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윤회의 시작과 끝 : 12연기

장백산-1 2011. 7. 27. 01:13

윤회의 시작과 끝 : 12연기 

 

  
  윤회는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어디에서 끝나는가? 나는 언제부터 존재하며, 왜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 어디까지 가야 이 여행이 끝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볼 차례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의 어설픈 설명보다는 부처님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공부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정확한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얻으실 때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이다.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하니, 우선은 내가 고해의 바다로 떨어진 이유를 알아야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인연이 있었음이다. 때문에 인연에서 벗어나야 윤회를 벗고, 윤회에서 벗어나야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연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인연의 시작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내 그 시작을 깨달은 석가세존이 이를 일컬어 무명(無明)이라 했다. 무명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십이연기법을 살펴보면 무명의 뜻은 최초의 인연, 즉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석가세존이 십이연기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

 

 

        某靈靈駕 至心啼受(모령영가 지심제수)
        汝從無始已來 至于今日(여종무시이래 지우금일)
        無明緣行 行緣識(무명연행 행연식)
        識緣名色 名色緣六入(식연명색 명색연육입)
        

        六入緣觸 觸緣受(육입연촉 촉연수)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有緣生 生緣老死(유연생 생연노사)
        憂悲苦惱(우비고뇌)

 

        모령의 영가들이여, 지극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라.
        그대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었고, 행을 쫓아서 식(識)이 일어났으며
        식이 일어나매, 명색(名色)이 생겼고, 명색이 생기니 육입(六入)이 갖추어지고 


        육입을 갖추므로 촉(觸)을 느끼고, 촉을 느끼므로 수(受)가 뒤따르고
        수(受)가 뒤따르니 사랑(愛)에 붙잡히고, 사랑에 붙들리니 취(取)하고자 하고, 취하고자 하니     가지게(有) 되고 가지게 되니 태어나게(生) 되고, 태어나고 나니 늙고 죽음이 따르고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있게 되었던 것이니라.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역관(逆觀)

 

        無明滅卽 行滅(무명멸즉 행멸)
        行滅卽 識滅(행멸즉 식멸)
        識滅卽 名色滅(식멸즉 명색멸)
        名色滅卽 六入滅(명색멸즉 육입멸)


        六入滅卽 觸滅(육입멸즉 촉멸)
        觸滅卽 受滅(촉멸즉 수멸)
        受滅卽 愛滅(수멸즉 애멸)
        愛滅卽 取滅(애멸즉 취멸)
        取滅卽 有滅(취멸즉 유멸)


        有滅卽 生滅(유멸즉 생멸)
        生滅卽 老死(생멸즉 노사)
        憂悲苦惱滅(우비고뇌멸)

        무명을 없애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가라앉고
        식이 가라앉으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육입이 없어지고
        육입이 없어지면, 축을 느끼지 못하며


        촉을 느끼지 못하면, 수가 부질없고

        수가 부질없음에, 사랑에 붙들리지 아니하고
        사랑에 붙잡히지 아니하면, 취할 것이 없나니
        취할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이 없어지고


        가진 것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음이라.
        나지 않으니, 늙고 죽는 일이 없고
        근심(憂)과 슬픔(悲)과 고뇌(苦惱)를 멸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열 두가지 연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십이연기의 전체적인 의미, 그리고 연기론을 통한 윤회의 시작과 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연기법은 유식론(唯識論)과 더불어 불교 철학의 양대 산맥인 윤회론의 골자를 이루는 내용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야 말로 전생과 윤회라는 주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서적들을 보면 대개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필자가 앞에 그려놓은 십이연기도를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순관(順觀, 그림에서 시계 방향)과 역관(逆觀, 그림에서 시계 반대 방향)을 수도 없이 반복하신 끝에 마침내 육도 윤회의 비밀을 깨닫고 정각(正覺)을 얻으셨다고 한다.
  십이연기법을 앞의 그림처럼 읽어나가면 바로 현대적인 풀이가 된다. 먼저 순관(順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생명이 육도 윤회하는 고해 속에서 고뇌 번민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니, 까마득한 옛날에 인연(無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인연이 생기니 그것에 반응하는 본능(行; 부처님은 짐승들의 본능을 행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마지막 장에서 상세히 해설한다)이 생겼다. 본능이 생기니 이어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識)이 생겼다. 이 분별심이 업이 되어 육체(名色)를 받게 되고, 몸을 받고 나니,

 

 자연히 감각(六入 : 육경(六境)이라고도 한다. 여섯 가지 감각 또는 감각 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눈, 코, 귀, 입, 신체, 의식의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이 생긴다. 감각을 갖추게 되니 나와 남으로 나누어져 만남(觸)이 있게 되고, 남과의 만남에서 내 것이라는 집착(受)을 하게 된다. 집착을 하게 되니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愛)이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되니 욕망(取)에 사로잡히며, 욕망의 불길은 소유(有)하게 만들어

 

마침내 소유(有)의 업이 뿌리가 되어 다시 태어나게(生) 되었다. 태어나고 나니 고뇌 번민을 떨칠 수가 없도다.”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으로 육도 윤회의 이유를 알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이연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으로 윤회의 짐을 벗고 해탈로 가는 길을 알아보자.

 

  "옛날에 이 몸을 있게 만든 그 인연(無明)을 없애면 인연을 따라 일어났던 본능(行)이 사라지고, 본능(行)이 사라지면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識)이 없어진다. 분별심이 업이 되어 받았던 몸(名色)을 벗게 되니 몸을 벗으면 육체의 작용인 여섯 가지 감각(六入)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니 나와 남의 나뉨이 없어 만남(觸)이 없어진다. 남과 만나지 아니하게 되니 내 것이라는 집착(受)을 버리게 되고, 집착을 버리니 집착

 

의 대상에 대한 사랑(愛)을 가질 이유가 없다. 사랑을 하지 아니하니 욕망(取)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니 소유(有)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소유(有)하지 아니하니 태어나야 할 업을 짓지 않게 되고, 태어날 업이 없으니 태어남(生)이 없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는데 무슨 고뇌 번민이 있겠는가?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출발하여 무명으로 돌아와 끝난다. 여기서 부처님이 무명을 모든 인연의 시작인

 

 무엇으로 말씀하셨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명을 없앤다는 것은 인연의 원인을 없애겠다는 말이며, 소급해서 최초의 원인을 멸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무명이라 이름지은 인연의 시작은 무엇일까? 과연 최초의 인연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인과론(因果論)이란 한마디로, ‘모든 것은 선행되는 이유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이유가 있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인과론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이유는 아무런 선행되는 이유도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인과론적 우주인가? 거시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인과론적 우주가 아니다. 물질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자의 세계는 분명히 인과론의 세계다. 분자의 생성은 반드시 그 선행되는 사건의 결과이고 분자의 이동은 반드시 인과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놓으면 떨어지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인과론의 세계는 예측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놓았는데 이것이 공중으로 솟구칠지 밑으로 떨어질지, 오른쪽으로 날아갈지 갑자기

 

 사라져버릴지를 예측할 수 없다면 이건 인과론의 세계가 아니다. 분자 이상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한 대로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갑자기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해지고 인과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원자핵을 싸고도는 전자의 움직임은 전혀 비인과적이다.
  방금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는 위치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전자는 허깨비처럼 그냥 여기저기 나타난다.

 

특정 지점에 있는 것을 관찰하는 순간엔 거기에 있지만 다음엔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미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건 완전히 요술의 세계다. 미립자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존재란 특정 순간의 위치와 속도이다. 그러나 미립자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미립자들이 전혀 선행하는 원인 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져서 소멸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이런 허깨비들이 쌓아올린 허상의 세계이다. 존재하지 않는 물질들인 미립자는 반드시 관찰자의 의식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그리고 관찰자의 의식이 그 미립자의 선행 원인으로 작용해서 미립자를 움직인다. 시공간이란, 비인과론적인 미시 세계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인 거시 세계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계도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 조직된 정보인 영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들이 인과론적인 통합 정보(Set of Spirits)로 넘어가는 그 문지방을 찾아야만 인연의 출발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인연의 첫 출발점이 바로 무명이다.
  미립자의 존재가 양자론으로서 파악할 때 공(空)이라면, 무명도 역시 공(空)이라 할 만한 것이다. 공(空)인 미립자들이 모여 만든 물질계가 결국 도달할 최종적인 특이점의 성격이 무(無)인 것처럼 정신계의 최종점이 될 인

 

연의 끝인 해탈 역시 무(無)다. 이 세계는 비인과론적인 세계인 무(無)에서 출발해서 인연의 세계를 거쳐서 결국 비인연의 세계인 공(空)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물질의 시작이 공(空)인 것처럼 영혼의 시작도 공(空)이다. 따라서 우주 의식도 시작과 끝이 있고 윤회도 시작과 끝이 있다. 인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空)으로 돌아가면 윤회도 끝난다. 스스로 끝내지 못하면 억겁의 세월을 우주와 함께 유전하는 것이 의식이다. 


  유전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생명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누리지만, 괴로움의 순간은 더 길고 즐거움은 덧없으며, 끝없이 태어나는 업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 내가 태어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다음 생의 태어남도 거부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성을 닦아서 인연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 그 여행이 덜 피곤하고 덜 고통스러운 길이 되도록 예비하는 것뿐이다. 가능하다면 이 고통스러운 여행을 그만 두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글쓴이: 중도
           출처 http://cafe.daum.net/to-be/R4R6/49 주소 복사

  

출처 : 공덕총림 덕림회 법당
글쓴이 : 자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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