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현대 심리학으로 풀어서 본 唯識 30송---서광스님---

장백산-1 2011. 7. 24. 16:50

 

현대 심리학으로 풀어 본 유식30송 - 서광스님-

 

유식 30송은 마음의 분석을 통해서 윤회하는 개인의 경험을 설명하고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하려는 시도다.

 

송1

 

마음은  마음의 주체와 대상, 즉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경험을 의미한다. 경험은 또한 다른 말로 을 뜻한다.

경험은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험하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상(名相)을 붙이지만

그 근본 작용은

항상 경험하고 인식하고 알아가는 주체(主體)

경험되고 인식되고 알려지는 대상(對相)의 두 종류가 있을 뿐읻.

 

마음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은 경험이라고 했다.

경험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경험의 시작, 앎의 시작의 근원이 바로 앎의 주체앎의 객체로서의 이원화(二元化)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사윤회하는 삶을 사는 근본 원인이 세상사 우리 자신을 알아가고 경험해 가는

우리의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항상 뭔가를 이해할 때, '나'와 '너', 또는 '나'와 '나 아닌 것들'로

구분해서(시비 분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 를 중심으로 '내가' 주체가 되고 '

'나' 아닌 것들은 항상 '나'의 '상대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주체적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상대적인 존재' 즉,

'주인공이 아닌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한 마음의 분리작용(分離作用),  '나'와  '너' 라고 하는 이원화(二元化),

주-객(主-客)의 대립(對立)은 모든 인간문제를 만들고 갈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原因)이 된다.

 

우리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결국 나를 알아주지 않는 데서 비롯되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집착)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1송은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 할 때만이 그 존재가 가능하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분리가 불가능한 쌍(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송2

 

주객의 분리로 출현하는 마음은

저장식(축적하는 작용), 생각식(생각하는 작용), 의식과 오감각식(감지하고 표상하는 작용)의

세 차원으로 작용한다.

다르게 무르익은 저장식에는 과거의 모든 경험들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

 

  * 저장식(貯藏識) : 아뢰야識

  * 생각識 : 마나. 생각하고 계산하는 . 정신 또는 심리작용

  * 意識 : 제六識. 인지대상을 분별하는 작용의 하나의 識

  * 오감각識 : 안(眼), 이(耳), 비(鼻) , 설(舌), 신(身)의 작용識

 

송3

저장식은 모든 경험의 종자와  신체, 그리고 자연계를 인식대상으로 삼고 발생하는데 그 認識作用이 너무나

미세하고 무한해서 저장식이 대상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능력, 위치한 자리, 분별능력을 감지하기가 어렵다.

저장식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중성(中性)이다.

* 종자 : 모양, 명칭, 분별의 습기, 즉 모양을 취하고 이름을 붙이고 분별하는 습관적 에너지

 

송4

 

저장식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번뇌와 어리석음에 오염되어 있지 않고 선불선이 아닌 중성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접촉, 주의, 느낌, 개념화, 의지 역시 번뇌와 어리석음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선,불선이 아닌 중성이다.

저장식은 빠르게 흐르는 물처럼 단절되지도 상주하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생멸유전하고 아라한의 지위에 가서야 그 생멸유전을 멈춘다.

* 중성화 : 무기(無記, non-recording). 저장식이 행위(업)에 의해 발생되지만 저장식 자체는

다음의 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

 

저장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전생부터 쌓아온 모든 경험들의 종자들이 그 속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르익은 식(式)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과거에 행한 자체는 선,불선이지만

그것이 종자로 저장될 때에는 선도 불선도 아닌 중성의 상태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선,불선(善-不善))은 상대적 가치이므로 인연이 함께 만나질 때만 드러난다.

인(因)에 해당하는 종자 자체는 가치 이전의 상태다. 

다만 연(緣)이라는 조건과 환경을 만나서 상호작용한 결과로서 선,불선, 또는 중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3송에서는 저장식의 발생과 그 작용의 무제한성을 설명한다.

저장식과거경험의 종자, 신체 감각기관과 그 감각대상, 자연계를 인식대상으로 삼고 발생한다.

과거경험의 종자는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세월부터 일체의 인식대상을 향해서 이미지를 표상하고

이름을 붙여서 각각을 분별하고 차별하는 습관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무수한 세월 동안 저장식에 쌓아온 과거경험의 종자들은 너무나 많아서 그 양과 크기를 짐작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저장식의 인식대상인 신체기관은 너무나 미세해서 그 작용을 감지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저장식의 인식대상인 자연계는 너무나 광대해서 측량하기 어렵고 그 작용 역시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저장식은 종자, 신체기관, 자연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잠재적으로 작용을 계속한다.(자동 캠고더)

 

* 저장식이 잠재적 상태라는 말을 흔히 서양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유식에서 잠재적이라는 말은

표현 그대로 의식의 상태, 감지되고 파악되어지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을 억압된 감정이나 욕망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유식에서의 저장식은 억압된 욕망이나 감정이 아니라 과거 무수한 삶을 통해서

뜻(생각)으로 행한 모든 행위가 습관적 에너지의 형태로 저장된 과거의 경험, 기억을 의미한다.

 

저장식은 신체 속에 내재하면서 신체의 작용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생명체이다.

저장식은 자아가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믿거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성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번뇌장-정서장애, 소지장-인지장애)에 의해 아직 오염되지 않았다.

저장식은 업(행위)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자체가 다음의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선,불선이 아닌 중성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카세트 테이프에 이미 기록된 정보에 새로운 정보를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흔적(정보)가 등록(기록)되어지는 것과 같다.

저장식은 항상 머물러 있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 흐르는 물과도 같아서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진다.

 

우리의 의식 또한 물처럼 흐르면서 찰나마다 그 인식의 주체를 재구성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이어지기 떄문에

마치 연속적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어제의 나, 좀 전의 나는 분명 같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느낀다. 다만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한 성자가 되었을 때 저장된 마음의 작용이 멈춘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찰나마다 생멸하는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지적인 이해가 올바르고 정확하면 그 자체가 수행의 시작이고 과정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은

아는 것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거나 아직 앎의 업이 무르익지 않아서 결과로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저장식에는 이미 등록되어 있고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 저장식의 특성

1. 우리가 지금까지 하고 행동하고 생각경험의 총합이 바로 저장식이다.

  

과연 저장된 마음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2. 우리는 수없이 많은 생을 비슷한 경험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 생사윤회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과거부터 행해오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쉽게

우리들의 의식으로 통제하고 시정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저장식이 우리 안에서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주의를 끌 만한 감각으로 존재한다면 일단 의식차원에서 의지작용이 이루어 질 텐데 저장식은 좋고 나쁜 구체적인 심리적 감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평상시 인식능력(認識能力)으로 감지되지가 않는다.

 

자기를 바꾸고 싶어도 근본적 변화가 쉽지 않은 것도 바로 이 저장식 때문이다.

저장식은 성격, 인격이라는 겉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성격이나 인격의 형성은 무수한 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짧은 기간에 변화되지 않는다.  성격, 인격을 바꾸는 일은 평생의 노력으로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할 마음의 수행이지 잠시잠깐 행하고 결과를 기대하고 실망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3. 저장식을 바꾸는 일이 성격과 인격을 바꾸는 일이고 팔자와 운명을 바꾸는 일과 같아서

그 세월과 노력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꾸는 것이 가능한 것은

저장식이 번뇌와 어리석음에 물들어 있지 않고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장식을 바꾸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저장식이 항상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변화하고 찰나찰나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장식을 바꿀 것인가?

선의 종자는 싹을 틔우도록 물과 거름을 주고 악의 종자는 말라서 죽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번뇌와 어리석음의 종자는 말라서 죽게 내버려 두고

지혜의 종자는 물과 거름으로 돌보아서 싹이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스러워서 그냥 마음 가는대로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면 그 것은 

저장식에 등록된 미움과 원망의 종자에게 먹이를 계속 주어 살찌우고 강하게 키우는 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면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종자를 더욱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저장된 종자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긍정적인 것에 물을 주고

부정적인 것은 말라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가?

 

4. 욕망번뇌를 완전하게 제거한 사람에게는 저장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작용하지 못한다.

저장식이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를 이루어 해탈했다는 뜻이고 생사윤회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다. 물론 마음의 고통도 사라지고 일체의 인간문제들로 인한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그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말하고

번뇌는 자아가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믿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저장식의 수준에서 인식하고 경험하는 '나'와  나의 대상으로서 '너'의 이원화

너무나 미세하고 무의식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수행은 저장식을 보는 방법으로 두 종류의 명상법을 제안한다.

 

하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집중하여 마음작용이 정지된 몰입의 상태(선정)이고,

 

다른 하나는 미세한 관찰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이해를 얻는 통찰(위빠사나)이다.

통찰명상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자각능력과

의식한 감각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도를 발달시키는 훈련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각 싫어함과 좋아함으로 반응하는 것은 곧 바로 저장식의 특정 내용들을

강화하게(부정적인 에너지들에게 먹이를 계속주는 것) 되어 무의식적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그 결과 우리는 과거의 특정한 습관적 에너지에 점점 더 얽매이게 된다.

번면에 자각한 감각에 반응보이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서 관찰만 한다면

일어난 감각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일체 외부 자극과 대상으로부터 철수하고 차단하여

오직 내면세계로 주의들 돌려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자각하고

자각된 감각에 반응없이 중도적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이

바로 저장식의 내용들을 제거하는 훈련이다.

이러한 훈련에서 자각된 감각은

외부에 존재하는 감각대상을 상태로 발생한 감각이 아니라

저장식에 저장된 내용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