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마음 법'(心法)은 <머무름이 없음>(無住)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요점은 곧
일체가 마음 뿐이요, 마음밖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어서,
특별히 따로 알아야 할 만한 법도 없고,
기억해 지녀야 할 법도 없으며, 설명을 할 법도 없고, 설명을 들어야 할 법도 없으니,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쓸지니라」고 하신 것 뿐입니다.
만법은 연생(緣生)이요, 연생은 무생(無生)이거늘,
상(相)에 헷갈린 범부가 연생법(緣生法) 가운데서 망령되이 생멸상(生滅相)을 봄으로써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이 세간상(世間相)을 실유(實有)로 오인하여 집착하게 된 것이니,
결국 꿈속에서 모든 게 있다고 하나, 꿈을 깨고 나면, 곧 성품을 밝히고 보면,
티끌 만한 한 법도 볼 것이 없는 게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따라서 미혹하건 깨닫건, 끊어지건 이어지건, 깨끗하건 물들건
이 모두가 오직 꿈속의 일일뿐임을 분명히 알아서,
도무지 간여(干與)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비출 수만 있다면, ···
이렇게 내내 무심히 비출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가 드러나는 첫 걸음이니,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내내 이렇게만 할 수 있으면 머지 않아
부동(不動)의 본래 마음이 우뚝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코 함부로 알음알이를 굴리면서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는 일은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 * *
모두들 꿈속에서 모든 것이 있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곧 성품을 밝히고 보면 티끌 만한 한 법도 볼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꿈속에 나타난 모든 것은
분명히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것임에 틀림 없는데,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엔
이것들이 모두 저 바깥에 있는 실체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분별하고 집착하고 갈등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모든 현전상(現前相)이 다 인연생기(因緣生起)이므로
무생(無生)이요 무상(無相)이며, 무성(無性)이요 무작(無作)임을 밝히니,
안으로는 <나>도 없고,
밖으로는 상대할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따라서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함을 알 것이요,
이것이 바로 모든 유위법(有爲法)이 다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말하는 근거인 겁니다.
따라서 짓는 때에 <짓는 자>도 <짓는 바>도 없나니,
사람도 법도 다 뺏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가운데 다시 무엇에 빙의(憑依)하여
선과 악, 죄와 복, 득과 실을 논하겠어요?
나아가서 있고 없음과, 삶과 죽음 등이 모두 세간에서의 빈 말일 뿐임을 밝히니,
마침내 이 우주(宇宙)가 몽땅 나의 거푸집일 뿐임을 아는 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한 생각으로 능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내고,
한 생각으로 능히 이것을 거둬서 공무(空無)로 돌릴 수 있는 게
모두가 중생심의 본래 갖춰진 성덕(性德)이거늘, 중생이 쓰는 마음이 너무 옹색할 뿐입니다.
* * *
일체 만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그렇고> <그렇지 않음>을 결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현전상(現前相)을 실유(實有)로 오인하여 이를 분별함으로써
생멸상(生滅相) 거래상(去來相) 유무상(有無相) 등을
마치 실제인 양 그 모습을 취하여 집착하는 게
무명의 근본인 겁니다.
그저 <있다>고 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만 알아서,
이것을 취하여 헛되이 지견(知見)을 세움으로써
의근(意根)에 무수한 법진(法塵)이 쌓이는 바람에
본래의 천진한 영성(靈性)을 등지고 돌보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정법을 만나서 이 모든 망정(妄情)을 제해야 하는 게 공부의 요체 이거늘,
다시금 이런 저런 지견을 얻어서 나름대로 기뻐하니, 참으로 어쩔 수가 없군요.
그래서 고인은 이르기를,
「바보들은 한번 보면 기뻐하지만, 지인(至人)은 한번 보면 한번 성을 낸다」고 한 거예요.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보살은 <없다>는 말을 들으면 <있음>만 보내는 게 아니고 <없음> 까지 마저 보냄으로써
<천진한 무의주(無依住)의 영성>을 어둡히지 않을 줄 안다는 사실 말입니다.
* * *
꿈인 줄 알았으면 그것이 이미 여읜 건데,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아요?
지금 있는 이대로의 일상이 모두 꿈과 같아서 실답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면,
휘둘리건 휘둘리지 않건 또 자재하건 자재하지 못하건 무슨 상관이에요?
요는, 연생(緣生)하는 만법이 자체성이 없어서,
안으로는 <나>도 없고 밖으로는 상대할 티끌 만한 한 법도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인연의 가화합(假和合)으로 있는 이 <나>와,
역시 인연화합으로 있는 밖의 모든 세간상(世間相)이
자체성이 없어서 꿈 같고 환(幻) 같은 것임에도,
미혹한 중생이 이 모든 것을 실유(實有)로 잘못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 미집(迷執)을 떼 주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과 같음을 밝혀 집착을 여의게끔 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요체인 겁니다.
모두들 꿈속에서 모든 게 있다고들 하지만, 깨고 나면, 곧 성품을 보고 나면,
비록 면전에 산하대지가 또렷또렷해도 티끌 만한 한 법도 볼 것이 없는 게 진실인 겁니다.
볼만한 경계가 없으면 마음이 없고,
마음이 없으면 일체의 이치와 도리가 붙을 데가 없어서,
세간상이 지금 있는 이대로 상주(常住)하니,
이것이 바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열리는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여몽삼매(如夢三昧) 하나 만으로 구경(究竟)할 수 있다」고 했으니,
헛되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좇으면서 분별을 일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이 오래도록 무심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머지 않아서 여여한 본체가 우뚝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 *
혼돈(混沌)이 나뉘기 이전의 회매(晦昧)가 허공을 이루고,
이 허공이 맺히고 엉키면서 이 몸과 마음과 이 세계를 이루었으니,
지금의 이 세간상(世間相)이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근본은 성품도 모습도 작용도 없으면서,
능히 인연에 감응(感應)하여 중생의 마음 속에
항하사(恒河沙) 같은 만상(萬像)을 나투되,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인 양 화현(化顯)한 것이
바로 현전(現前)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유(萬有)는 자체성(自體性)이 없는, 전혀 허환(虛幻)한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 면전에 전개되고 있는 일체의 현전상(現前相)은
― 자·타(自他)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
이 모두가 다 자기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일상에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은,
몽땅 제가 스스로 '제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는, 하나의 영성(靈性)이 스스로 연려(緣慮)의 기능이 있으므로,
이것을 취하여 <나의 마음>으로 삼고는,
이 사고(思考)가 다시 사고의 흐름 가운데서 헛되이 <사고하는 사람>을 지어내서는,
이것을 <나>로 여기게 된 것이니, ···
결국 <나 있음>도 <나 없음>도 다 이 <성품도 모양도 작용도 없어서>,
찾으면 아무데도 없는 영각성(靈覺性)일 뿐이요,
이것이 바로 법성신(法性身)이며,
이것이 바로 일체만유의 의지처(依支處)인 것입니다.
요약컨대, 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지혜>를 이끌어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참 나>(眞我)의 몸은
본래 온 누리에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데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뿐인 도리>(唯心之理)를 최상승(最上乘) 법문이라 하는 것이며,
모든 경전과 논서의 요지가 한결같이 <마음을 밝히라>는 한 마디 뿐,
다른 도리가 있는 게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 *
범부가 어찌하여 범부 탈을 벗지 못하는가 하면,
<만법의 성품 없음>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고유의 성품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세상사를 꾸려나가는 실체는 없다는 말입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현전상(現前相)은 꿈과 같고 환과 같아서,
티끌 만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따라서 참된 구도자라면 우선
▷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 '인간'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 '중생'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 고유의 성품을 갖고 있으면서
일정한 장소에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 등을 철저히 깨달아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이 몸과 마음과 이 세계와,
나아가서 저 허공까지도 몽땅 허망해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사무쳐 깨달으면,
이 사람을 일러서 <비로소 발심(發心)한 사람>이라 하고,
이를 <견도(見道)한 사람>이라 한다」고 했던 겁니다.
요약컨대, 눈에 가리움이 있으면 허공 꽃이 비 내리듯 하여,
범부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것이니,
이에 '허공 꽃'이란 바로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화미소(拈花微笑)의 뜻이니,
곧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열리면
비록 면전에 산하대지가 또렷또렷해도, 티끌 만한 한 법도 볼 것이 없다고 한 까닭입니다.
당신이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바다는 오늘도 종일 물결치기를 쉬지 않습니다.
요약컨대, 불법의 요체는 「실제(實際)란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집착하지 말라」는 것일 뿐이니,
헛되이 망식(妄識)을 굴리면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인다면 어느 세월에 쉬겠어요?
그러므로 한 순간이나마 조작(造作)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다면
곧 <진정한 해탈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 * *
「모든 법이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주재자(主宰者)가 없다」는 말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이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말의 참 뜻을 철저히 사무쳐 체달(體達)해야 합니다.
결코 입으로만 되뇌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그렇지 않고, 모든 일어나는 일이 다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짓는 자>가 없다는 게 이 언명(言明)의 요점이고 보니,
그렇다면 현전하는 모든 일은 <짓는 자>가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짓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일>이 혼자서 일어나겠어요?
이것이 곧 <연기(緣起)는 무기(無起)라>는 말이 있게 된 근거입니다.
즉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록 그 외양(外樣)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현전하는 일체의 세간상(世間相)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적멸(寂滅)해서,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요약하건대, 일여법계(一如法界)는 <지금 있는 이대로>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인연법(因緣法)에 미혹한 중생이 헛되이 면전에서 기멸(起滅)을 봄으로써
이 세상이 <있음>이 되었고,
그리하여 생멸(生滅) 거래(去來) 유무(有無) 등의 허망한 유동상(流動相)을 봄으로써
까닭 없이 윤회(輪回)하기에 이른 겁니다.
따라서 법성(法性)에서 보건대,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란 본래 없는 건데,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 <나>로 삼고,
이 <허망한 나>(妄我)를 고이고 섬기기 위해 온갖 유위의 공력(功力)을 들여서,
그 바람으로 훗날 좋은 과보(果報)가 있기를 바라고
허구한 날 허둥허둥하면서 쉴 날이 없는 게 바로,
가엾은 무명중생의 살림살이입니다.
거두절미하고,
― 출가(出家)하여 도(道)를 닦는 목적은
이 <허망한 나>를 수고롭게 해서 어떤 편의(便宜)함을 얻으려는 게 아니고,
이 망아(妄我)가 본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고 할만한 <나>가 본래 없음을 철저히 사무쳐서,
일체의 조작(造作)을 쉬고
오직 시절과 인연을 따를 뿐인,
이것이 바로 원기인(圓機人)의 살림살이요, 이것이 바로 무사도인(無事道人)이니,
그저 영겁토록 쉴 일이요, 다시 아무런 특별한 재간이나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게 아니니,
부디 명심해야 합니다. * * * 중생이 본래 성품이 없고, 따라서 생사(生死)도 없어서 도무지 독립적인 개체(個體)라고 할 만한 실체(實體)가 없는 게 진실입니다. 그래서 환화공신(幻化空身)이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환과 같은 육신을 <나>로 삼고는, 이것을 사고(思考)나 행위(行爲)의 주체(主體)인 줄 알기 때문에 <나>와 <남>을 비교해서 능력의 우열(優劣)을 가리는 건 이것이 세속법(世俗法)인 겁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바꿔 말하면,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된 수행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의 범용(凡庸)한 <나>를 갈고 닦아서 훌륭한 재간이나 수승(殊勝)한 지견을 얻어서 상근기(上根機)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야말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좋고> <나쁨>, <귀하고><천함> 등을 추구하면서 이쪽 저쪽 하는 범부(凡夫) 사리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문득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혀서, 안으로 <나>도 없고, 밖으로 상대할 경계도 공하여 도무지 취사(取捨)하고 조작(造作)할 일이 없는 <신령한 성품>(靈性)에 계합(契合)한다면, 일체의 유위행(有爲行)이 몽땅 쉬고, 매사에 그저 시절과 인연을 따를 뿐이리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리하여 이른 바 <하려함이 없는 도>(不擬之道)에 든다면,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가 바로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 * <설봉(雪峰) 대사의 말씀>이 새삼스러운 대목이군요. 시간도 공간도 없다면서 이 질문은 어디서 한 거며, 또 누구에게 한 겁니까? 더구나 <이것뿐인가> 아닌가 하고 묻고,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한다는데, 도대체 그런 일들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 겁니까? 말을 들었거든 모름지기 그 뜻을 깊이 깨달아 살필지언정, 그저 남이 한 말을 입으로만 외이고 다닌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경에 이르기를, 「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생각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한다」고 했어요. 그저 문득 무심(無心)에 들면 본래 아무 일도 없고, 없다는 것조차 없으니, 다시 헤아리고 더듬고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행여 말이나 문자 속을 뒤지지 말고, 곧장 면전에 전개되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향하여 여실(如實)히 닦아야 합니다. <여실함>이란,
본래 여(如)한 법 가운데 도무지 한 법도 생멸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만 되면 세간상(世間相)이 지금 이대로 상주(常住)함을 보아서,
다시는 이쪽 저쪽 할 일이 영원히 쉴 것입니다.
* * *
이 세상 일체 만유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존재는,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간에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저 그림자나 메아리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
― 물체나 음성 ― 에 의지 해서만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자체의 성품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일체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고 하는 이 말은
경전 도처에 나오는 말인데도 사람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니면 그 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냥 지나치기가 일수입니다.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 마땅히 이렇게 볼지니라」
했던 게 아니겠어요?
실체(實體)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다시 <같은가> <다른가> 하고 따진다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지요.
그러므로 일체 존재는, 있되 있음이 아니므로 <있음>에 머물 수도 없고,
없되 없음이 아니므로 <없음>에 머물 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것이며,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근거이기도 한 겁니다.
* * *
당신은 매사에 그렇게 즐겁기만 합니까? 그것 참 이상하군요.
매사에 그렇게 즐겁기만 하다면 "즐겁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서로 상반(相反)된 인자(因子)에 의지해서 세워지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고(苦)에 의지해 낙(樂)이 세워지고,
낙에 의지해서 고가 세워지며,
옳음(是)에 의지해서 그름(非)이 세워지고,
그름에 의지해서 옳음이 세워지는 등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 "이것"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이것"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고 했어요.
따라서 만약 즐거움 뿐이요, 고(苦)가 없다면 당연히 즐거움도 없을 것이며,
'그른 일'이 없다면 당연히 '옳은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들이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을 소멸하면 당연히 선(善)만 남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이 없으면 선도 따라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땅한 '하나'만을 남겨두고,
마땅찮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겠다> 는 치우친 마음
― 이것이 생사심(生死心)입니다 ―
이 항상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번뇌가 다하지 않는 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요약하건대, 우리들의 본래 마음(本心)은 선·악(善惡)도 고·락(苦樂)도 아니면서,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허망한 인연을 따라 선악(善惡)시비(是非) 득실(得失)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낸다는 사실을 알아서,
―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합니다 ―
종일토록 시비득실을 가리는 마음인 채로
전혀 끄달림도 얽매임도 없는 게 바로 무심도인(無心道人)의 일상입니다. * * * 모든 일은 진성연기(眞性緣起)일 뿐이요, <작용의 주체>도 없고 <수용(受用)의 주체>도 없이 이 세상은 다만 인연 따라 굴려지고 있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참 성품>(眞性)이란, 말 그대로 변하지 않고 옮기지 않아서 한결같다는 뜻이요, 이 불변의 참 성품이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천태만상의 형상을 내는 것이니,
마치 빈 골짜기가 온갖 음성에 응하여 메아리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그 모든 운동과 작용의 근본인 <물>이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이 <부동의 본체>에 의지하여 나는 천파만파(千波萬波)는
비록 그 외양(外樣)은 치성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이 마치 붓대롱을 통해서 사물을 보듯이
― 불가(佛家)에선 이것을 관견(管見)이라 합니다 ―
국소적(局所的)인 관찰에 치우치기 때문에 항상 <부동의 본체>를 놓치고
부분에만 국집(局執)하다 보니까,
온갖 <이런 것>과 <이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고 집착함으로써,
본래 <하나인 바탕> 위에 헛되이 숱한 차별상(差別相)을 세워서 갈등을 자초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는 이 세상은
그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본체를 여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성인의 말처럼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몸은 말 그대로 환화공신(幻化空身)이요,
지각(知覺)도 작용(作用)도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작용>이 어찌 혼자서 일어나겠어요?
따라서 이 세상은 지금 이대로 적멸(寂滅)해서 아무 일도 없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가 그대로 열반(涅槃)인 도리>이니,
천년 묵은 꿈에서 깨고 나면 머리는 여전히 베개 위라는 말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원만한 근기의 사람>(圓機人)은
함(爲)에 즉(卽)하여 함이 없고, 생각에 즉하여 생각이 없을 따름이니,
그저 한 생각이나마 조작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이것이 곧 해탈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이 세상 온갖 법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모두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주재(主宰)가 없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 따져볼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만법이 자성(自性)이 없어서, 꿈과 같고 환과 같아서 작용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작용을 일으키는 줄 잘못 알고 살아왔던 것뿐입니다.
따라서 정법이 드러나면 온갖 법이
― 이 몸도 마음도 세계도 ―
모두 사라져서 <오직 하나의 참되고 여여한 법계>가 우뚝할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리적 물리적 온갖 작용은
그 모두가 범부의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분별된 것일 뿐,
실제(實際)는 티끌 하나도 움직인 조짐(兆朕) 조차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저 바다는 오늘도 바람 따라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낱낱의 물결들이 <나>를 집착하면서 이치나 도리를 따지고, 의미(意味)를 찾고 하는 따위의 허망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 큰 바다는 무시 이래로 인연을 따르면서 오늘도 여전히 출렁이고 있지요. * * *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즉 일체 존재는 모두 <다른 것>에 의지해야만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불법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다른 것>이란 인연(因緣)을 말하는데,
만약 모든 존재가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즉 독립적인 성품과 기능이 있는 것이라면 꼭 인연에 기대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제 스스로의 힘으로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분명히 타(他)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거든요.
마치 물체에 의지해야만 <그림자>는 있고, 음성에 의지해야만 <메아리>는 있듯이 말입니다.
그림자나 메아리는 분명히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실재(實在)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경전 도처에 <만유(萬有)는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다>는 말이 되풀이 강조되지만,
사람들이 이 무유자성(無有自性)이라는 말을 그저 건성으로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성인들의 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겁니다.
한 마디 더 첨언하지요.
불법에서 말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세간에서 말하는 인과법(因果法)과 동일시해서는 안됩니다.
세간에서의 인과법은
<일정한 원인하에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가 난다>는 것이지만
불법에서의 연기설은
<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법이 법을 내지도 못하고, 법이 법을 들이지도 못한다.
따라서 인(因)이 과(果)를 내지도 못하고
과(果)가 인(因)을 갚(酬)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일은 꿈과 같고 환과 같아서
전혀 인간의 망령된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있음'이 된 것이니,
따라서 실제(實際)란 없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 * *
만법이 성품이 없어서, 이 세간상(世間相)이 <지금 있는 이대로>가 적멸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면전에서 번성하게 생겨났다 머물렀다 변했다 사라졌다 하는 이 모든 현상이
전혀 말로만 있는 것이요, 실체가 없어서, 그저 만법이 참되고 여여할 뿐인데,
이와 같은 일여도(一如道) 가운데서 생·멸을 보기 때문에 유·무가 갈려져서
마치 실제인 양 마음의 흐름을 장애하는 겁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 만법과 짝(伴)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서강수(西江水) 물을 다 마시고 오라. 그러면 말해 주리라.」
이 문답에서처럼, 이 몸도 마음도 나아가서 대천세계(大千世界) 까지
몽땅 한 입에 삼키고 나면
안팎으로 텅 트여서 도무지 마주 상대하여 서로 알아볼 것이 없을 텐데,
다시 <누가> 있어서 <무엇>을 상대하여 '있음'과 '없음'을 논하겠으며,
또 좋아하여 애착하고, 싫어하여 배척하고 하는 따위의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진실로 면전엔 한 법도 없건만,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하여 <유·무의 소견>이 다하지 않는 것이니,
모름지기 참된 수행자라면,
「 만법이 성품이 없음을 사무쳐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느니라」 하는 말을 들으면
'있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없음' 까지도 마저 보냄으로써,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의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 *
본래 아무 일도 없는 <여한 법>(如法) 가운데서
헛되이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봄으로써
이 세상사(世上事)가 마치 꿈처럼 환(幻)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투영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실상(實相)은 전혀 범부의 망령된 계교(計巧) 때문에 <있음>이 된 것이므로,
이 치우친 망견(妄見)을 떼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공(空)한 도리>를 설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이 방편의 말씀을 잘못 알고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있음>이라고 알면 그르고,
<공(空)했다>고 알면 옳다는, 또 하나의 망견(妄見)을 갖기에 이르렀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법실상은 공·유(空有) 양변(兩邊)이 모두 옳지 않으며,
이 <옳지 않다>는 말도 또한 군말일 뿐입니다.
요컨대, <법의 본래법>(本法)은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니,
<여여>(如如)라고 해도, <여여가 아니라>(不如如)고 해도 다 맞지 않아서,
마치 두꺼운 철판 위에 올라앉은 모기처럼 도무지 부리를 댈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여여>라고 해도 벌써 변해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정코 불생불멸 법문(不生不滅法門)에 들어서,
진실로 면전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을 사무친 사람은,
일체의 현전상(現前相)이 순전히 정식(情識) 만으로 망령되이 세워진,
자기만의 허망한 소견임을 알게 되며,
이야말로 <만법이 유식임>(萬法唯識)을 말하는 근거인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일찍이 한 법도 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일러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한다」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결국 설법(說法)이란,
말함도 없고, <드러내 보일 것>(示現)도 없는 것이
<참된 설법>(眞說)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법시(法施)란 자신이 기왕에 보고 듣고 배워서 기억해 두었던 것을
남에게 말해주는 게 아니라,
― 그것은 세속의 강의나 강연입니다 ―
순전히 천진(天眞)한 자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한 생각이
온누리를 껴잡는 것이라야 참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끝내 인간의 범용(凡庸)한 지견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일체의 이치(理致)나 도리(道理)가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선지식이란,
범부가 미혹 때문에 스스로 지은 업영(業影)임을 깨닫지 못하고,
면전에 전개된 온갖 경계를 지나면서 이에 까닭 없이 막히고 걸리고 하면서
헐떡이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는,
선교(善巧)한 방편을 베풀어서, 붙은 것은 떼어주고,
막힌 것은 뚫어주고 하는 것이 바로 선지식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스스로는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 협열(狹劣)한 소견으로
성지(聖旨)를 어둡히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 * *
인연 따라 나는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습니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듯이,
― 여기서 물체가 바로 <인연>이고 그 인연에 의해서 그림자가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약 그림자가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인연'을 기다릴 것 없이
혼자서 저절로 성립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즉 꿈이나 환(幻)과 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타(他),
즉 인연에 의지해야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이 있고 모습이 있는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다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은
곧 꿈이나 환처럼 실(實)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 이건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셈이며,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마찬가집니다.
결국 <온갖 것>이 <온갖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몸도 마음도 이 세상도 다 빈 이름만 있을 뿐이요,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꿰뚫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얻는 요체인 겁니다.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간파(看破)하여
실상의 해탈을 얻을지언정
헛되이 그림자나 메아리에 현혹되어서
사주니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따위의 속류(俗流)들의 잠꼬대에
영합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모름지기 영향지류(影響之類),
즉 그림자나 메아리에 현혹되어 이쪽 저쪽으로 휘둘리는 사람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마땅히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 * *
연생(緣生)하는 모든 법은 다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면전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꿈속에서 보는 것과 같은 온갖 사물을 실체인 줄로 오인해서,
이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면서 살아온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이것이 업(業)으로 엉겨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겁니다.
결국 불법(佛法)의 오묘한 뜻을 깊이 깨달아 살펴서,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밝히고 보면,
지금 현재 면전에는 진실로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 것이니,
현재 면전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법은,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다만 범부의 정식(情識)으로 헛되이 지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경전에서도 이르기를,
「일체 유위법이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했던 것인데,
사람들이 그 말만을 배우고 <마음의 눈>(心眼)은 조금도 열릴 기미가 없는 거죠.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나이가 얼마>라는 생각 등이 없어야 보살이라 한다」고 했던 것이니,
모처럼의 불법의 인연을 소중히 알아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철저히 구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젊은 스님이 평소 열심히 염불하고 정진하다가,
어느 날, 절에 불공 드리러 온 처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을 뺏겨서 번민하던 끝에, ···
어찌어찌 하다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아기자기하게 잘 살다가 가세가 기울고 재앙을 만나서,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객지를 유랑하던 끝에 도중에서 자식 하나를 역병으로 잃고,
길가에 묻고 떠나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 하였겠어요?
그러다가 부부가 함께 가지도 못하고 서로 헤어져서
낯선 객지를 떠돌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그 슬픔과 고통이 너무도 우심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끝에
문득 꿈에서 깨고 보니, ···
자신은 인자하신 부처님이 굽어보시는 가운데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드리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던 거예요.
이에 젊은 중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워서
다시는 연연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새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에 물들어 있는 젊은이들이
이런 설법에 귀나 기울일는지 알 수 없군요.
예나 이제나 인정의 흐름은 다를 게 없습니다.
* * *
본래 태어난 일도 없는데 무엇이 완전히 소멸하겠어요?
― 연기설(緣起說)을 철저히 깨달아 살피도록 하세요.
그래서 모든 법이 본래 남(生)이 없음을 사무쳐야 합니다.
요컨대,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공적(空寂)하여
티끌 하나 실다움이 없는 겁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인데, ···
티끌 하나 없는 가운데서 태어남(生)을 보고,
태어남을 보기 때문에 죽음(滅)을 보게 되고,
이렇게 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마치 실제인 양 면전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현혹(眩惑)한 지가 수천 년이 된 겁니다.
이 세상은, ― 일여도(一如道)는 본래 아무 일도 없는데,
공연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그 모양새가 너무 초라해서 불법에 인연을 맺고는
오래 참구(參究)한 끝에 <두려움 없음>을 증득하기도 하고, ···
모두가 까닭 없는 헛된 짓입니다.
결국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도 <죽음 앞에 초연히 두려움 없는 자>도 진실에
상응하기는 글렀어요.
요컨대,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과 <끊임없이 유동(流動)하는 이 세계>가
실제인 줄로 알고,
<마음 뿐>(唯心)인 도리를 등지고 바깥으로 다른 것을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하는 짓을 그만두기 전에는 결코 <성스러운 뜻>(聖旨)에 계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 *
세상사(世上事)는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나는,
꿈 같고 환(幻) 같은 것이어서, 전혀 실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모랫벌에 모래성(城)이 생겼다가는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모랫벌의 모래 자체야 도무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끝끝내 생멸도 없고 가고 옴도 없어서, 항상 <지금 있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국소적(局所的)인 인식작용이 이 <참되고 여여한 법의 성품>(眞如法性)
가운데서 번성(繁盛)하게 생멸하고 왕래하는 모습을 취하여
실체로 삼고는 이에 현혹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이 <움직이는 경계>를 좇으면서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며
일으키는 온갖 알음알이는 이것이 번뇌(煩惱)요, 헛된 망식(妄識)일 뿐이요.
결코 <나의 참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참 마음>(眞心)은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허망하여 나(生)는 일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참 마음>의 거울에 비친 <업의 그림자>(業影)를 붙잡아서 실체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世上)인 겁니다.
결국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시간, 공간적인 일체의 변천상(變遷相)이 몽땅 허망하여
티끌만큼도 움직이는 모습이 없음을 꿰뚫어 보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이라 하며, 견도(見道)한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 * *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말은,
그와 같은 물건은, 그런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실제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헛된 형상(形相)에 헷갈린 사람들이 면전에서 생멸하는 모습과 가고 오는 모습을 보아서,
그것을 실체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게 현실상인 겁니다.
지금 이렇게 묻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모두 공적(空寂)하여서,
당신이 물은 일이 없고, 나 또한 대답한 일이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알아야 합니다.
― 만법의 무생(無生)을 사무치는 데는 <모래벌 법문>이 꽤 괜찮습니다. ―
한 무리의 어린 꼬마들이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재잘거리며 놀고 있습니다.
길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동산도 만들고, 집도 짓고,
울타리도 만들고, 모래성도 쌓고 하면서
그렇게 네 것, 내 것을 가리며 재미나게 놀다가,
조금만 경우에 어긋나면 울고불고 싸우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모두 집으로 돌아갈 때면
그토록 공들여 만들었던 것들을 마구 발로 뭉개버리고
모래사장을 떠나버리지 않습니까? ···
모두 떠나버린 뒤의 모래사장은 적막하기만 하고요.
그런데 그토록 아기자기하게 쌓아올렸던 모래 구조물들은
과연 실제로 생겼던 걸까요?
모래사장은 꼬마들이 한창 신명나게 놀고 있을 때나,
해가 저물어서 다 떠나버린 다음에나 늘 그대로요,
조금도 늘거나 준 일이 없지 않습니까?
영겁에서 영겁에 이르도록 모래사장은 늘 그대로요,
조금도 변하거나 옮긴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면,
그렇다면 그 아기자기하던 현실의 놀음놀이는 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허구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라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즉 근본은 조금도 변천하는 일이 없는데,
다만 인연 따라 그 겉모습만 변하는 듯이 보이는 거죠.
따라서 사람들이 인연 따라 생멸하는 외양(外樣)만을 좇는다면
끊임없이 산하대지(山河大地)의 현혹하는 바가 되어서
도무지 그 안목(眼目)이 밝아질 기약이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경에도 이르기를,
「모든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닌 줄만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 했던 겁니다.
* * *
깨닫고 나면 깨닫기 전과 꼭 같습니다.
지금처럼 웃을 일이 있으면 웃고, 울 일이 있으면 울고,
시비득실(是非得失)에 얽매인 마음인 채로 시비도 가리고,
득실도 따지고 하면서 지금처럼 세상을 보내게 됩니다.
다만 그와 같은 일들이 다 허망해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므로
종일토록 이와 같은 잡다한 일들을 굴리면서 세상사를 꾸려나가지만,
끝내는 <없는 것>을 굴리는 것이므로
그 뒤끝이 항상 깨끗하고 맑고 고요할 뿐입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도
―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는 일이 없고,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허둥거리는 일이 없으며,
일이 끝난 다음에도 후회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무상(無常)한 것이니,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기 때문이며,
생멸법이 이미 멸하면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느니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낙이라고 한 것은 고(苦)를 배제한 <느낌>으로서의 낙(樂)이 아니니,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친 자에게만 주어지는 무생낙(無生樂)이요,
먼저는 시끄러웠다가 나중에야 고요해지는 적멸(寂滅)이 아닌 겁니다.
따라서 이 구경(究竟)의 적멸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는 것이 아니며,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가지런한 자리에서 얻어지는 지복(至福)인 겁니다.
* * *
초발심에서부터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발심>을 해야만 합니다.
결국 아무 일도 없는 <일여한 법계>(一如法界)에서
범부가 헛되이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봄으로써
이 세상이 마치 실제(實際)인 양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나>와 <내 것>, 나아가 이 몸과 마음과 세계가 실유(實有)로 오인되어,
이를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고 집착하면서,
꿈속을 헤매듯 살아오기를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결국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전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본래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는 게 진실인 겁니다.
― 즉 저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지만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간파(看破)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아무 일도 없이 공적(空寂)하다는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간상이 상주한다」(世間相常住)는 경전의 말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밥을 먹기는 먹는데, 술을 마시긴 마시는데,
거기에 <먹고 마시는 주체(主體)가 없다>는 게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시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마시는 일>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결국 이 세상 모든 일은 공적(空寂)하여, 끝내 아무 일도 없는데,
다만 어리석은 중생들이 온갖 형상(相)을 실제인 줄 오인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경계에 끄달려서 한 시도 쉴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모습(相)이 모습이 아닌 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끝내 허망한 지각활동(知覺活動)을 실제인 줄 알고 이를 좇는다면
걸음걸음마다에서 귀신과 사귀리니,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 용맹정진하세요.
* * *
인연 따라 나는 모든 것은 <남이 없음>(無生)을 철저히 깨쳐야 합니다.
만약 이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밝히지 못했으면,
그 밖의 것은 전혀 건드릴 필요도 없으니,
왜냐 하면 만법의 무생(無生)을 알아서 만법이 성품 없음(無性)을 깨치고,
나아가 <법의 평등>을 얻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눈>(心眼)이 떠서
<걸림 없는 지혜>(無碍智)를 얻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전혀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뼈대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심리현상(心理現象)이건 물리현상(物理現像)이건
지금 현재 면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사실은 전혀 생멸(生滅)하거나 왕래(往來)하는 일이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형상(形相)이 모습이 아닌 줄로 보면 바로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했던 것이며,
'여래'란 부처님의 별호(別號)인 동시에 법(法)의 존재하고 운동하는 양태(樣態)가
바로 그렇다는 ― 오되 옴이 없고, 가되 감이 없다는 ― 것입니다.
요컨대, 범부들이 어리석어서, 지금 이 순간의 '한 생각'이 나(生)는 일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한 생각이 문득 일어나기 무섭게 그 속으로 뛰어들어서는 한 바탕 법석을 부리던가,
아니면 이것을 찍어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던가 하면서
전혀 쓸데없는 조작(造作)을 일삼기 때문에 쉴 겨를이 없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일념연기(一念緣起)의 허망함을 알아서,
일어나는 생각
― 그것이 무슨 생각이건 ― 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저절로 잠잠해지리니,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이요,
먼저 일어나는 생각을 억눌러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좌선을 한답시고 우뚝우뚝 그럴싸하게 위의(威儀)를 갖추고 앉아서는
산란한 마음을 조복해서 고요한 마음으로 하는 것을 선(禪)인 줄 아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마음(眞心)은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고,
<망령된 마음>(妄心)은 나는 일이 없으니,
―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한 순간이라도 <조작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온갖 것으로부터 일시에 해탈하여
천지간을 소요함에 거리낌이 없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허망한 몸과 마음을 공연히 수고롭게 해서 유위(有爲)의 공덕을 얻으려고 헛애를 쓰지 말고,
지금 당장 회심(廻心)하여, <나의 심성(心性)이 본래 상주(常住)함>을 본다면,
이것이 바로 참 부처(眞佛)가 여여(如如)한 것이니, 다시 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 *
연생(緣生) 하는 일체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음을 철저히 밝혀야 합니다.
안으로는 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티끌만한 한 법도 실다운 법이 없어서,
안팎이 가지런히 공적(空寂)하여 아무일도 없는데,
다만 어리석은 범부들이 인연 따라 생멸(生滅)하는 허망한 모습(相)을 실유(實有)로 오인하여
집착하는 바람에 까닭 없이 그 <청정하고 맑고 고요한 본래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사람이 어느 날 이와 같은 진실에 문득 눈을 뜨게 되면,
진실로 면전에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온갖 두렵고 끔찍하고 고약한 일들이 앞다투어 일어나도
그것들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철저히 간파(看破)하여,
전혀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이것을 일러서 정(定)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들이 인연 따라 나는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은 허망한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꿰뚫어 보면 이것을 혜(慧)라고 하는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 정·혜(定慧)를 가지런히 닦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그 마음은 만법 밖으로 훤칠하게 벗어나서,
일상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가운데 전혀 자취가 없으며,
물들거나 휘둘리는 일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물론 몸도 마음도 이 세계도 몽땅 없으니, 병이 어디에 붙겠으며,
이미 병이 없으니 약인들 어디에 소용 되겠어요?
이렇게 문득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참 부처(眞佛)가 여여한 것이니,
모름지기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혀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기해야 할 것입니다.
* * *
경에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이미 여읜 것이요, 별달리 방편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꿈이니, 허깨비(幻)니 하는 말은,
곧 「그런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남(生)이 없는 도리>를 깨치면 너무도 당연한 말일 텐데,
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사람들은 너무 어렵고 심오(深奧)한 것으로 여겨서
숫제 알아내려고 하는 마음도 내지 않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 여름철에 꼬마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광경을 연상해 보세요.
길도 만들고 '터널'도 만들고 모래성도 만들면서 말이에요,
이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길이나 '터널'이나 모래성 등이 새로 생겨났다고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면 이것들이 그저 본래부터의 모래 벌의 모래일 뿐이요,
실제로는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만 사람들의 인식작용이 국소적(局所的)인 관찰만을 하도록 틀 지워져 있기 때문에
늘 모래 벌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 말이 갖는 함의(含意)는 대단히 크고도 중요합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天動說)을 치워 버리고 지동설(地動說)을 내놓았을 때,
당시의 사람들이 겪은 당혹스러움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 지금 여러분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면서 전개되고 있는 이 세상사가
실제론 티끌만큼도 생멸(生滅)하거나 가고 오고 하는 일이 없다면, ―
그 말이 그리 쉽게 믿어지겠어요?
지구인들이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믿게 되는데는 4, 500 년이 결렸지만,
이 <남(生)이 없는 도리>는 2500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믿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와 같은 안목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요,
한 인간이 난생 처음으로 진실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며,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 깨달은 사람(覺者)이라고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더는 지체하지 말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도리만 깨닫고 나면 그 밖의 일체의 논의(論議)는 저절로 쉬어질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남아 있어서 의증(疑症)을 일으키겠어요?
* * *
불법(佛法)은, 진리(眞理)는 본래 생멸법(生滅法)이 아닙니다.
이 여법(如法)을 미했기 때문에 헛되이 면전에서
생멸상(生滅相)을 보고 왕래의 상(往來相)을 보게 된 것이니,
따라서 성인의 가르침의 요체(要諦)는,
이 오랜 미혹을 털어냄으로써 본래의 여여한 실상을 보게 하고자 하는 겁니다.
요는,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 여실(如實)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미혹했기 때문에
공연히 헐떡이게 된 것이니,
그러기에 <불법>을 다른 이름으로 <무위>(無爲)라고도 하는 겁니다.
예컨대, 저 해변가 백사장에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성을 쌓고,
산과 강과 길 등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이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들 모래성이나 산과 길 등이 <새로 생겨났다>고 할 것이요,
또 얼마 후에 이것들이 허물어져 사라지면 <다 사라졌다>고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들이 다 본래부터의 <모랫벌>의 모래일 뿐이요,
조금도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들이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도 이와 같아서,
일체 존재의 근본 바탕은 까딱도 하지 않는데,
인연 따라 변하는 <겉모습>(相)만 좇기 때문에
<여여해서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는 가운데> 헛되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아서
분별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공연히 그 마음이 시끄러운 겁니다.
따라서 이 경지에 이르면, 부지런한 자도 게으른 자도 다 <함이 있는 자>이니,
모두가 의지(依支)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性品)을 어기는 짓이므로
끝내 깨달을 분수가 없을 테니, 모름지기 잘 깨달아 살펴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 *
모름지기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반드시 <참된 하나의 성품 바다>(一眞性海)에 들어가서 닦아야 합니다.
저 바다는 인연 따라 종일토록 천파 만파(千波萬波)를 일으키지만
그 모두가 항상 <한 맛>(一味)이 아니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온갖 법이,
―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또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
그 모두가 오직 '한 바탕'에 찍힌 여러 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외양(外樣)은 비록 각양 각색이지만,
그 근본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임을 간파하는 것이 바로 공부의 첫 걸음인 겁니다.
즉 다르면서도 항상 같고, 같으면서도 항상 다른, 이것이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인 겁니다.
결국 불법 공부란,
망정(妄情)에 홀려서 진실을 헷갈렸다가,
허망을 깨달으면 그 허망이 몽땅 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본래 이 세상엔 잘못된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다만 정식(情識)의 헛된 분별 때문에 온갖 법이
마치 꿈인 양 허깨비인 양 나타나서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것이니,
이에 홀리지만 않으면 만법은 스스로 당신의 손아귀에 들 것입니다.
* * *
일체 만법이 마치 물체로 인하여 그림자가 생기고, 음성 따라 메아리가 나듯이,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업(業)을 짓는 자도 보(報)를 받는 자도 본래 없거늘,
누가 있어서 무엇을 참회하며, 또 습기는 어디에 당한 겁니까?
그모두가 다만 거짓 이름만 있을 뿐, 꿈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환(幻)인 줄을 알았으면 그것이 곧 여의는 것이니, 다시 무슨 방편을 필요로 하겠어요?
그러기에 제대로 된 수행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알아서,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볼 뿐이요,
털고 닦고 하여 장애(障碍)를 제거함으로써
해탈(解脫)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 본분납자(本分衲子)는 온갖 갈등(葛藤) 따위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곧장 구경의 땅을 밟는 겁니다.
<참으로 여여한 법성>(眞如法性)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물듦이 없건만,
다만 범부의 정식(情識)이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온갖 갈등(葛藤)과 장애(障碍)가 있게 된 겁니다.
따라서 일체 만법이 본래 성품이 공함을 보아서 조작(造作)함이 없고
의지(依支)함이 없는 본래 성품(本性)을 밝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일대교화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범부의 망정(妄情)을 제할 뿐이요,
달리 수승(殊勝)한 식견이나 특별한 재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더구나 「곧장 낙처(落處)를 밝히는 것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요지의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낙처(落處)니, 당처(當處)니 하는 것은 학인(學人)에 의해 증득(證得)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기에 달마대사(達磨大師)도 양(梁) 나라 무제(武帝) 앞에서 「알 수 없습니다」고 했고,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도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던 겁니다.
<모르는 그것>,
― 이것은 <알고 모름의 양변>의 포섭이 아님 ― 이야말로
선·악(善惡) 미·오(迷悟)등의 의지처(依支處)이며, 천 성인이 돌아가 쉴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마음 공부'는 학습이 아닙니다.
아마도 '수행'이니, '공부'니 하는 세속적인 용어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게 사실인데,
이 점을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금방 「'마음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공부 해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물을 게 뻔한데,
이와 같은 질문 역시 '공부'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물입니다.
요컨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달으면,
지금의 모든 일이 어느 것 하나도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고,
어떤 법도 '부처의 출흥(出興)'이 아님이 없는데,
다만 중생이 본래 여여(如如)해서 물드는 일이 없는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등졌기 때문에
본래 공적(空寂)한 가운데서 망령되이 정식(情識)으로
생멸(生滅)을 보고 거래(去來)를 보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누구라도 지금 당장에 <여실(如實)한 안목>이 열리기만 하면
바로 '부처 지혜'를 갖추어서 성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실한 안목'인가? ···
"여실하다"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곧 만법이 인연 따라 날(生) 뿐이므로
<'제 성품'이 없고>(無性),
따라서 '모습이 없고'(無相) '작용도 없음'(無作)을 분명히 깨치고 나면,
세상 만사는 항상 꼭두각시처럼 낫다가 꼭두각시처럼 사라져서
시종일관 아무 일도 없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거예요.
그러므로 종일토록 보아도 일찍이 본 일이 없고,
종일토록 들어도 일찍이 들은 적이 없으며,
종일토록 일을 해도 일찍이 일을 한적이 없는,
― 이것이 바로 체(體)와 용(用)이 원융되어 걸림이 없는 경지이며,
'여래'(如來)의 이름을 얻게 된 근거입니다.
결국 만법이 '제 성품'이 없음으로 무력하여 작용이 없으며,
따라서 본래 법이 법을 내는 일도 없고, 법이 법을 들이는 일도 없는 게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인(因)이 과(果)를 내는 일도 없고 '과'가 '인'을 갚는(酬) 일도 없으니,
요는 '불과'(佛果)란,
바로 <인과 아닌 인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초발심(初發心)에 이 <인과 아닌 인과>를 깨치면 이것이 바로 '부처'인 것이요,
다시 다른 도리가 있는 게 아닌 겁니다.
'부처'가 다시 무엇 하러 '부처'가 될 일이 있겠어요?
* *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혹 때문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본래 여(如)한 법 가운데서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 변천하는 모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여여한 법 가운데서는 본래 조그마한 생멸도 없는 게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서, <연기(緣起)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들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로 오인하고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전혀 까닭없이 번뇌에 휩싸인 채 나날이 허덕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죠.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말도
이와 같은 세간사의 실상을 분명히 간파(看破)하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도 물들거나 휘둘리는 일이 없는 안목을 갖추었을 때,
저절로 밝은 안목이 열리면서,
지금 있는 이대로의 것을 조금도 바꿔치기 할 것 없이,
즉 전혀 조작하거나 대처할 것 없이,
문자 그대로 지금 있는 이대로가 곧 불사(佛事)라는 사실을
분명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가 마음 가운데 나타나면
성불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무엇을 애쓸 일이 있겠어요? 더욱 분발하세요.
* * *
'불법'을 '세간법'과는 동떨어진 전혀 다른 법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비록 초발심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걸림 없는 경지에 이르러 '정각' (正覺)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깨달음이라면 결코 <지금의 것>을 바꾸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만약 <지금의 것>을 바꾸어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분명 생사법(生死法)이요, 인과법(因果法)이요, 수보법(受報法)이니,
그것을 어떻게 참된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어요?
요컨대, '깨달음'을 얻어서 '안목'이 밝아진다는 것은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분명히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온갖 법의 실상(實相)>이란 과연 뭘까요?
― 온갖 법이 오직 사람의 망령된 업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마음 속에 투영되는,
즉 전혀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이것을 <저 바깥에 있는 실체>라고 오인해서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한 시도 쉴 겨를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일체가 오직 '청정한 한 마음' 뿐임을 철저히 깨닫고,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지금의 환(幻)과 같은 허망한 법을 조금도 허무는 일이 없는 겁니다.
― 물결을 죄다 제하고 나서야 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러기에 고인은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이미 여읜 것이니,
다시 방편을 쓸 것이 무엇이겠는가?」고 했던 겁니다.
만약 당신이 진실로 안목이 밝아져서,
<참으로 마음 밖에서 티끌만한 한 법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업(業)도 보(報)도 다 붙을 데가 없을 테니,
다시 무슨 죄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필칭 오무간지옥(五無間地獄)에 떨어질 죄업도 찰나에 빙소와해(氷消瓦解)되고 말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만약 마음 밖에서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본다면,
곧 한 톨의 쌀이라도 먹었다면 당신은 결코 범계(犯戒)의 허물을 벗어날 수는 없으며,
지옥 끝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 * *
'참된 관'(眞觀)은 <관하는 자>(能觀)와 <관하는 바>(所觀)가
모두 없는 관(觀)을 말합니다.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으면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능소가 없는 관>이라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 잘 생각해 보세요.
본래 모든 작용은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일을 짓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 스스로는 작용이 없는 근본지혜(根本智慧)가 인연에 감응하여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일으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연기설(緣起說)의 골자입니다.
즉 만법은 모두가 인연 따라 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작용의 주체>가 없는 거예요.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혼자서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생멸이 있는 듯 한데,
실제로는 생멸도 없고 거래도 없는 게 바로 제법실상인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내가 본다"고 할 때에도
실은 거기에 <보는 자>가 있어서 <보는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다만 '참 성품'(眞性)이 인연에 감응해서 <봄>(見)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이 몸이 환화공신(幻化空身)인데 무슨 작용이 있을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보고 들음>(見聞)이 꿈속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것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 오인하여,
보고 들을 때마다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 들음(見聞)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닌 줄 알아서,
보고 듣는 가운데 집착하는 일만 없다면,
다시 말해서 마치 맑은 거울이 무심히 사물을 비추듯이, 그렇게 비출 수만 있으면,
이것이 수행자의 안목이 열리는 순간이며, 머지 않아 곧 '부처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 * *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거기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습니다.
중생들이 이 <연기(緣起)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이 이 '몸'과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身口意 三業) 것이 바로 <나>라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몸도 입도 뜻도 다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환(幻)과 같은 존재이므로
무력해서 작용이 없는 것인데, 곧잘 스스로를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몸과 입과 뜻을 굴리는 주재자(主宰者)가 바로 <나>라고 여기고 있으니,
다생누겁의 업의 뿌리가 그만큼 깊은 탓입니다.
저 바다의 물결이 스스로의 뜻과 힘이 있어서 물결치는 것이 아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 ―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막론하고 ―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므로,
겉보기엔 마치 작용이 일어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공적(空寂)하여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는 게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임을 간파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요함과 작용이 걸림 없는 지혜>(寂用無碍智)가 바로 '부처 지혜'임을 알아서,
이 세상사가 지금 있는 이대로 상주(常住)함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청맹과니의 비방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 지금 현재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을 때,
거기에 <일하는 자>가 없으며, <일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일>이 혼자서 이루어 지겠어요?
끝내 <밥 주머니>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옳습니다.
* * *
'진리'(眞理)에 상응(相應)하기를 바라는 학인이라면
모름지기 알아들은 바 말의 참 뜻을 깊이 참구해야 합니다.
그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는
중생의 천 년 묵은 업식(業識)을 도저히 둘러 뺄 수가 없으며,
<상식의 딱딱한 껍질>을 깨어 버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도 경계도 다 진성을 여의지 않았다」면 과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과연 진실이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
진성(眞性)이란
말 그대로 그 성품이 참되고 여여해서 변전(變轉)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고,
이 '마음'과 '경계'가 서로 의지하면서 이 세상을 엮어내고 굴리고 하는 것이라면,
「마음도 경계도 다 '진성'을 여의지 않았다」는 말은
곧, 이 세상사(世上事)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여여부동(如如不動) 하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즉 이른 바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이야말로 곧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것이요,
바로 여래의 행리(行履)가 현현(顯現)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이미 <닦고 조작하고>(修造) 할 일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곧
「성상(性相)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닦을 게 없다」는 지견을 내어서,
중생이 닦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에
「여여(如如)한 가운데 <닦음 없이 닦는 도리>(修無修修)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수행은 닦음도 있고 이룸(成)도 있고 얻음(得)도 있는
세간법의 유위행(有爲行)과는 다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본분납자(本分衲子)의 행각이요,
'참 수행'(眞修)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가'(假)를 좇으면서 헛애를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교(實敎)에 의한 수행이며,
「작은 방편으로 쉬이 깨친다」는 도리이니,
마음에 능히 감당할만한 사람은 모름지기 힘쓸 일입니다.
* * *
일체 존재가 다 내 마음이 빚어낸 것일 뿐이요,
'마음' 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고
제 입으로 분명히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그 말의
<진정한 함의(含意)>를 알지 못하는 게 큰 병통입니다.
지금 질문자는 마음 밖에 엄연히 절대공간(絶對空間)
절대시간(絶對時間)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른 바 '세속의 상식'에 완전히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
이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몽땅 사람의 '마음'에 허망하게 나타나는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쳐야 합니다.
시간도 공간도 결코 예외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한다」고 한 게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이 '마음'이라는 말도 다만 세간법을 따라 세속 사람들과의 교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말일뿐이며,
일체 만법은 본래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는,
그야말로 그림자 같고 메아리와 같은 존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굳이 사족(蛇足)을 단다면,
이 '마음'이란 다만 <하나의 신령한 앎의 성품>이요,
<신령한 광명>입니다.
이 '광명'은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해 있으며, 항상 스스로 짬 없이 환히 빛나고,
타(他)의 조작을 빌리지 않습니다.
즉 사람의 감관(感官)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환히 비추는 거죠.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감관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며,
그 모든 현상이 싹도 트기 이전인 거예요.
모름지기 이 '마음의 광명'(心光)에 의해 비추어지지 않고
혼자서 성립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 살필 일입니다.
―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설명으로도 이 '마음의 성품'(心性)을
직접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당연히 모든 성인들의 말씀은 몽땅 방편의 말씀일 뿐이요,
그 가운데는 결코 '진리'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모름지기 이 방편의 말씀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 *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법은 <나는 일이 없음>(無生)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생멸(生滅)하는 모습을 보고, 거래(去來)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혀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인 이 산하대지 삼라만상을
실체(實體)인 줄로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무명(無明) 중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이와같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올바로 관(觀)하여,
밝은 안목을 갖추게 되면 지금처럼 이와 같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이 세상이
지금 이대로인 채로 공적(空寂)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한 게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시종일관 꿈속과 같아서 전혀 실다운 성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이런 사람을 일러서 달인(達人)이라 하고, 깨달은 사람(覺者)이라 하는 것이니,
거기에 무슨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군말이 있을 수 있겠어요?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여실(如實)히 보는 안목을 갖추면,
즉 일체만법이 전혀 <중생의 마음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서
모든 경계에 전혀 장애를 일으키지 않을 수만 있으면 바로 여래(如來)를 보게 되고,
거기엔 이미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생멸하는 모습도, 가고 오고 하는 모습도 없어서,
이른바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는 <하나의 법계>가 현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딱한 것은,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질문자도,
아마 모르긴 해도 늘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라는 말은 되뇌고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다른 모든 것을 다 접어두고라도 오직 이 말의 뜻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 옛 사람이 무엇을 얻었기에 문득 쉬었습니까?』
『 도둑이 빈집에 든 것 같았었느니라.』 ···
* * *
진정한 출가(出家)는 이 몸과 마음으로 어떤 공덕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달아서,
이 세상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바로 가장 위대한 것을 얻은 사람이요,
이 사람을 일러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본래 마음>(本心) 속에는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으며,
나아가서 빛깔(色)도 소리(聲)도 없는데, 사람들은 늘 빛깔과 소리를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업의 그림자'(業影)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으면 온갖 법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온갖 법이 없다」고 한 겁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하는 모든 법이
다만 제 마음의 거울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인 줄 철저히 깨달아서
다시는 현혹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 ··· '해탈'을 바라는 자는 이미 '해탈의 마귀'에 홀렸고,
'열반'을 바라는 자는 이미 '열반의 마귀'에 홀렸으며,
― 나아가서 '성불'을 바라는 자는 이미 '부처 마귀'에 홀렸느니라」라고 했던 겁니다.
모름지기 일체 만법이 다만 제 마음으로 지어낸 허망한
'업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서,
더는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탐내거나 하는 일은 영원히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인(達人)이라 하며, 능히 모든 사람을 이끌어서 <원적(圓寂)한 경지>에 안치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 * * 일체만법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결코 거기에는 <짓는 자>(作者)가 없는 겁니다. <짓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짓는 바>(所作)가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이와 같은 사실은 정신적인 지각작용이나, 물리적인 모든 현상이 다 예외가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연기법(緣起法)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서,
생성과 소멸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인 줄 오인하고,
따라서 거기에 <작용의 주체>를 세워서 업(業)을 짓게 되고,
그에 따라서 보(報)를 받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일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결코 거기에는 주재자(主宰者)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선 철저히 사무쳐야 합니다.
따라서 '연기법'이 행해지는 곳에는 실다운 법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때문에 이 세상사가 통틀어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참되고 여여한 법의 성품>(眞如法性)은 이름 그대로 본래 움직이는 일이 없으며,
다만 인연에 감응(感應)해서 온갖 법을 나투되,
마치 꿈속의 그것처럼 나투는 새 없이 나투는 겁니다.
마치 빈 골짜기가 소리에 응해서 메아리를 나투되,
거기에는 <나투는 자>나 <나투는 바>를 찾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또 저 바다의 물결은 종일토록 출렁거리지만, 그 모두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물결' 스스로가 작용을 일으키는 게 아니 듯이 말입니다.
알기는 환히 아는데, 거기에 <아는 자>가 없는,
그러므로 <아는 바>도 없는 것이 바로 <부처 지혜>의 <앎이 없는 앎>이요,
그래서 이것을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라고 하는 겁니다.
헤아려 알고, 짐작해서 아는 것은 '마음의 광명'(心光)이 아니고,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은 의식(意識)인 거예요.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무시이래의 <생사의 근본>인 이 '의식'을 붙잡아
'내 마음'인 줄 알고 섬겨왔기 때문에 도무지 편안할 날이 없는 겁니다.
마치 꿈속에서 <아는 자>도 있고, <아는 바>도 있으나,
그 모두가 작용이 없는 허망한 꿈속의 일이듯이,
우리들이 이른 바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이 세상사도 몽땅 꿈속의 그것처럼,
작용이 없는 공적한 것임을 간파하는 게 바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지혜작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 마음>은 스스로 항상 빛을 놓으므로 전혀 공력(功力)을 들이는 일이 없이
스스로 환히 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궁리하고 천착하고 쥐어짜듯이 알아내는 것은
마음의 광명이 아니고 허망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 * *
만법은 본래 나(生)는 일이 없는 데,
사람들이 안목이 어두워서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것을
실재(實在)인 양 오인하고 살고 있는 것이 중생살이에요.
모든 비유는 이 <남이 없는 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쓰는 말인데,
― '그림자'는 그렇다 치고, 다시 그 '나무'는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
달걀과 닭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르겠어요?
<깨달음으로 가는 외길 ··· >을 읽었다니 이야긴데,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도록 하세요.
그 책은 한 번 읽고 말 그런 책이 아니에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다 보면 지금의 그와 같은 의증 정도는 웬만큼 해소 될 겁니다.
존재에 대한 안목이 열리지 않는다면 한 걸음인들 나갈 수 있겠어요?
사실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공부'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서둘지 말고,
우선 <저 바깥에 무엇인가가 있는 듯 한 이 미혹>을
다스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 보도록 하세요.
* * *
이 세상 일체 만유는 <다른 것>으로써 <나>를 삼았기 때문에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겁니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하죠.
예컨대, 여기 손바닥 위에 세 개의 성냥개피가 있다고 칩시다.
이 세 개의 성냥개피를 각각 끝과 끝이 맞닿도록 배열하면 삼각형의 모양이 되지 않겠어요?
이 때 사람들은 '삼각형'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그 모두가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또 이 말을 듣고 하는 것도 전혀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그와 같은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없는 겁니다.
만약 <밥이나 반찬, 물, 공기 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말하고 듣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붓다'도 "나는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했던 겁니다.
범부나 이승(二乘)들의 지견은
<있음을 배제한 없음>과 <없음을 배제한 있음>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고 말하면 '없는 줄'만 알아서,
유무 사이에서 항상 이쪽 저쪽 하면서 쉴 틈이 없죠.
그러나 보살의 지견이라면 그렇지가 않아서,
'없다'는 말을 들으면 '있음'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없음'도 함께 보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없음'의 참 뜻>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지 않겠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유무 양변(有無兩邊)을 몰록 넘어선
'걸림 없는 지혜'를 얻어서 담담히 여여한 '본원'(本源)으로 돌아가 합하는 겁니다.
* * *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아본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겁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눈에 보이면 '있음'이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음'이고, 그런 것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번 물어봅시다.
지금 바깥에 나가서 "하!···" 하고 입김을 내뱉어 보세요.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요?
앞으로 날씨가 몹시 추워져서 모두들 움츠리고 있을 때는 어떨까요?
하얗게 입김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여기서 내뱉은 입김의 성분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다만 인연 따라서 '입김'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게 실상(實相)이 아닙니까?
이와 꼭 마찬가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은 본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있음의 모습>을 나투기도 하고,
<없음의 모습>을 나투기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진실은 유·무(有無)가 본질면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는 건데,
중생들이 다만 <보고 듣는 데>(見聞)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온갖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것을 실체(實體)로 보아서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따라서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見聞覺知)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 줄 아는 자는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던 겁니다.
한 마디만 더 보태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지요?
이 말을 새겨서 말하면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곧 그대로 모든 존재이다」라는 뜻이에요.
* * *
모든 존재가 '제 성품'(自性)이 없는 건데 그것이 실체성이 있는 것인 줄로 알고
그 모습과 성질을 '실유'(實有)로 오인하고 살아온 지가 수천만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업으로 받은 경계>(報境)가 바로 이 세상인 겁니다.
만약 <업보로 받은>(報得) 경계라면 티끌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일러서 질애(質碍)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들 범부의 삶을 사사건건 장애하는 이른바 업장(業障)인 거예요.
그러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닫는다는 것은
목전에 전개되는 모든 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허깨비 같은 허망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 증험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경계에 더 이상 그 마음이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해서 본래 여여한 '본래의 마음 자리'를 얻어서,
그 자리에서 되돌아 모든 법을 세우고 굴리고 하기를 끊임없이 한다면,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뜻했던 바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등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게 된다면,
머지 않아서 모든 법이 내 마음이 짓는 바대로 나툰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 ⇒ 成所作智).
마치 저 꿈이 전혀 내 마음의 헛된 분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꿈속에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혀서 애쓰는 걸 가지고 어찌 실제라고 할 수 있겠어요?
꿈에서 깨고 나면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건데 말입니다.
또한 설사 그렇게 해서 모든 법이 마음대로 내고 들이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두가 꿈 같고 허깨비 같아서
티끌만한 한 법도 성취(成就)되는 것은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출처 : 현정선원 / 大愚禪師님
출처 : 진공묘유眞空妙有
글쓴이 : 원융무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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