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업과 윤회란 무엇인가?-2. 업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장백산-1 2011. 7. 27. 02:18
2. 업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우선 업(業)이라는 주제부터 여러분들과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함께 얘기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정도의 오해가 업이라는 가르침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람들이 업을 말하면서 갖는 느낌 혹은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대단히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입장에서 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평소 생활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릴 때는 업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어쩐지 안 풀리고 실패를 겪었다든지 모진 고난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말합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업을 지었길래…" 또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 속에 들어 있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뽑아보면 한국 사람들은 업이라는 것을 아주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검고 죄스러운 것 등 죄업과 관련된 입장에서 업을 이야기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라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업이라는 말을 상당히 과거 예속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부처님 경전 속에서 업이라는 것을 공부해 보면 결코 업의 가르침은 무겁고 어두움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볼 때 부처님은 가볍고 하얀 업을 이야기하셨고, 과거 예속적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업을 이야기하셨으며, 또 죄업(罪業)보다는 복업(福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의 본래 뜻이었는데 불교가 세계적으로 전해지고 우리에게 이르는 과정에서 다소 변화를 겪었다고나 할까요.
업의 본래 의미인 밝고 가볍고 미래지향적이고 복업으로서의 가르침이 무겁고 어둡고 과거 예속적이고 죄업으로서의 분위기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정반대의 느낌이나 분위기로 업의 의미가 회전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업에 대한 분위기나 관점이 오해에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만한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한때 사위성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위성은 오늘날 인도의 슈라바스티 지역, 우타르푸라데슈라는 주에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라는 나라의 수도였지요.
여러분들도 경전에서 사위성이라는 말을 종종 보셨을 거예요.
그곳에 부처님께서 계실 때인데 하루는 아침 일찍 젊은 청년이 얼굴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부처님께서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느냐" 하고 물으셨죠.

젊은 청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참 안됐구나"

하면서 부처님께서 위로를 하셨죠.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은 부처님께 예상 외의 부탁을 올립니다.

"부처님,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 것은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이왕이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쪼록 부처님께서 힘을 써주셔서 저희 부친께서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도록 애써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젊은이의 말인즉 요즘으로 말하면 영가천도를 해주십시오, 이런 이야기일 수 있어요.
우리 역시 가족이 죽음을 맞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49재도 지내고 영가천도를 위한 각종 법식을 벌이지 않습니까?
그처럼 젊은이도 부처님께 그런 부탁을 한 셈이죠.
그때 부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를 쓰면 너희 아버지가 다음 생에 좋은 곳에 몸을 받아 재생할 수 있다고 믿느냐?" 이렇게 질문을 해요. 젊은이는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고 답을 하죠.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어떤 근거로 내가 너의 아버지를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권능이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

고 물으셨죠.

그러자 젊은이는

"부처님께서는 이미 불사(不死)의 법에 정통하셨다고 저희에게 가르치신 바 있고, 또 욕계의 천신세계, 색계의 천신세계, 무색계의 천신세계 등 온갖 천신세계에 자유자재로 드나드실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왕이면 저희 아버지가 나쁜 곳에 떨어지기보다는 좀더 좋은 천신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힘을 써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젊은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면서

"좋다,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사바티(시내)로 내려가서 내가 준비해 오라는 것을 가져오너라" 하십니다.

젊은이는

"무슨 준비를 할까요?"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항아리 두 개와 자갈을 한 되 사오고 버터를 한 되 사오너라. 그리고 긴 막대기를 하나 구해 갖고 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시키는 일이니까 젊은이는 급히 시장에 내려가 항아리 두 개와 자갈 한 되, 버터 한 되 그리고 긴 막대기를 구해서 돌아옵니다.

"부처님, 준비가 다 됐습니다."

젊은이가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좋다. 그러면 나와 같이 뒤뜰 호숫가로 가자" 하십니다.

뒤뜰로 가니 잔잔한 호수가 부처님 정사(精舍) 뒤에 펼쳐져 있었어요. 한 1미터 수심을 가진 호수였는데 흐름이 잔잔하고 물밑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호수였죠.

부처님께서는

"우선 항아리 하나에 자갈을 집어넣어라. 그리고 물에 띄워라" 하십니다.

젊은이는 항아리 안에 자갈을 한 대 부어넣고 호수에 띄웠습니다. 항아리에 자갈이 들어갔어도 물의 부력 때문에 항아리가 뜨겠죠. 항아리는 호숫가에서 둥둥 떠서 물의 중심부로 향했습니다. 항아리가 어느 정도 호수 중심부로 들어가 막대기가 닿을 만한 거리가 되자 부처님께서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막대기로 항아리를 부셔버려라."

젊은이는 부처님 말씀대로 항아리를 부셨습니다. 그러자 항아리가 쪼개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자갈이 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잘 봤느냐고 묻습니다. 젊은이는 잘 봤다고 답합니다.

"그러면 다시 나머지 항아리에 버터를 넣고 호수에 띄워라"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는 부처님께서 시키는 대로 버터를 넣은 항아리를 호수에 띄웁니다.
물 위에 뜬 항아리가 막대기가 닿을 만한 거리가 되자 부처님께서는 항아리를 부수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아리를 부수자 버터가 물 위로 흩어지겠죠.
젊은이는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대단히 기쁘고 희열에 차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삼세의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자기 선친의 영가를 위해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고대로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합니다.
화장할 때 나무를 쌓고 향료를 뿌리고 그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하는데, 인도사람들은 시신이 타기 전에 중간쯤 타면 장자나 상주가 화장대 위로 올라가서 아직 타고 있는 시신의 두개골을 으깨는 전통의식이 있습니다.
두개골을 깨면 골수가 쏟아지겠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 궁금하실 겁니다.
인도 사람에게는 시신이 타고 있을 때 두개골을 깨주면 영혼이 좋은 곳에 올라간다고 믿는 속신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항아리에 자갈을 넣고 깨라고 한 것이나 또 버터를 넣고 항아리를 깨라고 한 것은 당시 인도의 전통의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즉, 젊은이는 부처님 방식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좋은 곳에 보내기 위한 의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흡족해하는 젊은이에게 다시 묻습니다.

"잘 봤느냐."

젊은이는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처음 항아리가 깨어지면서 자갈이 가라앉은 것이 저 밑에 보이지? 만약 인도 대륙에 있는 모든 종교인들, 예를 들어 신통력 있는 종교인들을 이 호숫가에 불러 모으고 저기 있는 자갈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게 부탁을 해보자. 그 사람들이 와서 주문을 외우고 신통력을 부리는 등 별짓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통방통한 사문 바라문들이 이 호숫가에 모여 서 자갈아 떠올라라… 하고 외쳐 부른다고 했을 때 저 자갈이 떠오르겠느냐?"

젊은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물보다 무거운 자갈이 어떻게 떠오르겠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버터를 두고 이야기해 보자. 버터는 물보다 가벼우니까 떠오른 것이다. 그러면 종교인들에게 똑같이 부탁을 한다고 했을 때, 저 버터를 보고 가라앉으라고 주문을 외우면 버터가 가라앉겠느냐?"

그러자 젊은이는 답합니다.

"물보다 가벼운 버터가 어떻게 가라앉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이다. 너의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업이 저 자갈처럼 무겁고 어두운 업이라면 내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대로 너의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업이 가볍고 밝은 것이라면 천하없는 사람이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도 천신의 세계로 승천할 수밖에 없는데 난들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돌아섭니다.

그제서야 젊은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제가 부처님께 괜한 부탁을 드려서 석가 세존을 성가시게 해드렸습니다. 저는 마을에 내려가서 버터처럼 희고 밝은 업을 지어서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도 준비하는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업에 대한 가르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 중에 하나라서 소개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의 가르침 속에는 자갈처럼 무겁고 어두운 업을 지어서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업을 설하시는 근본 목적은 무엇입니까?
버터처럼 희고 가볍고 경쾌하고 착한 업을 지어서 미래에 다시 말해 이생이나 다음 생에서 업을 지은 이후의 시간 속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은 업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악업을 경계하고 선업을 선양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업에다 초점을 두고 업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비판을 해도 괜찮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업에 대한 가르침을 설할 때는 분명 가볍고 밝은 업을 지어서 미래지향적인 복된 삶을 추구하라는 뜻에서 업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 점을 공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업을 떠올릴 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생각은 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업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운명이란 말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혼자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정해진 원리라고 할까요.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란 말 속에 담아서 사용합니다.
그것처럼 '업' 하면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즉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무겁고 정해진 운명 같은 분위기와 무게를 업이라는 말에 부여합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업이라는 말을 공부하다 보면 업은 전혀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게 되고 또 인지해야 합니다.


출처 : 연등사(연등 학생회 출신)
글쓴이 : 3기김정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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