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연기법, 우주의 진실

장백산-1 2011. 7. 24. 23:48

연기법, 우주의 진실 - 신용국 저-

 

천상천하 제법무아 중중무진 제행무상

天上天下 諸法無我 重重無盡 諸行無常

 

천상천하 제법무아는 하늘 아래의 인간, 우주 , 만물, 법칙 중에서 저 혼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늘 위도 하늘 아래로부터 독립하여 자재하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천하 제법무아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바로 우주이며 神이어야 합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우주는 만물의 서로에 의지함이 겹치고 겹치는 중중무진의 우주이며,

서로에 의지하는 인연으로부터 만물의 연기緣起가 찰나도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제행무상의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중중무진 제행무상에서 존재와 존재의 세계는 분리불가의 일체同體이어야 합니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의 법칙이나 세계가 있을 수 없으므로 존재가 생산하는 세계의 因果律은 모두 존재 자신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즉, 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생산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존재를 이루는 연기의 법입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저 혼자 자재하여 존재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우주에서의 궁극과 현상, 그리고 연기의 법은 일승一乘이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현 존재에서 궁극과 현상, 그리고 법을 따로 분리하거나 對를 지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상천하 제법무아 중중무진 제행무상이 우주를 이루는 연기의 법입니다.

 

1-1. 연기법이 무엇입니까

 

緣起란 因緣으로부터 일어서는 결과이다. 연기법의 우주라고 하는 것은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새로운 연기 존재가 일어서는 현상의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다. ==> Q. 우주은 무한히 팽창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일정량을 유지하는가?

모든 연기존재는 인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므로 우주는 그러한 연기 존재들의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인드라망의 세계이다. 인드라망의 우주이므로 부분의 인연은 부분은 물론 전체의 인연과 연동되어 있다.

인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존재는 개별 自性이 없는 無我이며(緣起無我), 또한 정지하여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이 없는 無常한 존재이다.

비존재론적 인과율의 관점에서 보는존재는 객관의 실재가 아니라, 관측자의 인연을 포함하여 환경의 여러가지 인연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 존재이므로 인연을 제외한 순수한 대상만의 값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자가 인식 대상에 참여함으로써 인식의 인과율이 이루어지는 능동적 인식이 연기법 세계의 인식이며, 따라서 인식자가 인식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취하는 자유의지도 연기법 세계에서 비로소 가능할수 있게 된다.

연기법에서는 대상을 자신의 자성이 없는 존재이므로 空하다고 한다. 또한 티끌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존재화하여 집착하는 것은 오류이다. 탐욕이나 분노, 질투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겨나더라도 그것들에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연기법에서의 올바른 존재방식이다.  존재론적 인과율은 방편일 뿐이어서 허상이다. 실상은 연기법이다.

 

1-2. 시간과 공간의 연기, 형상의 연기

 

존재론적인 관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 즉, 형상의 우주를 인식이 인지하는 것이지만,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인식에서 형상의 우주, 시공간의 우주가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가 된다. 버트란드 러셀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건들에 있어서 그 사건적 위치를 갖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시공간이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며, 시간은 공간에 대해 공간은 시간에 대해 상대성이라는 사실은, 우주를 규정하는 독립된 시간이나 공간의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립된 시간이나 공간이 없는 우주의 실상은, 그 시공간성이 확정되어 있지 않는 비차원의 시공간성이다. 시간의 절대적 값이나 공간의 값이 없는 우주이므로 비차원의 우주라고 한다.

비차원의 우주는 형상이 없는 우주이다. 형상은 시간이나 공간이 0이나 무한대가 아닌 어떤 특정 값의 영역에서 비로소 존재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것이 없는 우주라고 보는 것이 옳다.

공간이 없다는 것은 존재와 존재를 분리하는 공간을 가지지 않는 일체동체一切同體의 界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주의 기질이 입자가 아닌 파동이라는 의미이다.

3차원 형상의 세계인 인간의 세계는 그러한 비차원의 우주로부터 연기한 차원의 우주이다.

 

1-3. 연기법의 의미[존재의실상 : 우주적 존재]

 

연기법은 모든 만물이 자성의 실체가 없는 제법무아의 인과율이다. 연기법으로 부터 도달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우주에서 인간을 운영하는 신이나 절대 법칙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절대 궁극의 실체가 밖이나 내부에 따로 있음을 부정한다.

연기법에서는 바로 인간과 못 생명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존재와 우주 그 자체가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규정하는 신이나 법칙이 따로 없다는 연기법은 존재의 의지, 즉, 인간과 생명의 자유의지를 우주적 의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연으로부터의 해탈은 자신을 속박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존재론적 인과율의 관념들을 벗어버린다. 내가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인데, 그 우주에서 나를 제어하는 인연에 속박되어 노예가 되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보편의 절대나 궁극의 무엇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런 경건한 존재방식이나 강박관념들을 머리에 이고 실 필요는 없다. =>Q. 상대의 세계를 넘어선 절대의 세계가 존재하는가? 모든 존재의 궁극은 무엇인가?

자신이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로병사를 포함한 삶의 모든 문제들은 다만 자신을 구속하는 관념들과 업습으로의 연기일 이라는 것을 환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1-4. 연기법의 의미(우주의 실상 : 중중무진의 우주)

 

중중무진이란 인연의 겹치고 겹침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중중무진의 우주는 극단적 역동성의 우주이다.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는 제법무아이므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인연의 관계망 위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제행무상의 연기존재이다.

일체동체이며 중중무진인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라짐은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

불교의 잘못된 개념

  첫째, '나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나는 부처이다' ->'나는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이므로 부처이다.'

           이미 부처인 나의 연기존재를 각성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 보처를 본다.'

  둘째, '처처에 불성이 있다' ->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우주는 처처에 부처이다.

  셋째, '불성이 있으므로 살생하지 말라 -> 나와 일체동체이면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중중무진의 인연의 연기존재들이므로 의미없는 살생을 하

           지 말라.

  넷째, 범아일여. 만물에 브라흐만이라는 절대 실재가 내재해 있으므로 범아일여라는 말은 힌두에서 쓰는 말이다.

          -> 중중무진의 인연에 서로가 의지하여 있으므로 일체동체인 것이다.

 

1-5. 연기법의 의미(非法의 法)

 

법의 세가지 의미, 인과율, 사물을 포함하여 뭇 생명과 인간의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 법신불 즉, 연기법을 이루는 궁극의 무엇.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법이 사용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연기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연기존재가 곧 연기법이란 뜻이다.

연기우주에서는 존재와 법이 대칭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연기법이 곧 법신불인 것이며 따라서 법신불과 연기법 사이에 존재적으로 對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 비법의 법이다.

불교에서는 지은 자와 지어진 자, 운행의 법칙이 모두 하나이다. 그래서 세가지 사이에 어떠한 對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1-6. 연기법의 의미(삶의 실상 : 부처란 주인이 되는 것)

 

연기법의 우주에서 존재와 존재의세계를 규정하는 인과율은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는다.

인과율이 근원하는 곳은 존재의 밖도 아니고 존재의 안도 아니다. 바로 존재로부터 존재가 이루는 세계의 모든 인과율이 근원하는 것이 중중무진의 우주, 연기법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중중무진의 우주를 살아가는 존재는 자신의 세계, 자신의 우주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자 같은 노예의 삶이다.

존재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인과율에 한정되거나 그 인과율에 붙들려 고통당하는 머무름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존재가 대상과의 탐,진,치에 머물러 붙잡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행사한 존재의 인과율에 존재가 스스로 노예되기를 자청하는 꼴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상을 탓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게 하는 인과율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자신의 존재도 空한 연기 존재임을 안다면, 생로병사의 관념들을 포함한 부정적 감정들이란 한바탕 근거 없는 소란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연기의 법은 주인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참된 주인이 되는 무아의 법이다. 대상은 물론 자신의 존재에도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머무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연기의 법이다.

 

1-7. 삼법인

 

제법무아 : 나와너,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존재론적 구별이 오류이므로 나는 곧 우주적 존재, 즉, 부처라는 것이다.

제행무상 : 제법무아의 근거가 되는 법으로 行, 즉, 존재의 성질, 값, 형상 등이 모두 연기 존재라서 자신 스스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행이라는 것이다.

일체개고 : 삼법인의 결론.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알지 못하여 집착이나 분노에 머무르는 삶이 중생이며 고통이란 것을 말한다.

세상의 주인된 자, 우주의 주인된 자가 어딜 간다는 것입니까? 지금 있는 바로 이 자리를 놓고 어디를 돌아간다는 말인가?

 

1-8. 인간과 연기법

 

삶에서 편헙한 존재론적 관념들에 의지할수록 분쟁과 대립은 끊이지 않는다. 개체 중심으로 상황을 파악할수록 타인이나 사화는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덩어리들이고 만다.

무엇보다도 우주적 존재로 자신을 확장해야 한다. 모든 존재론적 관념들에 대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의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우주적 존재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1-9. 세계와 연기법

 

기독교의 세계는 심판의 구원으로 귀결되는 세계이며, 힌두교는 브라흐만이 이끄는 섭리의 인과율에 따라 세계가 진행될 것이므로, 개인은 자신의 해탈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존재의무가 이행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세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으로 서로에 의지하여 구축되는 세계가 불교의 세계이므로, 개인인 세계를 움직이는 관념과 욕망의 동력들에 대해 밝은 혜안을 가져야할 의무가 있다.

=>Q.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로 인한 인간 삶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주인이다. 삶에서 노예일 것이냐, 혹은 중생일 것이냐 부처일 것이냐, 혹은 우주의 티끌일 것이냐 우주적 존재일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는 자신의 세계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因果가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1-10. 연기법과 문명의 방향 (조화와 공생)

 

연기법은 방향성이 없다. 인간의 존재나 우주의 존재가 계획된 설계에 의해서 운명론적으로 굴러 가야한다는 강제된 방향성의 개념이 없으나, 지향해야할 방향성은 있다. 조화와 공생이다.

=> Q. 존재론적 관념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연기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1-11. 연기법 수행

 

연기법수행은 자신이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그 경계를 지켜보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경계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론적 관념들과 그로부터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연기법은 우주의 궁극 성품이 작용하는 道이다. , 연기법 수행은 궁극성품이 작용하는 道를 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궁극성품화하는 수행이다.  연기존재인 인간이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하거나 그 성품에 합체하려는 노력은 궁극성품과 연기존재인 인간이 서로 對를 짓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노력이나 수행은 연기법에 위배됨은 물론 왜곡된 관념을 궁극성품으로 잘못 취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궁극성품은 무애자재도 아니요, 구속도 아니요, 청정도 아니요, 더러움도 아니다.

연기법 수행의 다음 단계는 無常함을 아는 공부이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의 法을 통찰하라'는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부이다.

무상함의 공부는 자신이 마주하는 형상이나 의미들이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임을 속속들이 알아서 집착이나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공부이다.

연기법 공부의 마지막 단계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공부에 의지하여 자신의 잘못된 존재방식을 삶의 매 순간들에서 교정하는 自燈明 수행이다.

인간의 해탈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과율을 보는 것이다.

출처 : 행복하세요^^
글쓴이 : 바이올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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