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예수의 가르침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 윤회와 환생은 정식으로 인정되던 교회신학의 일부였다. 서기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와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약 400년간 환생(還生)설은 보편적인 가르침의 일부였다.
그러나 종교와 권력이 결탁하면서,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르치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고,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었다. 황제는 동로마의 승정 159명을 초대하고 서로마로부터는 6명의 승정만을 초대해 공의회를 열었고, 당시의 교황은 동서 로마가 같은 수의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면서도 공의회에 불참한 뒤 그 회의에서 결정된 윤회설의 이단 규정과 오리게네스의 파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면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환생설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注1]
그러나 환생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이단으로 몰렸던 교파들의 신앙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잠깐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가 곧 잊혀진 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운동으로 이어지며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지학자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연구하여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과 조화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의 성직자들 중에도 초기 기독교의 성인들처럼 윤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벨기에 가톨릭 교구의 메르시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윤회사상을 믿지는 않지만 윤회론이 가톨릭교회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했고, 영국 런던 성바울교회의 잉그 감독은 "윤회론과 근대 감리교 교리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말했으며, 감리교 목사인 레슬리 웨더헤드도 윤회론의 지지자였다.
서양의 대표적 지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윤회론을 믿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던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고대에는 그리스의 플라톤, 피타고라스, 플루타크 등과 로마의 대문호였던 버질, 에니우스를 비롯해 근세에는 쇼펜하우어, 헤겔, 볼테르, 에머슨, 발자크, 위고, 베토벤, 나폴레옹, 톨스토이, 블레이크, 브라우닝, 휘트먼, 벤저민 프랭클린, 헨리 포드 등이 윤회론을 믿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 김영우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중에서 ]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거대해진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황제이다"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는 진리를 왜곡한 대죄인이다.
예수도 그 자신의 진리가 오늘날 이토록 왜곡된 데 대해 통탄하고 있지 않을까?
비록 Bible의 내용 중 윤회, 전생에 관련된 구절을 다 삭제했다고 했으나 둘로스 데우·C(본명:천수남)의 저서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를 보면 아직도 삭제되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둘로스 데우·C는 그 자신이 기독교 보수신학을 나온 목회자라서 다른 목사들의 분노가 거셀 것이라 염려하면서도 하나님을 거룩한 진리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로 인하여 오염되거나 하나님의 참뜻이 왜곡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글을 썼다고 머리글에서 그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내용을 한 번 살펴 보자.
《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후세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과 내생이 있다는 것은 의심 없이 믿고 있으나 전생이 있다는 것은 모두 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만사에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뿌리 없는 나무도 없듯이 전생이 있기 때문에 가는 곳이 있는 것이며 전생이 있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외면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회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전생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보라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장 5~6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태복음 11장 13절~15절 ]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깨달았다[마태 17:11~14]
상기 말라기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너희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리라한 즉,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엘리야 선지자가 요한의 몸으로 이미 너희 앞에 와 있다는 말씀이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못 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이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 11절~19절]
욥에게 시험과 고난이 닥치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몹시 후회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장면이다.
욥은 어미의 태에서 죽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나왔다 해도 자기가 어미의 젖을 빨지 않았더라면(죽었다면) 지금 전생에서 평안히 누워자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 곳에 있는 임금들과 의사들과 편히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욥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와 같이 혹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 빛도 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욥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곳은 악한 자들의 소요도 없고 곤비한 자도 평강을 얻으며 갇힌 자도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동일하며 종들도 상전에게 자유스러운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 1장 4절~5절]
상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아를 복중에 짓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 중에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은 이미 예레미아의 생명이 잉태된 후이기 때문에 현생이라 할 수 있으나 어미의 복중에 짓기 전은 예레미야의 생명이 어미의 뱃 속에 잉태되지 전을 말하기 때문에 분명히 전생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함은 사람의 몸에 씨가 잉태하기 전이라는 말로서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뱃 속에 생명이 잉태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전생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으며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열방 중에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1장 4절, 9절 ~ 11절]
상기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전생과 윤회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윤회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돌고 있는데 이 세상을 떠났던 영혼이 다시 오는 것이며 다시 온 영혼이 떠나가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헌 옷을 갈아 입듯이 전생에 존재하고 있던 영혼이 몸만 바꿔 입고 이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는 영혼이 내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새 것이 하나도 없으며 이미 이전 세대, 즉 전생에 있던 것들이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현생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다시 장래에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8:56~58]
엘리야(요한)같은 선지자도 영혼의 완성을 위해 환생해 오는 마당에 우리같은 범부가 단 한 번의 삶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교만함과 더불어 영적세계를 전혀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닌가?
석가모니도 여러 번 환생한 끝에 부처가 된 마당에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영혼이 어떻게 단 1회의 경험만으로 완전해질 수 있겠는가?
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주고서 그 시기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구원이 되고 안 믿은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보낸다는 게 합리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면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믿음의 기회조차 접하지 못한 채 훌륭한 삶을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다 지옥에 가 있단 말인가? 만약 인간에게 전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자마다 부귀빈천의 운명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평생 고난 속에 사는 사람들은 '욥'처럼 하느님이 시험해서인가? 》 [ 둘로스 데우·C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중에서]
※출처: [바이블의 진실] http://xbible.glad.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