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인과보(業因果報)란 윤회의 이치 알면 참생명 얻어 *
우리는 불교를 믿으면서도 불교의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업보윤회의 이치를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죽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행동을 하되 흑업(黑業)을 짓지 말고 백업(白業)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흑업이란 번뇌로 휘둘리어 온갖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고, 백업이란 자기의 본성을 밝게 알아 선행을 쌓는 것입니다. 이러한 업의 내용들은 우선 의도적인 행위가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단 의도되지 않는 업은 금생이나 내생, 또는 내후생에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업의 활동은 우리의 신체와 관련된 세 가지 작용을 말합니다.
이것이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입니다. 이 세 가지 업을 빼 놓고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은 업은 결국 그냥 사라지지 않고 그 과보를 낳습니다. 이는 어떤 밭에 종자를 심었으면 반드시 씨가 발아하여 그에 상응한 열매를 가져다주는 이치입니다. 이를 바로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인과법칙(因果法則)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생(前生)에 지어 금생(今生)에 받는 업, 금생에 지어 금생과 내생(來生), 내후생에 받는 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운명적으로 현실에 부딪쳤다고 생각되는 것도 나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즉,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종일 일하고 있는 일도 앞으로 받지 않으면 안될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 행동하나 생각하나라도 각별히 유의해서 해야하겠습니다. 만약 생각을 하나 잘못하면 그만 나중에 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들이 허다하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가 다만 현실에 매몰되어 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그러한 경험들을 해 보신 경우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밭에 콩이 난 것을 보았다면 과거에 그 밭에 누군가가 콩을 심은 것이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현재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먹고 좋고 부드럽고 칭찬의 말을 하고 행복도 생각과 말에 부합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 좋은 과보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악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비방하면서 행동도 그렇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겠지요. 또 무슨 일을 하든 정성스런 마음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면 그 결과 정성과 노력에 부합된 내용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는 수행종교입니다. 여기서 '행(行)'이란 바로 업을 말하는 것이며, 업은 일상생활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修)'는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닦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것을 수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객진번뇌에 찌든 마음을 정화해서 본래의 청정무구한 마음을 회복하여 참된 삶을 지향해 가는 것입니다. 혹여 불교를 기복(祈福)적으로만 믿으면 절대로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데 복(福)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복(福)은 자칫하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탱자가시나무에 대한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집 마당에 탱자가시나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나무를 유자나 귤나무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농촌지도소에서는 분명히 그 탱자가시나무에 접을 붙여서 유자나 귤나무로 바꾸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귀찮아하면서 그냥 그런 나무가 없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또 토질과 기후 조건도 맞추어 주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과정은 제쳐두고 그 결과만을 기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점집이나 철학관에 찾아가 부적을 사서 탱자가시나무 밑에 묻어 두면 해결이 될까요. 이와 같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탱자가시나무는 유자나 귤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우리 마음 밭에 난 탱자가시나무는 부적이나 사주팔자에 의존해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말과 행동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 하나 하나를 부처님 진리에 맞도록 고쳐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의 업인과보(業因果報)의 윤회에 따르면 과거의 업이 금생의 결과로 나타나고, 금생의 업이 내생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전생과 내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해 드렸듯이 추리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처구니없는 결과들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삼세(三世)에 걸친 업인과보(業因果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은 전생에 심어 놓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현대과학들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20세기 이후 현대과학에서 전생과 내생에 대한 문제가 밝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따라 현장을 확인하면 꼭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대 의과대학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 세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스티븐슨 박사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아 연구한 결과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례를 묶어 {전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들}이란 책을 펴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최면술을 걸어 현재에 깨어 있는 '나'는 놔두고 잠재의식에 암시를 주면 아무 논리와 윤리성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치 혼자서 잠을 자다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면술은 연역의 역행법으로 잠재의식 속에 나이를 거꾸로 돌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최면술사 '번슈타인'은 "세상사람 모두는 잠재의식 속에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며 한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40대의 미국 여인에게 최면을 걸어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가 말하는 것을 기록했는데, 그녀는 과거에 미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직접 현장을 확인해본 결과 그녀의 말과 95%가 맞아 떨어졌는데, 나머지 5%는 세월이 흘러 과거에 있던 것이 없어지고 현대의 새로운 것과 교체된 사항들이었습니다.
번슈타인은 최면술로 전생을 밝히는 사례를 들어 {서치 오브 브라이드 머피}란 책을 썼는데 1967년 {사자와의 대화}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본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전생을 47번이나 겪은 사람의 얘기도 나오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또 초심리학 분야인 심령과학에서는 그 사람 내면의 건강상태나, 굳게 닫혀진 금고 속에 돈이 얼마가 들었는지 알 수 있는 투시법으로 전생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에드가 케이시는 투시법으로 사람에게 현재 나타난 문제에 대한 원인을 전생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가 투시법으로 사람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총 2만 건 중에 2500건이 전생과 금생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선천적으로 귀머거리인 사람이 찾아와 원인을 묻자, 에드가 케이시는 "당신은 전생에 로마제국의 귀족이었는데, 거지들이 구걸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금생에 귀머거리가 된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또 미국의 의학·철학 박사인 데이몬드 무드 박사는 뇌사와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로 죽은 사람이 분명한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몸뚱이가 죽어도 영혼을 가지고 다니는 '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짓고 있는 업에 의해 전생과 금생 내생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남이 내게 무언가를 해주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탐욕은 끝이 없어 채울 수 없으니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같이 탐욕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신앙하는 목적은 업보윤회를 벗어나는,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생사해탈'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과 함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부처님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나무극락정토아미타불'의 '나무(南無)'는 '참 생명으로 돌아가자'란 뜻입니다. '극락정토(極樂淨土)'는 한량없는 지혜와 생명으로 사는 곳을 뜻하고, '아미타(阿彌陀)'는 한량없다는 의미의 음사어이고, '불(佛)'은 붓다의 줄임 말로 우리보다 먼저 성불(成佛)한 분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불할 대에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는 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참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바른 법을 배워 업인과보(業因果報)의 윤회를 알고 하루하루 나의 업을 닦아 가는 것이 나의 참다운 생명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한탑스님 글을 인용 보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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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공덕총림 덕림회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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