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골칫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다.
과학은 삶을 문젯거리로 보며 거기에 어떤 해답을 찾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지적이라는 뜻이다.
그때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 개입하게 된다. 그대는 거기에서 빠져 버린다. 마음은 많은 도구들을, 지적인 통찰력을, 분석을, 논쟁을, 의심과 실험들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대의 전체성은 거기에서 빠져 있다. 그래서 희한한 현상이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해서 매우 예리한 지적능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다른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다.
과학은 오직 그대의 지적인 것에만 개입되어 있을 뿐 그대의 전체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다. 그리고 지적능력은 하나의 폭력이다. 그것은 공격성이다. 지적능력은 해부하고 나누고 분석하려 한다. 그대가 살아 있는 것을 파헤치는 순간 생명은 사라진다. 오직 시체 조각들만 그대 손에 남아 있다.
과학이 생명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과학이 손대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는다. 과학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신도 없다.
그러므로 한가지 사실을 명심하라. 지적인 것은 폭력이며 공격성이다. 지적 능력을 통해 나올 수 잆는 궁극의 것은 오직 죽음 뿐이다. 거기엔 어떤 생명도 없다. 부분적이며 전체적이지 않다.
그대는 분석이 아니라 합일을 통해 생명을 알 수 있다. 합일이 더 커질수록 삶의 더 높은 형태가 개화된다. 신은 궁극적인 합일이다. 전체적인 단일성이다. 존재계의 통합이다. 신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합일이다. 그리고 물질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분석이다.
그에 반해 종교는 그 기초가 신비로 되어 있다. 거기에는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다. 삶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풀릴 수 없다.
종교는 어떻게 하면 좀더 생기있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삶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느냐, 삶을 풍부하게 살 수 있느냐를 묻는다.
그대가 깊이 감추어진 무지를 느낄수 있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대는 신비의 문이 열리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대가 안다고 생각하면 그 문은 닫힌다. 그대가 무지할 때만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할 때만이 그 문은 갑자기 열린다. 그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이 문을 여는 것이다.
세 가지 방편이 있다.
첫째로, 지식이 중요해지는 것은 머리가 중심이 될 때다. 어린아이 같은 순박함이 중요해질 때는 가슴이 중심이 된다. 생각은 과학의 도구이며 느낌은 종교의 도구이다. 다시금 그대는 느끼는 유기체가 되기 시작해야 한다. 느낌과 생각의 차원은 서로 다르다. 그대가 생각할 때 그대는 분리된 채로 남아 있다. 그대가 느낄 때 그대는 녹아 든다.
느낌을 잃어버릴 때 경계선이 생겨난다. 사고작용은 경계선을 만든다. 사고작용은 언제나 한정과 구분을 고집한다. 어떤 정의 없이는 경계선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사고작용은 정의부터 서술한다. 그러나 느낌은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없다. 그대가 정의한다면 느낌은 멈춘다.
그대가 느낌의 순간을 맞게 되면 누가 말하고 누가 듣는지를 모른다. 바로 이 순간이라야 그것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다. 그때 말하는 자는 듣는 자가 되며 듣는 자는 말하는 자가 된다. 둘이 아니다. 한가지 현상의 양극이다. 한 극은 말하는 자이고 다른 한 극은 듣는 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분리된 채로 있다. 그리고 분리된 것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는 그 둘이 하나가 될 때 일어난다. 하나의 흐름이 바로 실재다. 그대가 느낄 때마다 다른 어떤 것이 그대의 에고보다 더 중요해진다.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경계선은 사라진다. 거기에 하나의 흐름, 하나의 굽이침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곧 삶이다.
우리가 명료함을 목적을 삼기 때문에 항상 실체를 놓치는 것이다. 개념화될 수 없는 어떤 것 속으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으로,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명료함은 죽은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채로 남아 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다. 삶 속에는 그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음은 사고작용을, 생각의 흐름을 의미한다. 마음의 뿌리는 그 생각들이 떠다니는 배경을 말한다.
그대의 마음이 아무 생각없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 그것은 매우 미묘해진다. 그것은 존재계에서 가장 미묘한 것이다. 그대는 그것보다 더 미묘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의식은 가장 미묘한 것이다. 마음에 생각이 없을 때 그대는 순수한 마음을 갖는다. 이 순수한 마음은 가슴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은 가슴으로 향할 수 없다.
그 비순수함은 마음 속의 부도덕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각을 총칭하는 것이다. 생각이란 자체가 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다면 의식은 즉시 본래의 순수 속으로, 가슴속으로 떨어진다.
무념(無念), 생각없이 깨어있음이 강조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매우 위대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 뿌리들이 잘려 나가고 즉시 의식은 가슴으로 떨어져 본래의 제자리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식은 표현될 수 없다.
'마음의 뿌리를 표현될 수 없는 절묘함 속에 두라'는 것은 그대가 어떤 생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될 때는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생각의 움직임도 없다. 이것은 너무나 섬세한 지점이다. 그리고 너무나 어렵다. 그대는 쉽게 놓칠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거기에는 생각이 없다. 그대는 갑작스런 의식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중심이 변화한다. 그대는 아래로 떨어진다. 그대는 가슴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슴으로부터 그대가 세상을 바라볼 때는 세상은 거기에 없다. 오직 신만이 있다. 머리로부터 그대가 바라볼 때는 신이 없다. 오직 물질 세계만 있다.
물질 세계와 신은 두 가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단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같은 현상을 존재의 두 중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식으로 존재하라. 그때 모든 것이 그대에게 가능하다. 인식의 모든 문들이 열릴 것이다. 신비의 모든 문들이 열린다.
지적능력을 통해 아는 것은 전체가 아니다. 그것은 부분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분적인 진리는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진리처럼보이는 것에 그대가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슴으로 이동할 때 그대는 존재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가슴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대가 전체성 속에 있다는 뜻이다. 마음은 부분이다. 나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가슴의 중심은 그대 존재의 핵심이다.
그대는 어떤 사람을 사랑을 통해서 알지 않는 한 그의 전체성을 결코 알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대에게 그 사람의 전체적인 것을 드러내 줄 수 있다. 본질을 드러내 줄 수 있다. 사랑은 가슴을 통한 앎이며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슴은 그대 존재 전체다. 그대가 전체적으로 될 때만이 전체를 알 수 있다.
그대의 몸은 쉴 새 없이 진동을 발산시키고 있다. 그대는 발광체다. 그리고 그대 삶의 에너지는 계속 옆사람으로 흘러간다. 동시에 그의 삶의 에너지는 그대에게로 들어간다.
전 우주가 생명 에너지의 끊임없는 흐름이다. 그것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어떤 개체적 단위도 없다. 그것은 우주 전체다.
그대가 내면에서 전체적일 때 그대에게 외부도 전체적으로 드러난다. 그 계시는 신과의 만남, 혹은 모크샤, 해탈 등으로 불리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니르바나, 즉 불 꺼짐이라고 부른다. 말은 다르지만 같은 본질, 같은 핵심을 갖고 있다.
한가지 현상이 이 모든 표현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바로 개체의 사라짐이다. 그대는 그것을 신과의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거기에 더 이상 자기가 없다. 촛불이 꺼지고 나면 어디에서도 불꽃을 찾을 수 없듯이 개체는 비존재 속으로 들어간다. 개체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 모든 종교는 그대가 진리를 깨달으면 에고가, 개체가 사라진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개체라는 느낌이 환상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것이 사라질 수 있는가? 개체는, 에고는 실제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 때만이 사라질 수 있다. 사라질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질 수 없다.
단지 머리 때문에 거짓된 상(像)이 존재 속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개체라는 개념이다. 그대가 가슴으로 들어간다면 그 거짓된 상은 사라진다. 그것은 머리의 창작품이다. 가슴으로부터는 우주만이 있다. 개체는 없다. 전체만 있다. 부분은 없다. 에고는 비실재다.
오직 본질만이 잡힐 수 있다. 고통은 에고의 그림자이다.
단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 가라. 에고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사랑에 의해서, 기도에 의해서, 우주에 의해서 기꺼이 소유당할 준비가 된 자만이 - 그것은 에고를 죽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 삶이 실제로 무엇인지 안다. 삶이 무엇을 주는지도 안다. 가능한 것은 즉시 실재가 된다. 그러나 그대는 먼저 자신을 내걸어야 한다.
진짜 명상이 그대에게 일어나면 귿는 그것을 다시 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대가 여전히 그것을 다시 맛보고 싶어진다며 그것은 진짜로 일어나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하나의 굴레인 것이다. 명상마저 사라져야 한다. 그대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와야 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대는 신성이다. 있는 그대로 그대는 축복이며 엑스터시 인 것이다.
머리없이 살아보라. 거울 앞에 서서 그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가슴으로부터 보고 있다고 느껴보라. 그러면 점점 가슴은 그 기능을 펼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의 인격은 전체적으로 변화된다. 그대의 모든 심리 구조와 사고방식이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가슴은 제 나름대로의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사랑을 해보라.그대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머리를 잃어버리 것이다. 사랑은 가슴의 기능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가슴중심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때는 사랑이 풍부해지도록 노력하라. 내가 사랑에 풍부해지리라는 말을 할 때는 그대의 인간관계에서 질을 변화시키라는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계산을 밑바탕으로 하지 말고, 사랑을 밑바탕으로 하라는 말이다.
마음은 단지 분석만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슴은 모든 것을 합한다. 마음은 오직 나누고 쪼갤 뿐이지만 가슴으 전체를 바라보고 전체로 이끈다.
그대가 가슴으로 볼 수 있을 때 삼라만상은 하나의 유기체로 보인다. 마음을 통해서 접근할 때 우주는 단지 원자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저 하나하나의 원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슴은 유기체적 통일체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통합은 신이 된다. 그대가 가슴으로 우주를 바라볼 때 우주는 하나이며, 그 하나는 바로 신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기초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무관심해지지 마라. 그때 그대의 가슴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가슴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갈 것이다.
첫째로, 머리를 없애라. 둘째로 사랑하라. 셋째로 심미적으로 되라. 아름다움에 대해서 보다 민감해져라.
그대가 살아 생동하는 가슴을 가질 때 마음의 자질도 변화하게 된다. 그때 그대는 마음으로 갈 수 있다. 그대는 마음을 통해서 가슴의 기능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단지 하나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대는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더 이상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대가 원하며 언제든지 마음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한 사람의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가슴은 그대가 마스터라는 느낌을 줄 것이다.
깨어나라! 주시히라! 이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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