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세상은 광명으로 늘 빛나고 있다

장백산-1 2011. 3. 15. 12:14

세상은 광명으로 늘 빛나고 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光明雲臺 周徧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광명의 구름대 법계에 주변하여
시방의 한량없는 불.법.승께 공양합니다.



_풀 이_
지혜의 광명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하여
시방삼세에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 올립니다.

_해 설_
오분향 다음으로 이어지는 위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광명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어느 곳에서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광명운대에서 광명은 바로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진리에 입각하여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깨달은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로 진리의 구현인 것입니다.

진리라고 말하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광명이라는 좀더 구체적인 말로 대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광명은 진리를 현상적으로 나타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광명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습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광명을 놓는 일(방광/放光)부터 시작합니다.
또 사리탑이나 스님들이 방광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법당 안에 인등을 켜는 일도
광명과 관계되는 일이며,
초파일에 등을 다는 일도 광명인 것입니다.
광명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만얀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잘 분별할 수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가도 부딪치고 넘어져서
온통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광명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앞에서 오분향은 불교인의 인격완성에서 오는
다섯 가지 덕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명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光’은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광명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상처로 얼룩졌던 것은
광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광명은 항상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금강경』에 부처님께서 광명에 대한
말씀을 설해 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주어법 이행보시心住菸法 而行布施
여인입암 즉무소견如人入暗 卽無所見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若普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입니다.
그 뜻은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햇빛 아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해 보면,
마음이 자기만의 소견과 편견과 고집과
굳어진 사상에 의해 생활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 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자기만의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사물을 실상대로
진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도 밝고 햇빛도 환히 비춰서
아무 탈이 없이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소견이나 고집, 편견들은
결코 지혜가 아니며,
슬기도 아니며, 빛도 아닙니다.
사물이나 감정, 사건 등을
실상대로 관찰할 줄 아는
밝은 눈이 열릴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환한 광명의 삶이 될 것입니다.
밝은 눈이란 바로 깨달음의 슬기요, 지혜의 빛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도처에서 깨달음의
안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이 일어나는
일체의 모습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광명의 눈을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광명의 눈이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상처받지 않고 목적한 곳에서 다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말씀은
지혜의 광명에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의식 가운데 촛불을 켜고
등을 켜는 의미는 모두의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명입니다.

앞에서 오분법신향으로 무장한 사람은
광명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엄청난 밝기로 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따라 밝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광명을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이라고 하여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뜨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밝은 완벽한 광명의 화신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빛을 비춰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나마도 지금까지 별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앞길만이라도
비출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마저 없다면 이러 저리 부딪쳐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빛을 잃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법신향(戒/定/慧/解脫/解脫知見香)이
각자의 마음 속에 원만히 성숙되어
광명을 밝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광명을 우리의 육신에서 찾아본다면
웃음이 그에 해당할 것입니다.
참으로 밝게 웃는 모습은 광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밝은 인상을 말합니다.
밝은 인상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옆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듭니다.
반대로 무겁고 침울한 표정은 옆사람까지
칙칙한 기분을 안겨줍니다.
그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위배되는 일입니다.
진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웃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출근할 때 웃고, 퇴근할 때 한번 웃어 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은 없는 것입니다.
웃음이라고 해서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 히죽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온몸 전체에 향기로운 웃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광명운대에서 운대는 구름 덩어리를 말합니다.

주변법계에는 법의 세계에 두루두루 펼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지구 전체를 일컬어 세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온 우주를 통틀어서 법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세계는
물론 텅 빈 공간까지를 전부 합하여
법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것이므로
온 우주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는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해서
법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스님이 개신교 목사와 함께
우연히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자신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여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그럼 변소에도
하나님이 있겠다고 말했더니 목사는 발끈하여
화를 냈다고 합니다. 어떻게 신성한 하나님이
변소간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법계는 진리의 구름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없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광명은 처음에는 자기 혼자만을
비출 수 있는 정도의 빛이지만,
기도와 수행을 통해 더 많은 빛으로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은 다른 데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광명 덩어리를 발산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업/業과 어리석음에 의해
가리워진 어두운 구름을 걷어 버리고
부처님과 똑같은 덕과 지혜의 빛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갖추고 있는 그 광명의 수행을 통해
확연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살아가신 분이 십니다.

다음으로 공양시방이라고 할 때
공양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공양은 흔희 꽃.음식.초.향.음악.춤.의복 등
부처님께 이바지하고 도와주는 모든
사물과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 올리는 모든 것은
공양이라 하여 엄밀히 말해서
부처님께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분에 관계없이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양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도 공양이란 말을 쉽게 쓰는 것입니다.
절에서 밥 먹는 일을 ‘공양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에는 ‘당신도 부처님입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 쓰는 공양이란 말을 우리들에게도
쉽게 쓰는 것은 바로 우리도 부처님처럼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양 올리는 자가
곧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같은 인격으로 대한다는 뜻이
공양이란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처의 씨앗이 없다면
공양이란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법화경』에는 상불경常不俓이란 참으로
훌륭한 보살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불경 보살은 평소에 수행을 할 때
남들처럼 경을 읽거나 기도,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예배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상불경 보살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예배하는 일만으로도
너무 바빠 다른 수행은 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예배하는 일로
평생 수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공양이란 말 속에는 상불경보살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 가정에서 ‘공양 하십시오’라는
말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 말속에는 훌륭한 만행 만덕과
무한한 능력과 광명을 지니고 있는
부처님의 씨앗이 당신에게도 심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처럼 존경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양이란 말은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제일성第一聲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훌륭한 말입니다.
공양이란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포교가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법공양의 위대성을
“설사 삼천대천세계 만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희사한다고 해도 짧은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만이라도 書寫受持, 위인연설爲人演說을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법공양의 훌륭함을 나타낸 말로,
결국 자신 속에 무한한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공양 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가 가지는 존칭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공양이란 말을 계속 씀으로써
은연중에 상대방의 가슴 속에 파동(波動)쳐
마침내 부처님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양이란 말을 일상생활 속에 사용함으로 해서
우리는 무한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으로는 미운 생각이 들더라도
상대방을 향해 ‘공양 하십시오’라고 하면
그 뜻은 부처님을 공경하는 진정한 표현이 됩니다.

공양이라고 해서 단지 먹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공양, 법에 대한 공양,
가르침에 대한 공양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의 광명으로 공양을 올리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불문』의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리의 공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양이란 말은 참으로 고맙고
빛나는 값진 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공양이란 말과 함께 있는 시방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동남.동북.서남.서북의 사유/四維에 상.하를 합한 것입니다.
시방은 불교의 공간 개념을 나타낸 말로써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어느 곳에나 항상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무량불법승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라는 말입니다.
불.법.승은 부처님과 진리와 불교 단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온 인류, 모든 만물에게
진리의 빛이 펼쳐지도록 골고루 펼쳐져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무량불법승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법.승 삼보 중에서 승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출가한 수행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승가僧伽라고 하는 해야하는데,
그것은 불교 단체.불교 집단.불교 대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출가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는 물론
재가 남녀인 청신사淸信士.청신녀淸信女를
모두 합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흔희 사부대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 부처님의 아들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향(戒)에서부터 무량불법승까지의 내용을 살펴볼 때,
이 속에는 불교의 목적하는 바가
모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기본 밑천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수행을 삼아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