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內)행동과 외(外)행동
부처님 당시에 공존했던 유신론적인 종교인 브라마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고, 운명론적인 종교인 자이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습니다.
브라마니즘과 자이니즘에서는 업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몰라도 불교, 즉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은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업입니다. 카르마죠. 그런 정도예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편안함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면 그게 다 업인 것입니다.
업이라는 말 별거 아니죠. 간단하죠. 다시 한번 업이라는 말을 정리해 볼까요.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
그렇다면 업을 이해하는 마지막 측면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키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몸 옆에 뜨거운 불이 떨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불편해지겠죠.
불편해지면 편안하고자 하는 행위, 소위 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내 옆에서 뜨거운 불이 타고 있을 때 편하고자 내가 일으킬 수 있는 행위의 방향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첫째, 내 옆에서 불이 활활 타는 것을 느끼면 우선 스스로 몸을 움츠립니다.
내 몸이 긴장하게 됩니다.
위험이 다가왔다든지 자신의 행복이나 편안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다가오면 사람은 긴장을 하죠.
그런 뒤 불을 끄기 위해 물을 갖고 온다든지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위험이 다가왔을 때 우선 자신을 움츠리거나 긴장하는 이런 행위, 이것 역시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는 행위이고 육근이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그 방향이 바깥을 향하지 않고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행동의 방향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행위를 내행동이라고 합니다.
둘째,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가져온다든지 또는 타오르는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자기 바깥을 향하는 행동이겠죠.
이런 행동은 외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업은 외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내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내행동까지 업이라고는 안합니다.
내 속으로 행위가 들어가고 있는 부분은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깥을 향하는 것,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는 내행동, 육근이 편하고자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내행동은 뭐라고 부를까요?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있어야겠죠.
수행은 내행동과 외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목적이 업하고 다릅니다.
부처님 당시에 공존했던 유신론적인 종교인 브라마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고, 운명론적인 종교인 자이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습니다.
브라마니즘과 자이니즘에서는 업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몰라도 불교, 즉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은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업입니다. 카르마죠. 그런 정도예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편안함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면 그게 다 업인 것입니다.
업이라는 말 별거 아니죠. 간단하죠. 다시 한번 업이라는 말을 정리해 볼까요.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
그렇다면 업을 이해하는 마지막 측면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키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몸 옆에 뜨거운 불이 떨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불편해지겠죠.
불편해지면 편안하고자 하는 행위, 소위 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내 옆에서 뜨거운 불이 타고 있을 때 편하고자 내가 일으킬 수 있는 행위의 방향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첫째, 내 옆에서 불이 활활 타는 것을 느끼면 우선 스스로 몸을 움츠립니다.
내 몸이 긴장하게 됩니다.
위험이 다가왔다든지 자신의 행복이나 편안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다가오면 사람은 긴장을 하죠.
그런 뒤 불을 끄기 위해 물을 갖고 온다든지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위험이 다가왔을 때 우선 자신을 움츠리거나 긴장하는 이런 행위, 이것 역시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는 행위이고 육근이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그 방향이 바깥을 향하지 않고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행동의 방향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행위를 내행동이라고 합니다.
둘째,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가져온다든지 또는 타오르는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자기 바깥을 향하는 행동이겠죠.
이런 행동은 외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업은 외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내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내행동까지 업이라고는 안합니다.
내 속으로 행위가 들어가고 있는 부분은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깥을 향하는 것,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는 내행동, 육근이 편하고자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내행동은 뭐라고 부를까요?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있어야겠죠.
수행은 내행동과 외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목적이 업하고 다릅니다.
출처 : 연등사(연등 학생회 출신)
글쓴이 : 3기김정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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