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인간에게만 오직 모든 선택의 문이 열려 있다

장백산-1 2011. 7. 24. 17:31

인간은 본능을 잃어버렸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인간에게만 모든 선택의 문이 열려 있다. 그리고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프로그램이 없다.

그대는 자유롭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감이 그대에게 부여된다. 그 책임감은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대의 노력을 통해서 그대의 미래가 결정된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신이 출발점이 아니다. 신은 종착점이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궁극적인 정상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살할 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정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파과할 수 있다. 또한 창조할 수 있다. 창조와 파괴는 동시에 움직인다.

 

창조를 시작하라. 그대가 창조하는 것은 사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대는 창조를 계속해야 한다. 그대가 궁극에 이를 때까지 창조를 계속해야 한다. 그대가 창조를 계속하지 않으면 그대는 지루해질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눈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그대의 눈을 응시할 때 그대는 무례함을 느끼게 된다. 그가 진실한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눈은 자신의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매너가 아니다. 대화를 하는 중에도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다.

 

심리학자들은 그 한계선이 30초라고 말한다. 그대가 낯선 사람을 바라볼 때 30초 이상 바라보아선 안된다. 만약 그대가 한계선을 넘으면 그에게 공격을 가하는 격이 된다. 눈을 쳐다보는 것은 일종의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 사람의 진실을 꿰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을 기억하라. 눈은 위장할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눈을 통해서 그대 에너지의 80%가 나간다. 그대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에 활력을 주면 그대 전체가 활력에 찬다.

그 에너지를 내면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안다면 그대는 '지혜의 눈이 될 것이다.

 

외부로 흘러나갈 그대의 에너지로 하여금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그대 자신의 가슴 중심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 에너지가 가슴으로 쏟아져 내리면 그대는 그대는 최대한 가벼워진다. 마치 온몸이 깃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중력은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 즉시 그대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근원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그대를 재충전시킨다.

깊은 잠이 그대를 재충전해주는 것은 에너지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내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비밀을 안다면 보통사람들이 여섯 시간 내지 여덟 시간 동안 자면서 하는 일을 그대는 몇십분만에 할 수 있다. 그 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뭔가를 허용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의 에너지가 흘러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가슴속으로 떨어진다.

그대의 눈을 따라 에너지가 움직인다. 눈을 통해서 나오는 에너지는 가장 섬세한 형태의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의 질은 그대와 함께 변한다.

 

"무위(無爲)는, 그리고 무아(無我)는 나보다 강하다. 전혀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과 아무도 없는 것은 나보다 강하다. 뭔가름 함으로써 강해지는 자는 쓰러질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 방편의 비밀이다.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대의 에너지는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에테르화될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축적된다. 그대의 에테르체는 전기에너지를 모으는 저장고가 된다.

 

명심하라.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순수한 의식으로만 태어났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순수한 의식을 가두어 놓는 감옥일 뿐이다.

명상을 통해 내면에서 그대를 얽어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대는 자유롭다. 그대는 과거 전체로부터 자유롭다.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대가 무심이 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진다. 그대는 자신의 역사를 초월한다. 이제 어떤 사회도, 종교도, 경전도, 전통도 없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마음 속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도 없고 따라서 미래도 없다. 과거와 미래는 마음의 부분이다. 기억과 상상인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제 어떤 미래 속으로도 달아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지금, 지금, 영원한 지금만이 있다. 그때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대는 모든 전통을 초월한다. 그대는 모든 역사와 마음까지 초월한다. 그리고 공포로부터 자유롭다. 그때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자유 속에 있다.

 

본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마음도 단지 하나의 결합일 뿐이다.

마음 속에는 어떤 자아도 없음을 발견하라. 자꾸만 깊이 들어가면 거기에서 그대의 무(無), 심연, 끝없는 공(空)과 만나게 될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쑤냐(Shunya)라고 불렀다.

이 쑤냐를 만나는 것은 정말로 공포스런 일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내심에는 항상 그 공포가 서려 있다. 한번 그대가 그대의 심연과 만나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공포는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고 나면 공포가 생길 수 없다. 왜냐하면 공(空)이란 것은 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포는 죽음에서 기인된 것이다. 죽음은 미래의 어느 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시작할 때 동시에 시작된다. 죽음이 그토록 확실해질 때 공포는 없다.

그대는 이미 진리다. 오직 어떤 각성이 필요할 뿐이다!

그대는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자신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가능한 일이다.

 

한번 마음이 거기에 없으면 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깨어나라! 주시하라! 이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