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5
부처는 정치에 대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아주 정확하였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만 불교가 비폭력과 평화를 보편적 메시지로 옹호하고 전파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종류의 생명의 파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은 증오, 잔학성,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변명하려 돈 찍듯 찍어내어 두루 유통시킨 거짓된 용어일 뿐이다. 누가 정당하고 부당한 것을 결정한단 말인가? 힘세고 승리한 쪽이 '정당'하고 약하고 패한 쪽이 '부당'할 따름이다. 우리의 전쟁은 항상 '정당'하고 너희의 전쟁은 언제나 '부당'하다. 불교는 이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는 비폭력과 평화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중재하여 전쟁을 막기도 하였다. 로히니Rohini강의 용수用水 문제로 공격태세를 취했던, 사꺄(釋迦)족과 꼴리야Koliya족 간의 분쟁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아자따삿뚜Ajatasattu(阿 世)왕이 밧지Vajjis족의 왕국을 침공하는 것을 말로써 막았었다.
부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부당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민중들은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고문 받고, 학대당하였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잔인한 형벌로 괴롭혔다. 부처는 이 비인간적인 것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처가 훌륭한 정부라는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음을 《법구경》의 주석서(Dhammapadatthakatha)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견해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과 대비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부처는 정부의 우두머리, 즉 왕과 각료들 그리고 관리들이 부패하고 공정치 않으면 온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불행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한 나라가 행복하려면 올바른 정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형태의 올바른 정부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는 부처가 《자따까Jataka》(本生經)의 "왕의 열 가지 의무"(dasa-raja-dhamma;十王法)라는 가르침에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옛날의 '왕王'(Raja)이란 용어는 오늘날 '정부'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의 열 가지 의무"는 오늘날에 국가의 우두머리, 즉 각료들과 정치 지도자들,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무원 등등같이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왕의 열 가지 의무"의 첫째는 후하게 아량을 베푸는 자선(dana;布施)이다. 통치자는 부와 재산에 열망을 품거나 집착하여서는 않되며, 민중의 복지를 위해 분배하여야 한다.
둘째: 지고한 도덕적 성품(sila;持戒). 왕은 생명을 파괴한다던가, 속이거나, 훔치거나, 남을 착취하거나, 간통을 범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취하는 음료를 마신다던가 하는 짓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왕이 최소한 평신도의 "다섯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하는 것이다(pariccaga;永捨). 왕은 백성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개인적 안락과 명예와 명성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넷째: 정직과 성실(ajjava;正直).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나 편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의도가 솔직해야하며 대중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친절과 온화함(maddava;柔和). 왕은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여섯째: 생활습관에 있어서 엄격하기(tapa;苦行). 소박한 생활을 하여야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왕은 자기 억제를 해야 한다.
일곱째: 증오, 악의, 적의로부터 벗어나기(akkodha;無忿). 왕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여덟째: 비폭력(avihimsa;不害). 이것은 왕이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 그리고 폭력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막아서 평화를 증진하기에 노력해야함을 의미한다.
아홉째: 인내, 견딤, 포용력, 이해심(khanti;忍慾). 왕은 역경과 어려움 그리고 모욕을, 성품을 상하지 말고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열째:〔백성의 뜻에〕반하지 않는 것, 가로막지 않는 것(avirodha;不相違). 그것은 말하자면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되며, 백성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 어떤 행위라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왕은 백성과 화합하여서 다스려야 한다.
어떤 나라가 그런 성품을 타고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 나라가 행복해질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토대로 왕국을 세운 인도의 아쇼카Asoka같은 왕들이 있었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6
세계는 오늘날 지속적인 공포와 의혹 그리고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과학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죽음의 도구를 휘둘러대면서 엄청난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게 협박을 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파괴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세계는 인간성을 깡그리 파괴시킨 가운데, 서로 박살내기에 불과한 이 미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지점에 서있다.
인류는 자기네가 지어낸 처지에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으려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부처가 전해준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즉,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이해, 진실과 지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경,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메시지이다.
부처는 말했다. '증오에 의해서는 증오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절하여서 가라앉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
'친절하여서 노여움을 이겨야 한다. 착하여서 못됨을, 자비로써 이기심을, 그리고 진실 되어서 거짓을 이겨야 한다.'
이웃을 정복하고 짓밟으려 갈망하는 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말했듯이, '승리자는 미움을 길러내고, 패배자는 비참속에 빠진다. 승리와 패배, 모두를 포기하는 이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정복은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이 보다도, 오직 한 사람 자기를 정복한 이가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다.'
당신은 이들이 모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증오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서로 죽이는 것이 현실적인가? 정글 속에 야수같이 그치지 않는 두려움과 의심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편안한 것인가? 증오가 증오에 의해서 진정되는 일이 있었던가? 해악으로 해악을 이긴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개인적인 경우일지라도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진정되고, 착하여서 못됨을 이긴 예가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우에는 사실이고 현실인지 몰라도 국가적인 일, 국제적인 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들은 최면술에 결려있다. '국가적'이니 '국제화'니 '국가'니하는 정치적, 선전적 용어에 심리적으로 혼란되고, 눈멀었으며, 속고 있다. 한 나라가 개인들의 거대한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나라나 국가가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라나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나라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한 나라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서도 증오를 친절로 대하려면 도덕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국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욱 그러해야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다. 분명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노력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이 위험한 시도라고 말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것이 핵전쟁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런 위대한 통치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며, 오늘날에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안팎으로 다스리는 데에 이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의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용기와 신념과 선견을 가졌었다. 그가 바로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라 불려지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기원전 3세기)이다.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챤드라굽따Chandragupta)와 아버지(빈두사라Bindusara)를 본받아 인도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깔링가Kalinga에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깔링가를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불제자가 되었을 때, 부처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바위에 새겨둔 그의 유명한 칙령중의 하나(현재 '비문칙령 13장'(Rock Edict XIII)이라고 부른다)를 오늘날에도 읽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황제는 깔링가의 정복을 언급하며 자기의 '뉘우침'을 공표하고, 그 학살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다시는 절대로 어떤 정복을 위해서도 칼을 뽑지 않겠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폭력을 버리고, 자기를 제어하며, 청정함을 닦고, 온화하기를' 바랐다. 이는 물론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즉, 아쇼카)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정복이라고 여겨진다. 즉, 경건을 통해 정복한 것(dhamma-vijaya;法勝)이다. 그는 전쟁을 자기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손들이 새로운 정복을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건을 통해 정복하는 그런 정복만을 생각해야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익한 것이다'라고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류역사상 권력의 최 전성기에 있는 승리한 정복자가 여전히 영토의 정복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전쟁과 폭력을 포기하고 평화와 비폭력으로 돌아선 유일한 예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교훈이 있다. 한 제국의 통치자가 전쟁과 폭력을 공식적으로 등지고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어떤 이웃의 왕이 아쇼카의 경건함을 군사 공격을 하는데 유리점으로 삼았다던가, 그의 일생 동안 제국 안에서 어떤 반란이나 모반 사건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 어느 것도 없다. 오히려 온 나라가 평화로웠고, 제국 밖의 다른 나라들도 그의 온화한 지도력을 받아들인 것 같다.
힘의 균형이나 핵 억제력의 협박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기의 힘은 공포를 낳을 수 있을 뿐이고 평화를 낳지 못한다. 공포를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 계속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공포를 통해서는 오직 증오와 악의와 적개심만이 올 수 밖에 없다. 그 당시만은 억누를 수 있지만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사나와지게 된다. 진실되고 진정한 평화는 자비롭고(metta;慈), 우호적이며, 공포와 위험에서 벗어난 분위기에서만이 득세할 뿐이다.
불교는 파괴적인 권력 투쟁이 포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복과 패배를 떠나 고요함과 평화가 득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이 박해받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으로 백만 인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자신을 정복한 이를 더 존경하는 사회, 친절하여서 증오가 정복되며, 유익한 것으로 해로운 것을 정복하는 사회, 적의, 시기심, 악의, 그리고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위의 추진력인 사회, 미물까지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공정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가운데 평화롭고 조화를 이룬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목표인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회가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끝.
"what the Buddha taught" (Gordon Fraser Gallery, 1959)
지은이: Walpola Rahula / 옮긴이: 이 승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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