마음은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만들어 낸 색신(色身)이 있다고 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없으니, 어찌 내가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마음이 있지 않으니, 인과도 또한 없는 것이요(因果亦空), 인과가 없으니 십이지(十二支)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더욱 만드는 자(作者)나 받는 자(受者) 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금강삼매경론』)

인간은 범부도 성인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에 성불할 수도 있고, 중생으로 악순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설정하기도 합니다.

『기신론』에서는 일심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효는 이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즉 일심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물들지 않으면서 물드는 것이고, 둘째는 오염되었으면서 오염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염되었으면서 오염되지 않는 것이란 일미의 적정을 뜻하고, 오염되지 않으면서 오염되는 것이란 육도에서 표류하며 떠도는 것입니다.

원효가 『기신론별기』에서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여서 생멸이 있게 되므로, 따라서 생멸하는 마음을 생멸하지 않는 마음에 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생멸하는 마음의 심체(心體)에 둘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것도 이렇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수한 공덕 갖춘 不空여래장의 ‘예비 붓다’
 
 
 
오염에서 벗어난 뒤엔 곧 맑은 성품 드러나
개인은 세계와 호흡…집단 무의식과도 연결


 

<사진설명>경북 경산시 자인면에 위치한 이곳은 원효 스님의 탄생성지로 추정된다.

원효가 마음이 있다고 할 때에는 대개 두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여(眞如)한 마음인데, 이 마음은 본래부터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성품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원효가 인간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성이 있고 깨끗한 양심이 있고 물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원효는 끝없이 강조합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무수한 공덕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불공여래장으로 그것은 텅텅 비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는 거죠.

또 하나는 생멸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가려져 있고, 성품이 나타나지 못하며 숨겨져 있다는 뜻을 간략하게 표시하기 위하여 공(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염된 것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 본래의 모습이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이것도 여래장이라고 부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물결이 된다고 할지라도 끝내 물의 성품을 잃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하는 거죠. 이것은 숨어있는 여래장 즉 은복여래장(隱覆如來藏)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제 모습을 찾아 나타나면 바로 법신(法身)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의 바다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지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 마음은 거대한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가 인식작용을 할 때는 감각이라 할 수 있는 눈, 귀, 코, 혀, 느낌 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눈으로는 색을 인식하게 되고, 귀로는 소리를 인식하는 식이죠. 그런데 감각과 대상만 있다고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이 영향을 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인식하는 아니라 본인의 깊은 식과 연결돼 있다는 겁니다.

그럼 제6식이 뭐냐. 이것은 의식(意識)의 세계인데 지각, 지성, 감정, 의지, 상상력 등 이런 것을 통틀어 6식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제7식인데 바로 요놈이 문제입니다. 흔히 마나식(末那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온갖 것을 계산하고 분별하는 놈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나’라는 에고가 중심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고,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합니다. 자아의식, 아집, 자기에 대한 구속, 자기견해에 대한 집착, 아만, 자기애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8식은 알라야식으로 장식(藏識)이라고도 하고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하는데 이 게 참 재미있습니다. 이 제8식은 일체의 종자를 보관하여 간직합니다. 제 얘기를 잠깐 말씀드리면 저는 어릴 때 소도 길러보았고 꼴도 베어보았고 나무도 해봤습니다. 어릴 시절 밤에 우두커니 별을 바라봤던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제 기억에 남아있는 것도 있고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또 아주 예전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에서 노인이 칠십 몇 번인가를 고기를 못 잡고 빼앗기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정확히 미끼를 끼워 넣으며 이렇게 해야 행운이 올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던 부분은 제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누구든 자기가 경험했던 것이나 지나온 날들이 기억 가능한 6식으로도 있겠지만 설령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제8식에 모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점심을 먹을 때 은행이 나왔는데 그 걸 먹으며 은행의 추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땅에 떨어진 얼마 후 뿌리를 뻗어서 물기를 빨아들였을 테고, 어느 날은 저 먼 아득한 남태평양에서 불어온 바람을 맞아 은행나무 잎이 크게 흔들리거나 떨어지기도 했을 거고, 어느 날은 매미나 까치가 와서 울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을 별을 보기도 했을 겁니다. 그게 은행이 갖고 있을 무의식의 세계일 것입니다. 또 우리가 먹은 명태 있지 않습니까. 그 명태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 전에 그 얼마나 바다를 헤엄쳐 다녔을 것이며, 또 그 바다에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먹었겠습니까.

그런 수많은 경험을 겪었을 명태라는 놈을 우리는 이 안에 섭취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에는 우리와 우리 부모님들의 추억은 물론 아메바 시절부터 녹아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그야말로 거대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도 무의식에 녹아있고 남이 경험한 것도 이 안에 녹아있습니다. 은행의 추억과 명태의 과거가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 알라야식에 다 저장돼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화엄이고 연기이기 때문이죠.

개체는 세계와 호흡합니다. 이로 인해 개인은 집단무의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유식(唯識)으로 말하면, 공업(共業)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8식인 알라야식은 연기의 축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러니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우리의 이 알라야식에 저장된다는 것이지요. 방송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신 분이 오늘 여기와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방송이 어떤 것을 보여주느냐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앞에 놓고 그 허깨비 같은 것을 보아가며 끝없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칼로 찌르는 장면을 자주 본 아이들은 그 비슷한 상황이 되면 잠재돼 있던 무의식이 튀어나와 자기도 모르게 칼로 찌르게 됩니다. 조잡한 광고를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우리의 인격까지도 조잡하게 돼 있습니다. 그건 지상파 방송뿐만 아니라 그 수많은 채널에서 저질스런 방송이 나오면 나오는 만큼 국민의 수준도 질이 낮아지게 돼 있는 겁니다.

옛날부터 임산부한테 온갖 것을 조심하라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고 했던 것이 다 잠재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꽁보리밥과 어느 날 보았던 별빛과 어느 날 읽었던 시와 전혀 감동이 없던 책까지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습(薰習)이라는 것 자체가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훈습은 담배를 오래 피면 담배냄새가 몸에 배이고 짙은 안개 속에 오래 있으면 이슬이 옷에 젖어들듯이 우리들이 경험했던 그 자체가 무의식 깊이 스며드는 것을 훈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좋은 냄새를 맡으면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지만 반대로 나쁜 것을 보고 나쁜 소리를 듣고 나쁜 냄새를 맡으면 탁한 쪽으로 영향을 받게 돼 있습니다.

다소 용어도 낯설고 내용도 쉽지 않지만 훈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훈습은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경험을 통해서 진여(眞如)가 훈습을 할 경우와 그렇지 않고 좋지 않은 훈습도 있습니다.

<사진설명>원효의 저술인 『대승기신론소별기』

그런데 원효는 ‘그 성품을 신통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이라고 했고, ‘본각심(本覺心)이 허망한 인연에 의뢰하지 않고 본성이 스스로 신통하게 이해되는 것을 스스로 참된 모습[自眞相]이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인간에게는 스스로 물들지 않은 모습이나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빛이 있어서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본각이란 이 심성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상[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깨달음의 빛[覺照]의 성질을 본각’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원효가 ‘본각(本覺) 중에는 모든 착한 일을 생길 수 있게 하고,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릴 수 있게 하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과 같으며 ‘그 자체에 큰 지혜광명의 뜻이 있다’ ‘본각 중에는 세속을 비치는 지혜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듦을 따르는 생멸하는 마음이 내면적으로 훈습하는 힘에 의지해 두 가지 업을 일으킨다. 그것은 소위 고를 싫어하고 낙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인(因)이다. 이것이 근본이 되어 지극한 결과를 낳게 된다.…묘업장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 자체 내의 훈습의 힘으로 모든 중생에게 두 가지 업을 내게 한다. 두 가지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착한 일에 더욱 힘쓰는 선심이다. 이 두 가지 업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일체 사업의 가행(加行)의 근거가 된다고 한 것이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이름 하여 묘업(妙業)이라 하였다.

이것이 원효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 인간의 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훈습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우리가 중생계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며 윤회하도록 하는 훈습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밖에 법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리”
 
 
 
오랜 악업으로 인한 근본무명이 윤회 원인
인간은 매일 천상-지옥 오가는 윤회의 존재


 

<사진설명>원효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종교인이었으며 동시에 수 많은 책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림은 「화엄연기」 중 원효가 저술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지난 시간에는 인간을 해탈로 이끄는 진여훈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염법훈습(染法薰習)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더러움에 물들어가는 훈습입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는데 만약 그 사람이 내 곁에서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면 내 옷에도 그 냄새가 배이고 집에 돌아가서까지 담배냄새를 가족들에게 풍길 것입니다. 어떤 행위든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어지죠. 그래서 염법훈습을 중생의 유전(流轉)이라고도 합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발 한 번 삐끗 잘못 내디디면 멈추지 않고 굴러 떨어지는 그런 걸 의미합니다.

무명이 있어서 진여를 훈습한다는 것은 근본무명의 훈습을 뜻합니다. 하수구에서 더러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한강에 흘러드는 것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 폐수가 깨끗한 한강물에 섞이면 탁하게 되고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더 이상 구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근본무명은 기독교의 원초적인 죄악과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고약한 짓을 해왔기 때문에 그 속에 지독한 습기로 남아있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 밝지 못한 게 분명 있다는 겁니다. 그런 근본무명이 있어서 훈습한다는 거죠.

깨닫지 못했으니까 지혜롭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니까 연기법을 알지 못해 망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왜곡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일체 유정은 시작도 모르는 그 옛날부터 무명의 기나긴 밤에 들어가 망상의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망상의 큰 꿈이라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꿈을 깰 수 있을까요? 원효는 ‘모든 망상이 무시(無始)로 유전하는 것은 오직 상(相)을 취해 분별하는 병 때문이다. 이제 그 흐름을 돌려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먼저 반드시 모든 상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처방하고 있습니다.

원효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오래 생사의 바다에 빠져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의혹과 삿된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화중생의 요체는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의 바다에는 물결이 일고 사람들은 그 물결 따라 표류하는 걸까요? 원효의 말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승의 법은 오직 일심(一心)이 있을 뿐 일심 이 외에 다시 어떠한 법도 없다. 다만 무명이 자신의 마음을 미혹시켜 모든 물결을 일으켜 육도에 유전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육도의 물결이 일어나도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실로 일심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육도가 전개되는 것이다.(대승기신론소별기)

지혜롭지 못한 망령된 바람이 마음의 바다를 요동치게 합니다. 이 중에 가장 무서운 바람이 욕심, 성냄, 어리석음 삼독의 바람입니다. 육도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人), 천(天) 등 여럿 갈래 나쁜 길(六惡趣)을 말합니다. 흔히 많은 스님들이 육도윤회를 영혼의 윤회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당신은 전생에 개였고,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지만 원효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효는 이를 육도의 물결이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번 화엄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온 것만 태어난 게 아니고 땅 속에 묻히는 것만 죽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찰나찰나 태어나고 죽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잘못한 게 있으면 순간순간 내 마음이 지옥이 되기도 하고, 많이 가지고도 배고파서 온갖 것을 투기하고 남의 것까지 빼앗으려는 사람들, 이게 아귀지 뭡니까? 내 마음이 싸움터가 될 때는 아수라가 따로 없고, 때때로 욕망만 좇다보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좋은 일이 있으면 천상에 있는 것처럼 즐겁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루하루 순간순간 진행되고 있는 육도윤회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엄청 잘난 것 같지만은 엄청 구린 겁니다. 삼일만 굶어도 얼굴이 시뻘개져서 남의 담 넘는 게 사람입니다. 실존적으로 봐야지 관념적으로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이렇게 여러 나쁜 상황을 떠돌아야 할까요? 악순환하며 고통 받아야 할까요? 결론은 무시(無始) 이래로 무명의 습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은 한결같고 실다운 삼보의 허물없는 장소에 같이 있으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여 귀머거리 같고 장님 같으니, 불성이 없는 것인가. 어째서 이와 같은 것인가. 무명이 뒤바뀜으로 망령되게 밖의 경계를 일으키고 나와 나의 것이라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어 스스로가 덮고 가리어 보지도 듣지도 못함이 마치 아귀가 물을 불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중생의 육근(六根)이 일심을 따라 일어난다. 그것은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육진(六塵)을 일으키게 된다. 육정(六情)을 통섭(統攝)하여 일심이라는 본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일심은 무명훈습으로 물든 모습을 나타내며,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생기고, 자아의식으로 인해 주위의 사물들을 내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기하고 질투하며 화내는 등의 죄를 짓고 악순환한다고 이기영 선생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럼 원효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원효와 의상이 공부하러 중국으로 가잖아요. 그런데 깜깜한 밤에 비는 쏟아지고 오갈 데는 없는데 허우적거리며 비를 피하러 컴컴한 굴로 들어갑니다. 자다보니 목이 너무 말라서 더듬거리며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깨어나서 보니 자신들이 잔 곳이 무덤이었고 맛있게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원효는 웩하고 구토가 일어났습니다. 원효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번뜩 이런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같은 물인데 어제 마실 때는 그렇게 맛있었는데 나는 지금 왜 구토를 하고 있는가? 아하, 이게 모두 마음의 작용이구나.’ 원효는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깨치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니까 가지가지 것들이 다 생겨나고 마음이 소멸하니까 집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인 것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법을 구하겠는가?(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원효는 또 사복의 어머니를 장사지내면서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스럽다!”(莫生兮 其死也苦! 莫死兮 其生也苦!)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생사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끝없이 죽고 사는 것, 그것이 윤회이기 때문입니다. 원효의 저서인 『기신론소기회본』에도 깨달음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삼계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상(相)을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 법은 거울 중의 형상과 같아서 실체를 얻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원효가 말하는 이때의 마음은 무명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깨닫지 못한 망령된 마음(不覺心)을 말합니다. 동요하는 마음이며, 분별하는 마음이며,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동요는 자신이 일으킨 것입니다. 이를 원효는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 투사한 것입니다. 투사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내용을 대상에 전이(轉移)하여 그 자신의 정신적 내용이 마치 그 대상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현상인데, 이로 인해 애증의 감정 관계가 일어나고 여러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원효가 해골 물을 보고 구토했던 것도 해골 물은 더럽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선입관을 투사했을 뿐이지 그 물은 어제 저녁에도 오늘 아침에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요하는 마음, 지혜롭지 못한 무명의 힘에 이끌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이를 대상에 투사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속단한 뒤에 잠 못 드는 밤을 불러오는 어리석음을 그쳐야 합니다.

얼마 전 끝난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 전투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파도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배를 묶어 놓고 카메라를 상하로 움직이며 촬영하면, 마치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면 대상이 흔들려 보입니다. 투사를 거두어 드리는 노력, 이것을 불교에서는 지(止)라고 합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830호 [2005년 11월 29일]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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