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업의 다섯 가지 측면
저는 여러분과 업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면서 업이 아주 친숙하고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공감하고 싶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처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업이라는 것이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어서 내 손 안에 넣었다가 던졌다가 할 수 있는 업의 느낌을 가지고 나누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본래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업을 공부할 때 부처님은 다섯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 업이라는 말뜻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업의 주체(主體)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업의 전제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업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업의 방향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을 살펴야 합니다.
우선 업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사실 부처님은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아니 부처님께서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고 의아해 하실 겁니다.
그러나 정작 업이라는 말은 중국말입니다.
부처님은 인도사람입니다.
인도사람인 부처님이 중국어인 업이라는 말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업이라는 말 속에는 중국적인 사유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므로 원시불교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고타마 붓다의 마음이 많이 흐려져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도말로는 업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카르마(karma)'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이 업의 원어입니다.
그런데 이 카르마를 팔리어로 하면 캄마(厘磨)입니다.
그렇다면 캄마는 무슨 뜻입니까?
'행위', '움직임'이란 뜻을 갖고 있는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원리, 운명적인 어떤 실체 등의 뜻은 카르마라는 말에는 본래 없었던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에 안타를 붙이면 '카르만타'가 되는데 직업이란 뜻입니다.
둘째,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살필 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업은 아니기 때문에 주체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카르마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죠.
바람이 불어서 빨래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나 그 움직임을 두고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움직임을 보고 업이라고 하느냐?
전통적인 불교 교학에 들어가면 육근(六根)의 움직임만을 업이라고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은 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업의 주체를 '나'라고 하지 않고 왜 부처님께서는 육근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말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의 목적이 참나를 찾는 데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짜 '나'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금기시하십니다.
대신 부처님께서는 "너희 스스로의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대상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스스로를 육근이라고 불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육근의 움직임.
이 육근의 움직임이나 육근의 행위만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이라고 하는 개념을 점점 축소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근이 일으키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가령 우리는 밤에 자면서 많이 움직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꼼짝 않고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밤에 자면서 움직이는 것을 업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세번째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육근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 업이라고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전제냐, 그것은 의지적(意志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만을 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일지 모르지만 분석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도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제가 팔리어 경문 속에서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쌓아두었다면…"
이라고 했던 것처럼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업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때 개미를 죽인 것이 악업이냐는 물음입니다.
이때 바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의식적으로 개미가 있음을 상기했고 의도적으로 그 개미를 죽였다면 그것은 엄연한 살생입니다.
나쁜 업이죠.
그런데 자신이 개미를 죽이는지 의식도 못했고 개미가 죽었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는 업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개미가 어찌되었든 죽었는데 그것을 업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개미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법문이 있습니다.
수행부분에서 그것을 따지게 됩니다.
수행에서는 의식하지 않고도 잘못한 것을 문제삼습니다.
수행은 무의식적인 것까지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업은 의식적인 것, 일단 의도적인 것만을 문제삼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자신이 의식하면서 한 행위에 대해서만 업이라는 말을 쓰게 되고, 선한 업이니 악한 업이니 하는 말을 붙입니다.
경전에 보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중에 첫째가 망언,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것, 거짓말인 줄 '알면서' 하는 거짓말, 이것이 악업을 구성하는 요건입니다. 모르고 한 일, 실수로 하는 일은 일단 업의 차원에서는 제외시키는 것이죠.
우선 내가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됩니다.
즉 육근의 행위 중에서도 의지적인 행위,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가 존재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업을 일으키는 것인가?
업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행동이며 움직임이라고 했지요.
움직임은 돈도 들고 힘도 들고 에너지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움직이고 행동했거든요. 업을 지었거든요.
그렇다면 왜 행동했을까요?
가령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부처님 이야기를 저와 나누는 것도 여러분들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로서의 업이 왜 일어났느냐,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목적을 "편함을 추구하여 업을 짓는다"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굳이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밥을 먹기 위해 움직이고, 밥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죠.
이렇게 움직이고 업을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죠.
이 편안함이라는 말을 좀더 교학적으로 분석하면 "아집의 존속을 위하여 업을 일으킨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행복을 추구하여 업을 일으킨다" 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이라는 것을 규정할 때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편안함을 추구하는 행동', 또는 '편안함을 추구하여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업의 근본적인 이해를 풀어가다 보니 본래 가졌던 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셨을 줄 압니다.
즉 업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나고 부정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된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식별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원리나 권능의 뉘앙스 속에서 업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그것을 업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국 이것이 고타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업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면서 업이 아주 친숙하고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공감하고 싶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처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업이라는 것이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어서 내 손 안에 넣었다가 던졌다가 할 수 있는 업의 느낌을 가지고 나누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본래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업을 공부할 때 부처님은 다섯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 업이라는 말뜻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업의 주체(主體)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업의 전제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업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업의 방향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을 살펴야 합니다.
우선 업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사실 부처님은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아니 부처님께서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고 의아해 하실 겁니다.
그러나 정작 업이라는 말은 중국말입니다.
부처님은 인도사람입니다.
인도사람인 부처님이 중국어인 업이라는 말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업이라는 말 속에는 중국적인 사유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므로 원시불교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고타마 붓다의 마음이 많이 흐려져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도말로는 업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카르마(karma)'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이 업의 원어입니다.
그런데 이 카르마를 팔리어로 하면 캄마(厘磨)입니다.
그렇다면 캄마는 무슨 뜻입니까?
'행위', '움직임'이란 뜻을 갖고 있는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원리, 운명적인 어떤 실체 등의 뜻은 카르마라는 말에는 본래 없었던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에 안타를 붙이면 '카르만타'가 되는데 직업이란 뜻입니다.
둘째,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살필 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업은 아니기 때문에 주체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카르마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죠.
바람이 불어서 빨래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나 그 움직임을 두고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움직임을 보고 업이라고 하느냐?
전통적인 불교 교학에 들어가면 육근(六根)의 움직임만을 업이라고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은 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업의 주체를 '나'라고 하지 않고 왜 부처님께서는 육근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말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의 목적이 참나를 찾는 데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짜 '나'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금기시하십니다.
대신 부처님께서는 "너희 스스로의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대상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스스로를 육근이라고 불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육근의 움직임.
이 육근의 움직임이나 육근의 행위만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이라고 하는 개념을 점점 축소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근이 일으키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가령 우리는 밤에 자면서 많이 움직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꼼짝 않고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밤에 자면서 움직이는 것을 업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세번째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육근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 업이라고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전제냐, 그것은 의지적(意志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만을 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일지 모르지만 분석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도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제가 팔리어 경문 속에서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쌓아두었다면…"
이라고 했던 것처럼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업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때 개미를 죽인 것이 악업이냐는 물음입니다.
이때 바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의식적으로 개미가 있음을 상기했고 의도적으로 그 개미를 죽였다면 그것은 엄연한 살생입니다.
나쁜 업이죠.
그런데 자신이 개미를 죽이는지 의식도 못했고 개미가 죽었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는 업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개미가 어찌되었든 죽었는데 그것을 업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개미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법문이 있습니다.
수행부분에서 그것을 따지게 됩니다.
수행에서는 의식하지 않고도 잘못한 것을 문제삼습니다.
수행은 무의식적인 것까지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업은 의식적인 것, 일단 의도적인 것만을 문제삼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자신이 의식하면서 한 행위에 대해서만 업이라는 말을 쓰게 되고, 선한 업이니 악한 업이니 하는 말을 붙입니다.
경전에 보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중에 첫째가 망언,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것, 거짓말인 줄 '알면서' 하는 거짓말, 이것이 악업을 구성하는 요건입니다. 모르고 한 일, 실수로 하는 일은 일단 업의 차원에서는 제외시키는 것이죠.
우선 내가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됩니다.
즉 육근의 행위 중에서도 의지적인 행위,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가 존재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업을 일으키는 것인가?
업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행동이며 움직임이라고 했지요.
움직임은 돈도 들고 힘도 들고 에너지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움직이고 행동했거든요. 업을 지었거든요.
그렇다면 왜 행동했을까요?
가령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부처님 이야기를 저와 나누는 것도 여러분들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로서의 업이 왜 일어났느냐,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목적을 "편함을 추구하여 업을 짓는다"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굳이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밥을 먹기 위해 움직이고, 밥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죠.
이렇게 움직이고 업을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죠.
이 편안함이라는 말을 좀더 교학적으로 분석하면 "아집의 존속을 위하여 업을 일으킨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행복을 추구하여 업을 일으킨다" 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이라는 것을 규정할 때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편안함을 추구하는 행동', 또는 '편안함을 추구하여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업의 근본적인 이해를 풀어가다 보니 본래 가졌던 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셨을 줄 압니다.
즉 업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나고 부정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된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식별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원리나 권능의 뉘앙스 속에서 업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그것을 업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국 이것이 고타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입니다.
출처 : 연등사(연등 학생회 출신)
글쓴이 : 3기김정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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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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