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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뢰야식을 통하여 살펴본 천도재의 의미

장백산-1 2011. 7. 27. 04:07

아뢰야식을 통하여 살펴본 천도재의 의미

應用佛敎

2006/02/18 03:38

아뢰야식을 통하여 살펴본 천도재의 의미
            

 

       무주 스님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중음신이 존재하는가
둘째, 천도재는 왜 해야만 하는가이다.


본 논문은 중음신의 존재를 유식의 제8아뢰야식을 통하여 전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을 업종자인 중음신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인 종자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첫 번째의 연구목적은 만약 중음신이 없다면 업과 윤회를 인정할 수 있을까? 중음신이나 업의 과보를 받은 식들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 자나 몸을 바꾼 자 모두 갖가지 고(苦)를 받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연구목적은 만약 중음신이 있다면 망자(亡者)를 위하여 인연 있는 유가족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가 울면 먹을 것을 주듯이 이들 중음신이나 과보를 받은 식들이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에게 고통을 주어 일깨우고자 하나 알지 못하므로 천도(薦度)를 통하여 서로서로 깨우쳐서 밝은 지혜의 문으로 향하게 하고자 함이다.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처럼 우리들은 빙산의 일각만 보고 이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 이 논문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의 핵심문제의 의문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2.  연구의 자료 및 방법
 

아뢰야식을 통하여 살펴본 천도재의 의미 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음신과 천도재의 관계를 말로 설명하기는 쉬운 것 같았지만 문자로 표현된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은 단행본으로 이만 교수의 『유식학 개론』(서울:민족사, 1999)을 토대로 하여, 오형근의 『유식과 심식사상 연구』(서울:불교사상사), 다케무라 마키오 저, 정승석 번역의 『유식의 구조』(서울;민족사, 1995), 다카사키 지키도 저, 이지수 번역의 『유식입문』(서울 ; 시공사, 1997) 등을 참고했다.


그리고 중음신과 천도문제에서는 오형근의 『심령과 윤회의 세계』(서울: 홍문인쇄소, 1979), 『불교의 영혼과 윤회관』(서울:새터, 1978), 일타 스님의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서울:효림, 1999), 백용성 스님의 『각해일륜』(서울:재단법인 대각회, 1997), 지나 서미나라 저, 조의래 번역의 『윤회의 비밀 Ⅰ, Ⅱ』(합천:장경각, 1996) 외에도 윤호진 스님의 『아 윤회문제의 연구』(서울;민족사, 1996) 등을 참고하였다.


연구방법을 6단계로 살펴보겠다.

 

첫째, 식의 종류와 발생과정을 살펴보고,
둘째, 아뢰야식의 성립과정과 존재여부를 알아보고, 셋째, 윤회의 주체인 중음신이 어떻게 몸을 받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넷째, 천도재란 무엇이며 왜 천도재를 해야 하는가의 당위성과 더불어 49재를 왜 해야만 하며 진정한 천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다섯째, 중관사상에서 바라본 12연기와 중음신과의 관계를 고찰해보고, 마지막으로 불교의식에 나타난 천도재의 순서와 내용을 알아보고 여법한 의식이 바로 천도의 첩경임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중음신의 존재여부와 천도재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Ⅱ. 본론

 

1. 유식이란?

 

유식(惟識 : vijnapti-matrata)은 단지 표상일 뿐이다. 즉, 마음에 비추어진 상을 말한다. 유식학파의 근본이념은 이 한마디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망령되이 분별된 자성은 착란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한 자성과 완성된 자성이 함께 따라간다. 유식학자인 안혜는  유식만이 있을 때 삼자성이 건립된다 고 말하고 있다.1)


인간은 심식(心識)과 4대2)로 이루어졌다. 4대의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등 오근(五根)으로 분류된다. 오근은 4대의 각각의 성품을 갖고 있다. 즉, 육체를 장엄하고 바르게 인도하며 양육한다는 도양(導養)의 뜻과, 보고 듣고 느끼는 등 감각을 나타내고 심성이 의지하는 기관(器官)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근(육체)은 정신의 안식처이자 의지처로서 마음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만약 어느 한편이 이상이 있으면 정상적인 인간의 구실을 하지 못하며 균형을 잃게 된다.3)
 


1) 유식에서 본 마음과 제경(諸經)에서 본 마음

 

『법구경』에서는,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럼, 이 마음에도 근(根)이 있을까? 이 마음의 의지처는 의근(意根)이다. 이 의근에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 식은 원래 소승불교에서 6식만으로 설명되어 오던 것을 대승불교에 와서 무착(無着)보살이 6식에다가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합쳐서 8종의 식을 주장했다. 그 후 여래장연기설에서는 제9식(암마라식)을 더 첨가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자성은 원래 선성이고 악하지 않으며 때묻지 않은 무구식(無垢識)이 흙 속에서 금덩어리가 변하지 않은 바와 같이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성품을 따로 정하여 인간에게 마음의 체성이 9종이 있다고 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 3종으로 나누었다. 심은 아뢰야식이라 하였고 의(意)를 말나식이라 하였으며 식을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의식의 6식(vijnana)으로 보았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은 물론이고 체성도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심 의 식을 8종으로 분류하여 그 작용을 각각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고 하고 있다.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짓는 바라면 이 마음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 것일까? 『화엄경』 「십무진장품」4) 『원각경』 「보안보살장」5)에 잘 나타나 있다.


전도된 마음으로 인하여 환(幻)과 같은 작용을 일으켜서 정계(淨戒)를 훼범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심(身心)이 환과 같고 공화와 같음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고 멀리 여의어서 허공과 같이 맑고 걸림 없어야만 진실법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 전5식과 제6식

유식(唯識)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은 『해심밀경』 「분별유가품」에서 미륵보살과 부처님의 대화에 등장한다. 이러한 식을 반야공 사상인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의 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해심밀경』에서는 이러한 식의 존재를 궁극적으로는 부정한다. 왜냐하면 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세속제의 영역에서 심의식(心意識)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인 승의제의 영역에서는 식이 부정되어진다.


유가행파는 아비달마파가 주장한 6식에다가 이들 식을 일으키는 근원식(종자식)인 아뢰야식을 발견했다. 또한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말라식을 상정하여 8가지 식을 주장한다.


우선 전5식과 제6식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먼저 안식(眼識)은 안구에 해당하는 안근(眼根)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 식이라는 말은 그 마음의 내용이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으로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의 뜻이 있다. 요별과 분별의 뜻은 모든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물질을 이루는 본 바탕(自相)을 진실성 그대로, 집착이 없는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염성(染性)을 띠고 인식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행하여 마음을 닦으면 무엇이나 올바로 볼 수 있는 지혜로 전환한다. 이와 같이 안식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 빛깔과 물질(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며 작용하는 마음이다.

 

이식(耳識)은 귀에 해당하는 이근(耳根)에 의지하여 소리를 대상(聲境)으로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 등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비식(鼻識)은 코에 해당하는 비근(鼻根)에 의지하여 향기, 냄새 등을 대상(香境)으로 하여 식별하고, 설식(舌識)은 혀에 해당하는 설근(舌根)에 의지하여 미각(味境) 등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마음이다. 신식(身識)은 몸에 해당하는 신근(身根)에 의지하여 온갖 촉감(觸境)을 식별하는 정신의 작용을 가진다.

 

이상의 5식이 각기 대상을 식별하는 작용을 가지는 바와 같이 그 체성도 각각 다르다. 이들 5식은 우리 육체의 오근(五根)을 통하여 외부의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 모든 것을 감수(感受)할 수 있으나 최종적으로 가부간의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미약한 기능만을 갖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생활에서 결정을 내리고 사유하며 실천을 결정하는 정신능력 제6의식에서 도맡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은 안식 등 전5식(前五識)이 위에서 말한 전5경(前五境)의 대상을 식별하고자 할 때도 반드시 참여하여 그 대상이 지닌 내용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업력을 조성한다.6) 제6의식(儀式)이란 범어 mano-vijnana의 번역이다. 의(意)에 의지하는 식(識)이라는 뜻이다. 제6식이라고도 한다. 즉, 의근(意根)을 의지처로 삼아 일어나며, 법경(法境)을 소연(所緣)으로 삼아 올바르게 법경의 일체 모습을 요별(了別)하는 식이다.

 

6식은 의근에 함께 의지해서 일어나며, 본체는 동일하나 뜻이 다른 동일한 심왕(心王)에 불과하다. 그러나 5식에는 별도로 안이비설신의 오근(五根)의 의지처가 있으나 의식에는 별도의 의지처가 없기 때문에 오근 전체에 통하는 의근을 의지처로 삼게 된다. 18계에선 별도로 이것을 세워 의식계라 하지만 오온 십이처에선 전5식과 합해 식온과 의처에 섭수한다.

 

또한 의식은 자성 계탁(計度) 수념(隨念)의 세 가지 분별이 있고, 선 악 무기의 삼성, 욕계 색계 무색계 유루 무루 정산(定散)에 통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을 연(緣)으로 삼아 경계의 총상(總相)을 취하는 작용을 한다. 특히 자성 계탁 수념의 세 가지 분별 중에서 계탁분별은 오직 제6식에만 있는 것이다.7) 그리고 전5식과 관계없이 유형무형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며 밖의 대상이나 아니면 마음속의 모든 대상〔法境〕을 다 식별한다.

 

이들 대상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면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라 칭한다.8) 이들을 식별하는 제6의식의 별명을 보면, 의식이 전5식과 함께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를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객관계의 대상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내적인 무실체(無實體)의 명상(名相) 등을 대상으로 식별하며 작용할 때는 독산의식(獨散意識)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면을 취할 때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 한다. 또 의식에는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는 비량(比量)의 작용과 현재의 사실을 구별할 줄 아는 현량(現量)의 작용과 모든 것을 잘못 판단하는 비량(非量)의 작용 등 3량의 작용이 있다. 양(量)이라는 말은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식에는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의 작용이 있고, 완전한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선정(禪定)에 들어 맑고 깨끗한 정경(靜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이처럼 제6의식은 시간, 공간, 가법, 실법 등 어떠한 것도 장애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극수면, 기절, 무상천, 무상정, 멸진정 등 오위무심 때는 6식이 단절되어 제7식, 제8식만이 활동한다.


이상과 같이 제6의식은 그 활동이 우리 생활의 거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3) 제7말나식

제7말나식은 범어의 ?anas 라는 말을 음역한 이름인데, 이는 man의 manas 즉, 제7식의 사량(思量;주관심)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된다.


말나식은 우리 인간의 심성을 오염케 하는 데 핵심이 되는 마음이며 이를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이 식은 항상 모든 심식의 주체이며 우리 인간의 근본이 되는 제8아뢰야식을 상대로 사량집착하여 진리의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오인하고 분별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제7말나식이나 나(我)라고 집착을 가질 아무런 까닭이 없는 무아의 진리를 망각함으로써 법집(法執:진리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법집은 모든 공(空)의 진리가 모든 것과 평등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망각한 것을 말하며, 아집은 아뢰야식의 당체〔見分〕에 대해서 나의 실체라고 집착〔我執〕한 악심(惡心)을 뜻한다.

 

이 악심으로 말미암아 지성(知性)을 지닌 인간의 마음은 일시에 암흑으로 변하여 무지의 업력을 낳으며 잘못된 행동으로 점차 혹독한 윤회생활을 시작한다. 이는 사자의 몸에서 벌레가 생겨서 도리어 사자를 못살게 하고, 쇠의 자체에서 녹이 나서 그 녹이 쇠 자체를 녹여 없애는 결과와 같다. 말하자면 진리를 배반하고 비진리의 길로 들어가서 온갖 업력을 쌓아 지옥과 아귀세계 등에서 고통의 과보를 쉴 사이 없이 받으며, 여기서 빠져나갈 겨를이 없이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9)


말나식은 아치 아만 아견 아애의 4가지 번뇌와 상응하고, 제8아뢰야식을 항상 심사(審思)하여  아?  아소 라 집착하는 성격이 있다. 아집은 근본이 되므로 염오의(染汚意)라 하며, 사량식 사량능변식이라 하는데 구역에선 집착식이라는 의미에서 아타나식이라고도 한다. 무시 이래 미세하게 상속하며 아(我)와 법(法)이 집착하여 마음을 은폐하고 성도를 장애하므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 한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말나식의 존재는 두 가지 교설과 여섯 가지 이론으로 증명된다(二敎六理). 두 가지 교설은 『입능가경』 권 9의  장식을 마음이라 하고 사량하는 성질을 의(意)라 하며 모든 경계의 대상을 능히 인식 요별하는 식이라 한다. 는 설과 『해탈경』의  염오는 항시 제혹(諸惑)과 함께 생멸한다 는 설을 가리킨다.


여섯 가지 이론은 다음과 같다.

 

① 불공무명증(不共無明證):제6식의 작용에는 늘 끊임이 있는데 범부는 불공무명이 끊임없이 상속되므로 말나식이 없으면 안 된다.
② 육이연증(六二緣證):전5식은 전5근을 소의로 삼고 전5경을 소연(所緣)으로 삼듯이 제6식도 소의처인 의근 즉, 말나식이 없으면 안 된다.
③ 의명증(意名證):말나 즉, 의라는 이름은 항심사량이므로 말나식이 상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④ 이정차별증(二定差別證):성자가 들어가는 멸진정과 외도가 들어가는 무상정에는 말나식이 있어야만 한다.
⑤ 무상유염증(無想有染證):무상정을 닦아서 얻은 무상천에는 제6의식이 없지만 아집이 있기 때문에 말나식이 있어야 한다.
⑥ 유정아불성증(有情我不成證):범부가 보시 등의 선행을 베풀어도 무루(無漏)가 되지 않고, 아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말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법상종은 말나식을 수행의 단계에 응용해서 말나식의 3위를 주장한다.10) 이처럼 말나식은 제8식의 견분을 연취하여 이를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의 실체라고 항심사량(恒審思量)하는 것이 특징이다. 항심사량에 대하여 전5식은 대상이 현전하지 않으면 취할 수 없기 때문에 항심성(恒審性)이 결여되었고 제6의식은 분별은 섬세하나 5위(位) 무심 때 단결하여 항상의 뜻이 결여되었고 제8식은 항상의 뜻은 있으나 살피는 것이 결여되었다. 오직 제7식만이 항심사량을 갖춘 것이다.

 

 

4) 제8아뢰야식
사찰에서 새벽예불시간에 발원하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11)의 구절처럼 무명중생이 나와 남을 집착하여 가지가지 업을 짓는 것은 주관의식인 제7식이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식의 의지처인 제8아뢰야식은 자연히 물들고 만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일으키는 망심은 한 파도가 만 파도를 일으키듯, 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된 아뢰야식은 그 자체도 망심이 되지만 모든 말단의 지말식(枝末識)까지도 오염케 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은 모든 식에 영향을 주고, 또 모든 식의 활동과 육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훈습한 공능(功能)과 인습을 저장하였다가 다시 정신과 육체가 활동하려 할 때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8아뢰야식(靜海)이란 alaya - vijnana = a(not, 無) +alaya(滅盡, 沒失) + vijnana(識), alaya(家, 藏 : 저장소) + vijnana(識)의 음사이다. 제8식의 소의처는 제7말나식이다. 소연경(所緣境:인식대상)을 말한다면 심종자와 오근(五根:有根身)과 기세계(현상계)이다.

 

만법생기의 근본 식이며 능히 색심 등 제법의 종자를 함장해서 유 무루의 일체만법으로 변현된다. 아뢰야라는 이름은 유루법이 현행하는 사이 즉, 아집이 있는 위치까지만 존재하지 아집이 발생하지 않는 성인위에 오르면 이 식의 이름은 없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다 각자의 아뢰야식으로부터 변현된 세계 가운데 머물러 살고 있다. 무명이 진여에 훈부되어 아뢰야식을 낳고, 이 아뢰야식에 의하여 만법이 생긴다.13) 제8아뢰야식을 자상(自相), 인상(因相), 과상(果相)의 세 가지로 논하기도 한다.

 

첫째, 자상(自相)은 제8식이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이를 아뢰야식이라 한다. 아뢰뢰야(賴耶)의 삼장의(三藏義)에는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이 있다.


능장(能藏)은 선, 악, 무기 등의 일체의 종자를 함장 보존한 것이므로 능장이라 하며, 소장(所藏)은 일체종자식이 함장할 바의 처소가 되는 것이며, 집장(執藏)은 제7말나식은 항상 제8식의 견분(見分)에 빗대어 그것이 자아의 실체라고 집착하나니, 제8식이 이와 같이 제7식에게 수동적으로 집장당하는 것이므로 이 때 제7식은 능집장, 제8식은 소집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8아뢰야식 즉, 장(藏)의 본의(本義)는 집장의이다. 왜냐하면 아집이 없는 성인위에서는 이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아뢰야식은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경지 등을 수행의 단계에 따라서 3가지로 구분한다.14) 셋째, 과상(果相)은 이숙(異熟)이라고도 한다.


아뢰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서 받는다는 의미에서 이숙이라 한다.15) 이숙(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아뢰야식이 중심이 되어 전생의 업력에 따라서 과보를 받는 것의 업과(業果)와 아뢰야식의 체성은 항상 유지, 상속되어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3계 6도 윤회의 주체가 된다는 부단(不斷) 그리고 욕계, 색계, 무색계 등 3계를 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서 과보를 받는다는 변삼계(遍三界)가 있다.

 

「기신론」에서는 삼계(三界)를 허위(虛僞)라고 했다.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니 마음을 여의면 곧 육추(六  )의 경계가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16)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매 찰나마다 멸하고 생하여 상속(相續)해 가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아뢰야식의 소멸은 수행을 통한 아라한위에서 소멸된다. 말나식도 아라한, 멸진정, 출세간도 등의 3가지 경지에서 없어진다. 이는 더러움을 제거하여 무구(無垢)의 상태로 나아가는 전식득지(轉識得智)를 말한다.

 

이상의 여섯 가지 식을 존재구조면에서 크게 전식과 근본식으로 나누기도 한다.


전식(轉識)은 아뢰야식의 등류습기에서 전변생기된 식으로서 전5식, 제6식, 제7식이 이에 해당된다. 근본식은 아뢰야식이다. 이 식은 끊임없이 심층에서 활동한다. 이 두 식인 전식과 근본식은 상호인과관계이다.


아뢰야식의 등류습기에서 전변생기된 전식의 인식활동이(종자생현행) 업습기의 형태로 다시 아뢰야식에 이식되며(현행훈종자) 그 종자가 아뢰야식 속에서 찰나생멸하면서 점차 성장된다(종자생종자). 이러한 방식으로 전식과 근본식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으며 유기적인 순환을 유지한다.


이처럼 유식에서 식을 8가지로 나누어서 주장하는 근본이유는 식이 찰나멸함을 앎으로써 아공(我空)을 깨닫고 제8식과 7가지 식이 전식하면서 종자와 훈습이라는 상호매개의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그 어느 쪽에서나 실체성이 없는 법공(法空)을 깨닫게 함이다. 바로 아법이공(我法二空)을 깨기 위함이다. 또한 번뇌장과 소지장을 없애어 보리를 얻게 함이다.

 

그러나 현상계가 있는 한 제8아뢰야식은 항전여폭류(恒轉如瀑流)하여 계속된다. 또한 중생이 있는 한 4종번뇌는 계속되며 업(業)을 짓는다. 업을 짓는 한 제7말나식을 유복시킨다. 그러므로 제7식 가는 데 제8식은 꼭 간다. 왜냐하면 제7식의 상분(相分)은 제8식의 견분(見分)에 빗대어서 항심사량하기 때문이다.
유식은 궁극에는 무아(無我) 무상(無常)을 철저히 체득하여 반야의 공(空)을 깨달아 구경위에 도달함을 지향한다. 이러한 사람이 짓는 업식이나 종자식은 사라진다고 한다.


이상으로 유식의 8식을 살펴보았다. 그럼 왜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인 중음신으로 보는지를 다음 장에서 조사해 보겠다.


 

2. 식의 발생과정

 

용성 조사의 『각해일륜』에서는 식(識)의 발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저 참 마음 성품의 자체가 모든 형상이 없어 지혜와 앎이 없되 자체를 지키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루나니 이로써 생멸이 없는 본원성(本源性)이 생멸을 일으키나니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이 화합하여 오로지 생멸도 아니고, 오로지 불생멸도 아닌 것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며, 불각(不覺)이라고도 하며, 근본무명이라고도 하며 제8식이라고도 하나니 이것은 자체가 맑아 허공과 같고 크기는 본원성과 비등하다.

 

이것이 세 가지 극히 미세한 형상을 내니 이것은 형상이 없는(無形的) 식상(識相)이다. 하나인 진성(眞性)을 깨닫기까지는 본분을 지키지 못하는 까닭에 식랑(識浪)의 파도가 일어나서 미세한 생각이 되는 것이니 극히 미세한 생각을 업상(業相)이라 하고, 이 미세히 일어나는 생각의 업상으로 말미암아 능히 미세히 보는 것의 상(相)이 있는 까닭에 이것을 전상(轉相)이라고 하나니 어찌함인가? 아뢰야식에서 미세히 생각이 나는 까닭에 능히 보는 모양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능히 보는 모양으로 전변(轉變)된 것이므로 전상(轉相)이라 하고 능히 보아서 비추는 체가 독립된 까닭으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은 능히 보는 자의 경계이나 안으로 육근의 몸과 밖으로 세계 만물이 망령되이 나타나는 고로 이를 현상(現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것을 이름하여 삼세상(三細相)이라고 한다. 이 삼세상에 의지하여 여섯 가지 머트러운 모양이 일어나는 것이니 법이 자심(自心)으로부터 일어남을 알지 못하고 결정코 있음을 집착하는 까닭으로 법집(法執)이라 한다.

 

이 가운데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첫째는 지상(智相)이라 하는데 지상은 곧 지혜라는 말이다. 지혜로써, 모든 법이 결정코 있으매 견고히 집착하는 것이니 이 몸이 있음으로부터 마칠 때까지 법에 집착하여 버리지 아니하므로 이를 법집구생혹(法執俱生惑)이라고 한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라고 하는데 법에 집착하여 항상 분별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지상과 상속상이라 한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법에 견고히 집착하므로 자타가 다름을 보고 자기를 헤아려 나에 집착하는 것인데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것에 집착하여 몸이 있은 후로부터 마치기까지 아상에 집착하여 버리지 아니하니 이것을 아집구생혹(我執俱生惑)17)이라 한다. 둘째는 명자상(名字相)을 헤아리는 것이니 아상에 집착하여 분별에 집착하니 종신토록 변하지 아니하므로 이를 아집분별혹(我執分別惑)18)이라 한다.


하나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상에 집착하므로 증애취사심(憎愛取捨心)이 나며 탐진치가 치성하여 업을 지으므로 선악 등 모든 업보를 받는다. 위에서 기록한 지상과 상속상과 집취상 그리고 계명자상과 조업(起業相)과 수보(業繫苦相) 등을 합하면 여섯 가지가 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삼세육추(三細六 )라 하여 불각(不覺)으로 더불어 상응(相應)한다.19)

 

 

3. 아뢰야식의 성립과정


1) 아뢰야식의 성립과정
그럼 아뢰야식이 성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A. D 4세기경(佛滅後 900년경)에 부파의 심식설(心識說)과 용수(龍樹)보살의 공(空)사상이 성행하였으며 이 때에 무착 보살이 탄생하게 된다. 무착은 세친 논사의 친형이다. 그는 불교에 허다한 인과설과 연기설이 있지만 윤회의 주체가 명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도대체 생과 사를 받게 하는 윤회의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착 보살은 교리에 대한 불만족을 표하다가 당시에 성행하던 미륵불을 신앙하게 되었다. 이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문제삼았던 진리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다행히도 그는 미륵 보살을 능히 친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가 미륵님을 친견하고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도솔천에까지 올라가서 아뢰야식 사상을 배웠다고 한다.

 

그 후 무착 보살은 대승과 소승의 사상을 모두 종합하여 인과설과 연기설에서 윤회의 주체를 해결하지 못하였던 난점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아뢰야식 사상이다. 그러니까 소승에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식만을 주장하였던 것을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더 보완하여 8식을 주장한 것이다. 제7말나식은 중생의 근본 번뇌(죄업)인 무명(無明)의 근원을 파악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고, 제8아뢰야식은 인과와 윤회의 주체로서 현세와 내세까지도 영원히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생명체를 파악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학설이다. 이들 심식설의 근원지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그리고 「섭대승론(攝大乘論)」등 여러 경론에 나타나 있다.20) 「대승기신론」에서는 제8식을 아리야식(阿梨耶識)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

아뢰야식이 왜 윤회의 주체인가?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아뢰야식을 생시와 사후의 주체로서 또는 인과와 연기의 주체로서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가 8종이 있다고 한다. 「유가지론」의 섭결택분(攝決擇分)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체와 사후 문제를 여덟 가지 문제와 다섯 종류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 등으로 우리 인간의 생과 사의 문제를 명확히 해주고 있다. 또 오직 아뢰야식만이 생시와 사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고증하고 있다.


그러면 8종의 문제와 5종의 전생설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① 만약 인간에게 아뢰야식이 없다면 의지(依止)와 집수(執受)가 불가능한 것이다(若雛阿賴耶識 依止 執受不應道理).21)

 

②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무엇이 주체가 되어 금생에 태어날 때 최초의 생명체로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또 아뢰야식이 없다면 최초에 태어나는 과보체의 이론을 구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하여 아뢰야식만이 전생의 모든 업의 종자를 보존하고 과보(果報)로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若雛阿賴耶識 最初生起不應道理).

③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안식 등 모든 식의 작용을 유지시킬 수 없고, 그 중에서도 의식 등이 과거의 일을 계획하며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고 또 이와 같은 내심을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이상과 같은 것이 가능한 것은 아뢰야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④ 만약 영원한 아뢰야식이 없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6식의 체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정신적인 혼잡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6식은 꾸준하지 못하고 그 체성이 단절됨이 많아서 영원한 생명체의 구실을 할 수 없다. 6식은 또 평소에 선행과 악행 등 여러 행동으로 미래의 인과응보를 초래할 원인(原因種子)을 찰나찰나 훈습할 수 없다. 그리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종자가 혼성하여 인과의 도리가 문란해지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구애됨이 없고 간단없이 상속시켜 주는 종자(因果)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과의 도리를 유지시켜 주고 정신 질서를 정립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마음의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⑤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중생 각자가 의지하여 사는 기세간(器世間)의 업과 정신적으로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아업(我業)과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업(境業)과 마음이 육체에 의지하고 육체의 업이 되는 의업(依業) 등 4종의 업을 분별하여 설명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도리를 설명할 수 있고 생각과 기억 등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뢰야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⑥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인간이 생각하고 사는 사려(思慮)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도리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참선할 때 정(定)에 들어있거나 들어있지 않거나 등 여러 가지 작용을 영수(領受) 또는 보유할 수가 없다.

 

⑦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여러 수행인이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할 때 제6의식의 번뇌작용이 끊어진 무상정(無想定)과 제7말나식의 나쁜 오염성(汚染性)이 끊어진 멸진정(滅盡定) 등 최고의 선정에 도달했을 때 전5식(前五識)은 물론 제6의식마저 그 활동이 자주 정지되고 마는데, 이 때의 생명체는 무엇으로 대신하며 무엇이 유지시켜 주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나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에 그 선정의 경지에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이 육체에서 떠나지 않고 육체도 사신(死身)이 아니라 생신(生身)으로 정좌(定坐)한 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의 존재는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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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우리가 사망할 때 그 과정에서 상체(上體)나 혹은 하체(下體)로부터 차츰 숨져가며 점차 냉촉(冷觸)할 수도 없고 또는 평소의 의식도 일시에 단절되어 의식이 불명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망할 때에 수족 전체가 동시에 마비되어 시체로 변하거나 의식이 점차로 불명하게 되지 않고 극히 일부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서 전체로 번지며 정신상태도 점차 흐리거나 최후까지 남아 있게 되는 것은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졸도하였거나 의식불명, 그리고 사망할 때도 제6의식의 작용이 완전히 단절되어 사람을 몰라보거나 또는 눈을 감고도 아직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제8아뢰야식이 최후까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이 일정한 기간의 수명을 유지하고 체온을 유지하며 몸과 마음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아뢰야식이라는 존재가 인간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학문적 용어를 수난식증(壽煖識證)이라고 한다. 이 식이 중심이 되어 생명이 유지됨과 동시에 4식(四食)22)도 가능하다고 한다.

 

3) 아뢰야식의 존재 여부
아뢰야식이 존재하는가?

아비달마집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즉, 선행과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죽을 때는 하체가 먼저 차가워지고 냉촉(冷觸)해져서 머리 쪽으로 죽어 올라오며, 반대로 악행을 많이 한 사람은 죽을 때 육체의 상체가 먼저 냉촉을 일으키며 점차 하체로 내려가 숨을 거둔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를 보더라도 아뢰야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뢰야식만이 사후의 윤회 및 생명체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아뢰야식인 윤회의 주체가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중음신23)이 목숨을 마치는 순간 업력따라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다. 유정동물이 다 죽을 때에 이 육체는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받지 못하였을 때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을 중음신이라고 한다. 음(陰)이라고 하는 말은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이 묘명진성을 가리기 때문에 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합하여 중음신이라 한다.


악업이 중(重)한 자는 곧 악취로 가서 나고, 선업이 중(重)한 자는 선도에 가서 나며, 악과 선을 닦지 못한 자는 중음신의 보(報)를 받는 것이다.24)  그럼 중음신이 육도로 보를 받아 갈 때에는 어떻게 가는지 살펴보겠다.


중음신이 각기 업을 따라가니, 업력(業力)으로 천당(天堂)에 갈 자는 머리가 문득 위로 향하여 날아 올라가고, 방생(傍生)으로 가서 날 자는 중음신이 우마축생(牛馬畜生)과 같이 가로 누워가며, 지옥으로 가는 자는, 중음신의 머리가 거꾸러져서 아래로 향하여 가니 어떤 중음신이든지 다 신통이 있어 허공으로 향하여 마음대로 날아서 순식간에 천리 만리를 가는 것이다.25)


「비바사론」에서는 중음신은 대개 두 가지로 구분하나니 하나는 용모가 단정하고, 하나는 용모가 추악한 것이다. 지옥의 중음신은 느티나무(楡木)를 불에 사른 빛과 같고, 축생(畜生)의 중음신은 연기 빛과 같으며, 욕계의 중음신은 금빛과 같고, 색계(色界)의 모든 중음신은 빛이 선명하고 좋으며, 무색계(無色界)에는 중음신이 없고, 공(空)과 식(識)과 비상(非想) 비비상(非非想)에 머무른다.


또 육취의 중음신은 손과 발이 각기 둘이 되는 자도 있으며, 혹 사족(四足)을 가진 자도 있으며, 발이 많은 자도 있고 혹 발이 없는 자도 있으니 다 현세업력(現世業力)에 따라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내고, 축생은 축생의 생각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꿈 가운데에 행 주 좌 와(行住坐臥)함이 생시(生時)의 자기 몸과 다를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라고 한다.26)


「아비달마집론」과 용성 조사의 『각해일륜』을 통해서 보더라도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은 자로서 보면 나는 것이 꿈이요, 태어난 자가 보면 죽는 것이 꿈이니 삼계육도가 도시 몽환이다. - 용성

 

 

 

4. 윤회의 원리

우리의 아는 것(識)이 업력(業力)을 따라 변하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아는 것(識)은 눈과 귀와 코와 입도 없으되, 꿈 가운데에서도 보고 듣고 냄새도 맡으며, 맛도 보아 깨달아 알며, 내지 중음신(中陰身)이라도 보고 들으며, 냄새 맡고 맛을 보아 깨달아 아는 것이 분명하니, 십선(十善)을 닦는 자는 욕계육천(欲界六天)27)에 몸을 받아 태어나고(受生), 사선팔정(四禪八定)28)을 닦는 자는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29)에 몸을 받아 태어나며(受生), 사공정(四空定)30)을 닦는 자는 사공천(四空天)31)에 몸을 받아 태어나나니(受生), 아는 것(識)이 지은 바 업을 따라 윤회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이 윤회하는 과정에서 전생에서 금생의 인연 즉, 중유(中有)에서 생유(生有)로 태어나기 위한 조건은 아뢰야식(업종자)이 필수조건이다. 불교의 탄생설은 사유(四有)설32)에 있다. 그 중 중유(中有)에서 생유(生有)로 가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1) 중유(中有) → 생유(生有)

중유(中有)는 전생의 모든 업력(業力)을 지니고 금생에 출생하기 이전의 생명체이고, 생유(生有)는 그 중유(中有)의 생명체가 업력에 따라 부모에게 출생하는 찰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유와 생유는 윤회관(輪廻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불가분리(不可分離)한 관계에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면 전생의 몸을 벗어난 중유는 정업(淨業)과 부정업(不淨業)을 훈습(熏習)한 자체종자(自體種子)로 말미암아 중유의 이숙(異熟)이 간단(間斷)없이 득생(得生)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사후(死後)의 생명체인 중유는 즉시에 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7일 내지 7?일 동안 공간에 있게 되며 7?일 이전에는 거의 생처(生處)를 결정하게 된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본원각성에는 본래 중음신이 없다. 유정동물이 낱낱이 업혹의 습기가 맺혀서 중음신이 있게 되었다. 비유하면 강물이 본래 얼음이 아니건만은 날씨의 찬 기운으로 인하여 얼음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처럼 중음신은 업의 습기가 맺혀서 아뢰야식에 저장되면서 생기(生起)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음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부파불교의 논서 가운데 「아비달마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에  생사의 삶의 존재를 유정세간이라 말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세간의 삶을 기세간(器世間)이라 말한다. 태어나기 전의 삶을 선시유(先時有)라고 하며, 죽음 후의 삶은 사유(死有)라고 한다. 중간의 존재는 중유라고 한다. 이후 이어진 삶의 탄생을 생유라고 말한다.?3)라고 하였다.


중음신에 대해 자세히 다룬 유가행파의 논서에는 중음신에 대해 죽음을 맞이한 중생이 다음 생의 삶을 받기 위한 과도기적 몸으로 설하고 있다.

 

「유가사지론」 권1에는 중음신에 대해  무엇이 생(生)인가? 무간의 개아(個我)에 대한 애착의 결과로 생이 있는 것이며, 무시로부터 낙착과 희론에 의해 훈습된 것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거나 부정한 업이 원인이 되어 훈습되었기 때문인데, 생이 의지하는 몸은 이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증상력을 지닌다. 자신의 업의 종자가 중유에서 무간의 이숙(異熟)으로 인해 생을 받는다. 죽음은 생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고개를 아래로부터 위로 드는 순간의 시간과 같다. 중유는 반드시 모든 근을 갖추고 있는데, 악업을 지은 자가 가진 중유는 검은 양털빛이나 어두운 밤그늘의 빛이며, 선업을 지은 자의 중유는 흰옷의 빛깔이나 청명한 밤의 색과 같다.?4)라고 하였다.

 

또한 중유의 실체에 대해  중유는 다른 이름으로 건달바(乾   婆;gandha-rva)라고 하는데, 향을 자원으로 삼기 때문에 심향행(尋香行)이라 말한다. 또는 의행(意行;manomaya)이라 하는데, 의(意)에 의지해 삶의 처소를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당 중생의 몸이 머무는 곳으로 마음이 연하는 주처가 아니다.?5)라고 하여 중음신이 존재함을 설하고 있다.


앞에서  중음은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 사이의 시기로 영혼신을 말한다. 라고 했다. 이 기간은 49일이 통상이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49재 천도재 의식을 하기도 한다.


중유는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서 생활하는 윤회의 주체를 말하는 것으로 건달바(健達縛), 의행(意行), 취생(趣生) 등으로 나누어 호칭된다.36) 건달바(健達縛)는 향기를 찾아 자신(資身)한다는 뜻이며, 의행(意行)은 의(意)를 의지처로 하여 출생처에 왕생한다는 뜻이며, 취생(趣生)은 생유에 대한 명사로서 그 세간에 가서 출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중유의 별명에서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중유와 생유와는 각별한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아귀(餓鬼)와 방생(傍生)과 인간과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천중(天衆) 등 중동분(衆同分) 가운데 어떤 한 중생이 수생(受生)하고자 할 때 미래의 출생처에 자기와 동류이며 가의(可意)의 유정(有情)을 발견하면 그 유정에 대해서 원욕(願欲)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원욕(願欲)이 있을 때 즉시 그 생처(生處)에 달려가 출생하게 되며 동시에 그 과보(果報)의 구애(拘 애)를 받게 된다.37)
 
2) 전생의 업보 - 실례를 통하여
이상에서 인간이 죽으면 다음 생의 몸을 받을 때까지 중유(中有;중음신)의 단계가 있음을 알았다. 이 기간 동안 영혼은 과거에 지은 업력으로 유지되며 활동하게 된다고 한다. 이 과거의 업력은 우리 몸을 출생케 하는 생인(生因)이 되는 것이다.


용성 조사는 삼계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정(情)과 상(想)의 두 가지가 무겁고 가벼움으로 말미암아 선도와 악도가 달라지는 것이니, 이것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욕심과 음심에 관계가 많은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탁이 없으되 그 지은 바에 따라 청탁이 있게 된 것이다.

『밀린다 팡하』에서 나가세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업의 과보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나 서미나라가 지은 『윤회의 비밀』은 케이시의 초능력을 기록한 글이다. 케이시는 1923년부터 1945년 사망할 때까지 22년 동안 약 2천5백 건의 리딩을 한다. 자기최면 투시의 상태에서 환자의 육체적 병의 원인을 알아내든지, 삶의 희로애락은 전생의 카르마(業) 때문임을 밝힌다. 다음은 그 예이다.

 

① 대학교수인 소경은 페르시아 전쟁 당시 불에 달군 인두로 적의 눈을 지져버리는 풍습이 있는 야만인종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생에 눈이 먼 인과를 받은 것이다.

② 소아마비 미용사는 아틀란티스 시대 때 무슨 약을 써서 사람들의 다리를 약하게 만든 과보인 것이다.
③ 전생에 화학자였던 한 여성은 이생에 몸에 이상한 버러지 증상이 일어났다.38) 또 한 예는 어느 영화 프로듀서의 경우이다.


이 사람은 1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이 사람의 전생을 리딩한 케이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로마군인이었고, 투기장에 나서면 겁에 질려 떠는 사람이나 도전을 받고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굴복해 버리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런 행위 때문에 이 사람은 현생에서 패배자가 된 것이다. 현생에서 불구의 몸이 된 것은 내적 자아의 각성을 위해 그리고 영적인 힘의 개발을 위해 필요한 경험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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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기록못함


출처 : 불자모임광장
글쓴이 : 통달무아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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