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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세기 왜 다시 원효인가? - 수행관

장백산-1 2011. 2. 3. 01:32

21세기 왜 다시 원효인가? (김상현 교수)

 

- 수행관

 
 
지금 아니 닦고
어찌 불타는 집서
벗어나길 바라는가
 
 
기사등록일 [2005년 12월 05일 16:00 월요일]

 

 

모든 악업의 장애는 참회로서 제거하는 것
옳고 굳건한 서원 세워 용맹으로 정진해야


 

<사진설명>원효는 "옛날 석가래를 고를 때에는 그 축에 끼일 수 없더니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혼자 그 역할을 다하는구나"라며 태산같은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림은 『화엄연기회권』 중 왕과 신료 및 고승들 앞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설하는 원효의 모습.

불교는 결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니며, 이론만을 추구하는 학문도 아닙니다.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허망을 진실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실천적인 종교입니다. 수행이나 교화, 그 어느 것도 실천에 의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고,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이루고서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불교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실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원효는 뛰어난 학승이면서 동시에 무애의 자유인이었지만, 또한 용맹으로 정진하던 수행자였습니다.

원효는 또 자신의 허물 돌아보며 참회할 줄도 알았습니다. 원효의 『발심수행장』에는 그의 종교적인 체험이 스며 있습니다. 발심은 발보리심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인 보리에 뜻을 일으켜 구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직심(直心), 심심(深心), 그리고 대비심을 발한다면 악한 것을 버리지 아니함이 없고, 선한 것은 닦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하지 아니함이 없기에 이를 무상보리심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발심수행장』에서 발심과 수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까닭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맴도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수행자가 바른 서원을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올바른 원과 뜻이 서지 않은 상태의 노력은 헛된 세월만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수행자가 올바른 뜻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세의 수행자 중에는 바르게 원하는 이는 적고, 거짓으로 구하는 사람은 많다.…곧게 마음을 정하여 이치에 합당하게 하고, 자기를 제도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여 무상의 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일컬어 뜻을 바르게 한다고 한다.

이처럼 수행자가 세운 뜻과 발원은 올바른 것이어야 하고, 근원을 향한 것이어야 하고,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임을 원효는 강조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은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세 가지의 믿음을 일으킨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 모든 공덕을 나타나게 하고 모든 마(魔)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높음이 없는 도에 이른다.(『기신론소』)

이상은 믿음에 대한 원효의 설명입니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치란 도리, 진리 등과도 같은 말이지만 불성, 진여의 법 등이 보다 가까운 뜻입니다. 이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근본을 확신하는 것인데, 근본은 곧 진여의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든 부처님이 귀의하는 바며 온갖 행위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 이치는 닦아서 가히 얻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닦아서 얻은 이치에는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믿는 일,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원효는 말했습니다. 새롭게 발심한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수행에 정진하기란 어렵습니다. 이에 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의 수행에 있어서 일찍이 수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행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닦지 않는다면, 지금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에도 역시 닦지 못할 것임에, 이처럼 오래오래 되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 어려움을 우러러 익힌다면, 익혀 행함이 점점 늘어나 어려움이 바뀌어 쉽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새로 발심한 이가 닦아 나아가야 할 대의라고 한다.(『보살계본지범요기』)

수행이 어렵다고 내일로 미룬다면, 훗날에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노력하면 차차 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서 불부비개로 불을 일으키는 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행자가 부지런히 닦아 쉬지 않는 것은 마치 불을 낼 때 불부비개로 잠시도 쉬지 않고 부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연법(煙法) 이전에는 죄가 강하고 복이 약하여 수행하기 쉽지 않음이 마치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인법(忍法) 이후에는 죄가 약하고 복이 늘어나기에 수행이 어렵지 않음이 마치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다.(『중변분별론소』)

수행 경력이 적은 사람의 수행이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지만, 정진으로 수행의 공덕이 불어나면 그 사람의 수행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효의 수행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에도 그의 체험적 인생관이 배어있습니다.

만약 단지 이루어지는 것만 있고 무너지는 것이 없다면 증익변(增益邊)에 떨어지고, 오직 무너지는 것만 있고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면 손감변(損減邊)에 떨어지게 된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기에 두 극단을 떠날 수 있다.

단지 성공만 있고, 실패가 없는 인생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무너지는 경험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부수어지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실패만 거듭하는 인생이라면,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때로는 성공해야 하고 이루어지는 경험도 해야 합니다. 성공도 실패도 그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원효의 『대승육정참회』는 그 자신의 종교적 고백이며 신서(信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법계에 의지해 노닐려 하는 이는, 행주좌와몸가짐에헛됨이없어야한다. 언제나제불(諸佛)의불가사의한덕생각하고, 언제나실상(實相)생각하여업장을녹여야하리.

법계에 노닐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건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잘못된 업장은 역사의 짐이자 굴레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자기반성과 참회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원효는 “모든 악업의 장애는 참회로써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고, 『금강삼매경』의 “만약 본심을 잃으면 곧 마땅히 참회해야 하는데, 참회의 법은 청량(淸凉)한 것”이라는 구절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회로써 과거의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만 먼저 지은 업이 현재에까지 흘러드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전에 있던 죄는 참회로 미칠 바가 아니며, 그것을 전에 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뿐이니,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참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렁렁전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은 종자의 왕성한 작용을 현재에까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오늘을 무방비상태로 내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이나 죄악의 힘이 오늘의 삶에까지 범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업장(業障)은 어제오늘 지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먼 옛날부터 지어온 수많은 잘못들이 쌓여서 역사의 멍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업(罪業)에도 그 실체나 자성(自性)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반성과 참회의 길이 열리며, 죄업을 소멸할 방법이 있게 됩니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죄업의 공포에 집착하거나 사로잡히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죄업의 실체가 없다는 말을 따라 도무지 죄업이란 없다고 착각하여 뉘우칠 줄 모른다면 더 많은 고통에 얽혀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방일하여 뉘우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업의 실상을 사유하지도 않는 이는, 죄의 자성 없지만 장차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마치 종이호랑이가 환술사(幻術士)를 삼키듯.

모든 업장은 망상을 쫓아서 생겨납니다. 이 때문에 전도된 갖가지 망상에 얽혀서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자기 스스로 얽맵니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정(六情)을 통제 없이 내버려두면 고통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원효는 육정을 통어(統御)하여 참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는 쟁관법(錚觀法)으로 엄장(嚴莊)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쟁관법은 징 같은 것을 치면서 염불하는 수행법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금광명경』에는 금고(金鼓)를 치면서 참회하는 내용이 있어서 주목됩니다. 이 경의 참회품에 의하면, 금고를 치면서 참회게송을 소리 내어 읊듯이 쟁관법도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신심-종교 체험으로 현실적인 수행론 제시
 
 
 
자비 실천 않고 선정만 닦는다면 보살도 아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상세히 관찰하는 게 진정한 禪


 

<사진설명>원효의 가장 절친한 도반 의상. 무덤에서의 하룻밤후 원효는 신라로 발길을 돌렸고 의상은 당나라를 향해 홀로 떠났다. 그림은 「화엄연기회권」 중 원효와 의상이 헤어지는 장면.

원효의 수행론에서 중요한 것은 지관이행(止觀二行)입니다. 지(止)란 밖으로 향하는 모든 상(相)을 멈추어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카메라를 흔들지 말고 고정시키란 말입니다. 자꾸 참선해라 수행하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고 흔들면 상이 다 깨지니까 흔들리지 않게 마음의 바다를 가만히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멈추기만 하면 되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자세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이때 그치라는 것은 대상에 투사하는 것을 그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치면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인다고 원효는 말합니다. 아무리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인들은 정말로 연기를 알고 무상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것에 ‘그러려니’ 할 수 있으니까요.

지(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고 여러 선을 구하지 않고 자비를 멀리 떠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거죠. 관이란 대상을 관조하여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지와 관의 두 수행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실어 나르는 능력이 없고, 만약 한 날개가 없다면 어찌 허공을 나는 힘이 있으랴. 그러므로 지와 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원효에 의하면, 지를 수행함으로써 범부의 집착과 이승(二乘)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다스릴 수 있고, 관을 닦아서 널리 중생을 살펴 대비심을 일으키기에 이승의 옹졸한 마음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범부의 나태한 뜻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은 가라앉아도 안 되고 지나치게 흥분해서도 안 됩니다. 원효에 의하면, 가라앉거나 들뜬 마음을 멀리 떠나 자연스럽게 머무르기 때문에 등지(等持)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는 진정한 정(定)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무름에도 두 가지가 있다. 만약 한 경계에 머무르면서도 혼미하고 사리에 어두워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혼침(昏沈)이며, 만약 한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은 채 자세하고 바르게 생각해 살핀다면 이를 곧 정(定)이라고 하는데, 생각하고 살피는 것으로서 혼침과 구별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거나 옮겨 다니는 것으로서 선정과 산란함의 다른 모습을 구별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재빠른 판단은 비록 빨리 바뀌어 가지만 정(定)이 있기 때문이고, 느리고 둔한 생각은 비록 경계에 오래 머물러도 이는 산란함이기 때문이다.(『금강삼매경론』)

원효는 『중변분별론소』에서 만약 마음이 가라앉는 번뇌에 물들면 마음을 채찍질하여 들리게 해야 하고, 만약 마음이 들뜨는 번뇌에 오염되면 마음을 단속하여 가라앉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원효의 선(禪) 이해는 지와 관을 포괄하는 것으로 세간의 선(禪)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핵심을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파악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의 수행 구조는 관(觀)과 행(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관은 경계와 지혜에 통하는 것으로 공간적으로 논한 것이며 행은 시간적으로 논한 것입니다. 또 관이 인식의 문제라면 행은 실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인식의 주체, 카메라를 가만히 두느냐? 세숫대야 물을 흔들어보느냐? 노란 안경을 쓰고 보느냐? 다 달라지잖아요. 또 대상도 마찬가지로 아침에 비스듬히 비추느냐, 아니면 중천에서 비추느냐,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비추느냐에 따라 보여지는 대상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의 실천행은 수행과 교화의 두 방면에 관련됩니다. 곧 상구보리하는 향상문에도, 그리고 하화중생의 향하문에도 실천행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효의 실천행은 자신을 위한 자리행(自利行)과 남을 위한 이타행을 함께 구현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원효가 생각하는 보살도란 선정과 지혜를 닦되 동시에 대비(大悲)도 실천함으로서 자신은 물론 남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금강삼매경』 중의 “어여혜정 이비구리(於如慧定 以悲俱利)”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만일 대비를 버리고 바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면 이승(二乘)의 지위에 떨어져 보살도를 장애하고, 만일 자비만 일으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지 않는다면, 범부의 병에 떨어질 것이니 그것은 보살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

선정과 지혜는 자리를 위한 것이고 대비는 이타를 위한 것이지만, 만약 대비를 버리고 선정과 지혜만을 닦는다면 보살도가 아닌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원효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행자가 선행을 즐기지 않거나 대비를 멀리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지만을 닦지 않고 반드시 관도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행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된다. 이 때문에 관을 닦아야 한다.(『대승기신론소기회본』)

그러면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요? 원효는 내형(內行)과 외행(外行)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고요히 비춰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세간을 교화하는 행이다.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금강삼매경론』)

이처럼 원효는 외행을 세간을 교화하는 행으로 해석했는데, 이 또한 대비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이타행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원효의 수행관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고 이 부분에 깊은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애매모호하던 말들이 가슴에서 되살아날 때가 있을 겁니다.

제가 공부해 본 불교는 결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존적이고 사실적인 종교입니다. 불교는 마음, 마음하니까 얼른 보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 마음을 분석적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해가는 게 불교입니다. 불교의 한 분파인 유식학은 현대에 와서 서양 사람들이 심층적으로 분석해 온 심리학과 거의 합일되고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불교의 마음은 과학적인 얘기지 그냥 관념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는 구체적으로 수행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겁니다. 그냥 학문적이나 철학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원효는 그의 『발심수행장』에서 발심과 수행의 중요성을 서술했고, 『대승육정참회』에서는 모든 악업의 장애를 참회로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소』에서는 신성취(信成就)에 이르는 수행 과정에 중점을 두고서 지관의 수행을 논했고,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일미관행을 통해서 본각(本覺)의 근원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원효의 수행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고, 깊은 신심과 종교적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오회(五悔) 중에서도 예배제불(禮拜諸佛)을 가장 중시했던 경우나, 자신이 창안한 쟁관법으로 엄장의 수행을 지도했던 점, 그리고 세간의 선을 비판하면서 부침 없이 자세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하는 것이 진정한 선(禪)이라고 주장했던 것 등이 그렇습니다.

원효 실천행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리와 이타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대비(大悲)를 실천하지 않고 선정만을 닦는다면 보살도가 아닌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에, 지의 수행만이 아니라 관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효의 수행관은 자신의 교화활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훗날 원효의 위계가 초지(初地)에 해당된다는 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원효 인식의 배경에도 그의 실천적인 수행과 교화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832호 [2005년 12월 12일]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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