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본래마음 <> 인간마음

장백산-1 2011. 5. 8. 20:33

절에서 몇몇분들과
한달에 두 번
법구경 공부를 하기로 하여,
이 참에 법구경 강의를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올렸던 강의를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

제1장 쌍서품(雙敍品)

마음


[경전]

1.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2.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듯이



[강설]

경전에 보면 ‘마음’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 나오는 마음이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심(眞心)망심(妄心)으로 나뉠 수 있다. 진심이란 본래심(本來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본래마음,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망심이란 번뇌심, 생멸심(生滅心), 산심(散心)이라 이해되며 우리들의 산란하고 번뇌에 휩싸인 분별심이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음이란 진심이 아닌 망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망심, 즉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며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망심이란 유위법(有爲法)의 근본이 되는 마음으로 유위란 위작(爲作) 혹은 조작(造作) 즉, ‘만들어진 법’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세계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유위법 즉 망심이 근본이 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대로 진심이란 무위법(無爲法)으로 만들어지거나 생멸하는 법칙이 아닌 만들어지기 이전 세계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진심이란 무엇 하나 붙을 것이 없고 만들어 질 것이 없는 일체가 딱 끊어진 공(空)의 본래자리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한 ‘마음’이란 망심 즉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 망심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이요,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시킨다는 말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을 시키며, 마음이 주인이 되어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든 것도 인간의 마음이며, 나에게 주어진 내 세상을 만들어 낸 것 또한 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었다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일으킨 마음이 오늘날의 현실을 만들어 냈고, 지금 이 순간 일으키는 마음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일으킨 모든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세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세계, 법계는 그것을 놓치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놓치고 만다. 아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스스로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끊임없이 마음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이치를 통째로 집어삼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리로만 대충 알 뿐, 온 존재로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주의 깊지 못하게 마음을 함부로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주어진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전혀 살피지 못한 채 그냥 그냥 주어진 생을 소모하고 있다. 마음을 놓치면 세상을 놓치는 것이다. 마음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이 진실을 주의 깊게 사유해 보라.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전체적으로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보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살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을 보라.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모든 일을 시키고, 이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은 바로 마음이다.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끊임없이 운명을 변화시켜 갈 뿐.

마음을 간절히 일으킨다면 세상은 거기에 반응을 할 것이다. 그 마음이 더욱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간절한 소망으로 사무친다면 우주는 조금 더 민감하고도 강하게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절이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일률적이지는 않다. A라는 마음이 반드시 a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b나 c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결과는 빠르고 어떤 결과는 늦을 수도 있다. 또한 간절히 마음을 내더라도 내가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업(業)과 인과(因果)와 전생의 사건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음 낸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빨리 혹은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에너지는 공평무사하게 응당한 반응을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응이 너무 복잡하고 무량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인과의 법칙, 다르마(진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그 반응의 법칙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따른다. 즉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경전에서는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선악을 대비시키고 있다.

삿되고 악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이 말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악업(三惡業)을 짓게 될 경우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며, 신구의로 세 가지 선업을 짓게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법구비유경』에서는 위의 게송이 나온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푸라세나지트왕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손 씻을 물을 나르고 음식을 만들어 공양 올리는 것을 보고 한 상인은 ‘부처님은 제왕과 같고 제자들은 충신과 같구나. 저 왕은 참으로 현명하다. 부처님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뜻을 낮출 줄 아는구나.’라는 찬탄의 마음을 낸 공덕으로 훗날 왕위에 오르지만, 또 한 상인은 ‘저 임금은 어리석구나. 자기가 국왕인데 무엇을 더 구하려고 부처님께 공양하는가. 부처는 마치 소와 같고 제자들은 수레와 같구나. 저 부처에게 무슨 도가 있다고 저렇게 뜻을 굽혀 받드는가?’라며 나쁜 생각을 일으킨 과보로 죽어 태산지옥에서 불수레에 깔리는 갚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첫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좋은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왕이 되었으며, 두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수레에 깔려 죽을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과의 방편법에서 머물지 않고 본질적인 근본법을 아울러 설하고 있다. 근기가 낮은 이들에게는 선악이라는 인과의 법칙이 더 쉽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선악의 마음을 대비시켜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선다. 본래 세상에 선악이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마음도 근본적이지 못하지만, 역시 선한 마음도 본질적이지 않다. 옛 말에 ‘선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불법문중에서는 깨달음을 문제 삼을 지언정 착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선악이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마음은 삿된 분별심일 뿐이다. 악한 마음만 삿된 마음이 아니라 선한 마음도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선을 선택, 분별, 차별하는 마음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이미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이며, 악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일 뿐이다. 선한 마음을 내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냈다는 상이 생기고,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미워하게 되며,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깊어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증오의 마음도 함께 커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배신을 당했을 때 증오도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선한 마음도 차별심이며, 악한 마음도 차별심이라고 보았을 때, 불교에서는 선악의 차별적인 모든 마음을 다 여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마음을 일으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번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에 집착하게 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와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내는 것 보다 그 마음 자체를 비우는 것이 더욱 수승하다.


한동안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책 ‘연금술사’나 ‘시크릿’ 등은 바로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 방편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간절히 원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불교의 근본 목적이 아니다.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질적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의 트렌드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간절히 원하면 명예나 지위도 얻을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며, 꿈과 욕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가. 그러나 잔뜩 욕망에 넘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비워라’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도 궁극에 가서는 놓아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김빠지는 말인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과 놓음의 가르침보다 오히려 시크릿이나 연금술사 같은 류의 책들이 세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다. 그 마음 조차도 결국에는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경구를 다시 살펴보면,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은, 무언가 마음을 일으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음을 비우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이다. 즉 삿된 마음은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心]을 의미하고,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비움’ ‘마음 놓음’이란 무심(無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가라는 말인가. 선한 마음도 악한 마음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순수한 마음이란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는데 집착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일으켰더라도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도 일으키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되 집착 없이,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 할 것이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