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업과 윤회란 무엇인가?-5. 업(業)과 행(行)과 수행의 차이

장백산-1 2011. 7. 27. 02:41
5. 업(業)과 행(行)과 수행의 차이

업은 아집의 유지를 위하여 일으키는 행동이 업이죠.
그에 비하여 수행은 아집을 없애기 위하여 일으키는 행동이 수행이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내가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행동 중에서 바깥을 향하여 일으킨 외행동, 그것을 업이라고 한다면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행동 중에서 내행동은 불교경전에서는 그냥 행(行)이라고 부릅니다.
색수상행식, 이런 말 들어보셨죠?
행이라는 말은 이때의 행이라고 합니다.
'상스카라(samskar?)'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바로 내행동을 뜻하는 말예요.
또 우리가 십이연기(十二緣起)에 가면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때 행이라는 말은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행동 중에서 내행동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았던 업을 정리해 보면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외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업이라는 말의 정의가 딱 떨어집니다.
고타마 부처님께서 살아서 이곳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가르치신 업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말뜻으로 하자면 행동, 움직임이요, 주체로 하자면 육근이요, 전제로 하자면 의지적이요, 목적으로 하자면 편하고자 일으키는 행동이요, 끝으로 방향으로 하자면 외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외행동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세요.
저는 자신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선재 선재라, 맞다, 훌륭하다." 그렇게 인가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에 우리가 업이라고 생각했던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랄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딱딱한 실체랄지 그런 것하고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셨을 줄 압니다.

업은 외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안(內)이라고 본다면 내 바깥(外)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말 대신 육근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육근 밖에 존재하는 것을 뭐라고 이름했을까요?
내 바깥에 있는 것은 무조건 육경(六境)이라고 부릅니다.
육경이라는 말은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울 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는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하는 것은 육근과 육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근은 단수이고 육경은 복수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존재하는 것, 즉 보면서 존재하고 들으면서 존재하는 것은 자기뿐이라는 거죠.
그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나머지는 어떻습니까?
나에게 보이면서 존재하는 것은 색, 들리면서 존재하는 것은 소리, 냄새 맡아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향, 맛으로 보여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맛, 느껴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촉감, 그들이 종합되어서 존재되는 것은 법이겠죠.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육경이고, 나는 육근입니다.
부처님은 나와 남으로 나누지 않고 육근과 육경으로 재편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이 일으킨 행위가 업이고, 그 육근이 행동을 일으킨 방향이 바깥, 즉 육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육근이 바깥에 있는 육경한테 업을 일으키면서 그 업은 어디를 향하여 날아가겠습니까?
육경을 향하여 날아가겠죠.
그러면 그 업을 받은 육경은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안보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기 아름다운 꽃이 꽃병에 있다고 할 때 "꽃이 참 예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꽃은 육경이고 제 입장에서 보면 육근이 행동을 한 것이죠.
만약 제가 이 꽃병을 밀면 꽃병은 밀리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욕을 하면 여러분도 맞받아 욕을 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이렇게 육근이 업을 짓게 되면 육경은 반드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육경이 보이는 반응을 불교에서는 보(報)라고 부릅니다.
육근이 일으킨 활동이나 행동은 업, 그것을 받은 육경이 보이는 반응은 보.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보(業報)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을 할 때도 자와 비가 합쳐서 이뤄진 말로 이해했던 것처럼 업보 역시 업이라는 말과 보라는 의미를 떼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업이라는 말 따로 보라는 말을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즉 육근이 일으킨 의지적 행동은 업이고 그것에 대하여 육경이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업과 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업보라는 말을 공부한 셈입니다.




출처 : 연등사(연등 학생회 출신)
글쓴이 : 3기김정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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