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대에게는 앎의 능력이 있다. 그런 능력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왜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까? 잘못된 점이란, 그대 안에 분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대는 통일성(integrity)을 잃어버렸다. 사회가 그대를 조각난 집처럼 만들었다. 사회는 그대에게 “너는 마땅히 이러 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 사회는 그대에게 이런 이상(理想)을 주입시켰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항상 그 이상향에 가 있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에 매달린 나머지 실제의 그대 자신을 잊었다. 그대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자신의 실체를 망각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는지에 대한 생각이 그치지 않는다. 그대의 언어는 “~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와 당위의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실체는 오직 ‘존재(is)'로 이루어진다. 실체는 당위와 의무를 모른다. 장미는 연꽃이 되려고 하지 않으며, 연꽃은 장미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경증에 걸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다.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가 없다. 장미는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가므로 건강하다. 인간을 제외한 존재계 전체가 이런 삶을 살아간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理想)과 당위(當爲)에 매달린다. 이 때문에 그대는 조각조각 분열된다. 이것은 그대의 존재(is)에 어긋나는 일이다. 당위(should)와 존재(is)는 적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일 뿐,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일단 이 진리가 가슴 깊이 파고들면 모든 이상형이 사라진다. 자동적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어떤 이상도 존재하지 않을 때 실체가 드러난다. 이때 그대의 눈은 ‘지금 여기’를 향한다. 그대는 자신의 참모습 그대로 현존한다. 모든 분열이 사라지고 그대는 통합된 ‘하나’로 존재한다. 온갖 세뇌작용과 교육이 걸림돌이다. 순간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슬프다고 하자. 이 순간에 그대는 슬프다. 그러나 세뇌된 그대의 마음은 “슬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쁜 일이다. 너는 행복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분열이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한다. 그대는 슬프다. 그것이 이 순간의 진실이다. 그런데 세뇌된 마음은 “이래서는 안 된다. 너는 행복해 보여야 된다. 웃어라!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하고 말한다. 너무 우울해 보이면 애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또는 사업이 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웃음을 지어 보여야 한다. 행복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대가 의사라면 환자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울해 보이는 의사를 좋아하겠는가? 환자는 행복하고 건강해 보이는 의사, 즐거워 보이는 의사를 원한다. 그런데 그대는 아주 슬퍼 보인다. 웃어라! 웃음이 나오지 않으면 억지 미소라도 지어 보여라. 연기를 해서라도 미소를 보여야 한다. 그대는 항상 자신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슬플 때에는 그 슬픔을 받아들여라. 그 슬픔이 그대이다. “나는 슬프다.”라고 말하지 말라. 슬픔과 그대가 별개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 “나는 슬픔이다. 이 순간에 나는 슬픔이다.”라고 말하라. 진실하고 전체적으로 그 슬픔을 살아라. 그러면 자신의 존재에 기적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그대는 놀랄 것이다. 행복에 대한 어떤 관념도 없이 그 슬픔을 살 수 있을 때 그대는 즉각 행복해진다. 분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분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슬픔이다.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노력도 필요없고,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이것으로 존재한다.” 여기에 휴식(relaxation)이 있다. 그 휴식 안에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다. 고통은 분열을 뜻하고 지복(bliss)은 분열이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일 것이다. 슬플 때 그 슬픔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대에게는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다. 한번 시도해 보라. “행복해지려면 그대의 슬픔을 받아들여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동기가 깔려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그대는 감시의 눈초리로 자신을 관찰할 것이다. ‘나는 슬픔이다.’하고 말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즐거움이 찾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됨(oneness)’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아무런 동기나 목적없이 이 슬픔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는 부산물인 것이다. 여기엔 어떤 목적도 없다. 이 순간에는 이것이 그대의 존재 방식이다. 이 순간에는 이것이 그대의 진실이다. 다음 순간에는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는 그 분노 또한 받아들여라. 또 그 다음 순간에 다른 것이 찾아오면 그것 역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대는 진아지(眞我知)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마음 속의 분열을 버려라. 그 분열이 문제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고 있다. 그대 자신을 적대시하게 만드는 모든 이상(理想)을 버려라. 그대는 그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것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돌연 내면의 조화가 느껴질 것이다. 그대의 내면에서 이상적인 자아와 진짜 자아가 싸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 둘이 만나 하나로 용해된다. 그것이 심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분노가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분노는 나쁜 것이라는 관념이 심리적인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다. ‘사실(fact)’은 항상 자유를 준다. 그러면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하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진리가 되는 즉시 자유가 함께 한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상을 버려라. 며칠 동안만이라도 자연인(自然人)으로 살아보라. 나무와 동물, 새들처럼 그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가슴 속에서 깊은 침묵이 솟아날 것이다.
아무 해석도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일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이 때에는 슬픔도 아름답다. 슬픔이 깊이를 갖게 된다. 분노 또한 아름다워진다. 분노에 생명력이 깃든다. 이 때에는 섹스 또한 아름다워진다. 섹스에 창조성이 깃든다. 해석이 없을 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름다울 때 그대는 릴랙스(relax)된다. 이 깊은 휴식을 통해 그대는 자신의 근원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이것이 진아지(眞我知)를 가져다 준다.
자신의 근원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 이것이 “너 자신의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담긴 뜻이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변형의 문제이다. 내가 말하는 ‘변형’이란 무슨 뜻인가? 나는 그대에게 “~처럼 되어야 한다.”는 어떤 이상(理想)도 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할 일은 현재의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고 릴랙스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라. 그 음악은 진아지(眞我知)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때 그대의 삶은 저절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대는 모든 자물쇠를 여는 만능열쇠를 얻은 것이다.
출처 :만다라불교미술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 만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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