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만공스님 法訓

장백산-1 2011. 8. 1. 03:23

만공스님 法訓》- (1)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자유(絶對自由)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는 진아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形象)도 없지마는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

 

1)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 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

 

2)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육취(四生六趣)

 

3)에 윤회(輪廻)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 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生死(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딩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嶪)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 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4)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釋迦世尊)이 탄생시에 산석(産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한 정력이라도 이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업신(業身)․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業識)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5)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知識)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6)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7)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 생생(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6.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 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7.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9.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10.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버리고 하여, 신행(信行)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11.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12.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13.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前生)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14.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15.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16.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17.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來世)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18.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9. 명안 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應答)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1.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학령(學齡)으로는 20세로부터 30세까지가 적령(適齡)이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3.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한낱 이것만 같지 못하다.

 

24.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 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異性的)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 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26.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여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27.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이니라.

 

28.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절을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느니라.

 

29.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총섭(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天下正氣)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道伴)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4생 6취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1.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지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話頭)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 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 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 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4.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白紙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35.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36.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頓忘) 생사(生死)하는 이도 있고, 늦어야 3일,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副業)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년, 30년 공부한 사람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38. 참선하려면 먼저 6국(六國) 전란(戰亂)을 평정(平定)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39.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閻羅國) 차사(差使)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41.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42.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43. 꿈 속에서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으로 삼을 것이니라.

 

44. 꿈도 없고 생시(生時)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어디에 두는지 알아야 하나니라.

 

45.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46.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47. 산 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나?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전로(前路)가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48. 공부인(工夫人)이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49.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信心)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50.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51. 참선(參禪)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니라.

 

52.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慈悲心)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이 아니면 팔만사천 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53. 사형(死刑)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精進)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54. 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라.

 

55. 인신(人身)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 가졌을 이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56. 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안광낙지(眼光落地)하게 되면 인업(人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57.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58. 변소에 앉아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59.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60. 밤 자리에 누울 때 하루 동안의 공부를 점검하여 망상과 졸음으로 정진시간보다 많이 하였거든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정진하되, 매일매일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61.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망상이 나거든 생사(生死) 대사(大事)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전정(前程)을 다시 살펴본다면 정신이 저절로 새로워질 것이니라.

 

62. 사선(死線)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63. 생사 윤회의 생활을 면하려고 출가한 중이니만큼 참선법을 여의고 하는 일은 모두가 생사법(生死法)을 익히는 것이니라.

 

64.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65. 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神通)․변화(變化)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66. 믿음은 부처를 찾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몰아적(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정체(正體)를 찾아야 하나니라.

 

67. 선학자(禪學者)는 선학자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나니라.

 

68. 공부의 과정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1)․계무생사(契無生死)2)․체무생사(體無生死)3)․용무생사(用無生死)4)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5)․사무애(事無碍)6)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되나니라.

 

69. 공부할 때에 짐짓 알려는 생각을 말고, 정진력만 얻으면 공부는 저절로 성취되나니라.

 

70.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하다가는 불법인연(佛法因緣)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71.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할 수 있나니라.

 

72. 정신은 물질의 창조자이지만, 물질이 아니면 정신의 존재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나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4. 정신이라는 전당(殿堂) 안에는 생사(生死)와 선악(善惡)이라는 두 배우가 순번(順番)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란 배경 앞에서 희비극(喜悲劇)을 무한한 형태로 연출하고 있나니라.

 

75. 아무리 문명(文明)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貧弱)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인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修行)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육도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1. 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종막(終幕)이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부글부글 썩어 버리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인들 일분의 자유가 았었던가? 밥을 먹다가라도 불의(不意)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火災)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 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2. 인생은 자기 업신(業身)의 반영인 이 몽환세계(夢幻世界)를 실상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3.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生)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도 죽기 전후 생활도 다 잊어 버리고, 입태(入胎)․출태(出胎)의 고(苦)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적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세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 사진의 영상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나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4.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현재․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5.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6.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일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다.

 

7.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8.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原因)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9. 인간 생활의 주체가 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哀樂)까지도 다생(多生)으로 익혀온 망령된 습관의 취집(聚集)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10. 이 우주에는 무한 극수적(無限 極數的) 이류 중생(異類 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하여 우리 사바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地獄)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六識)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11. 습관(習慣)은 천성(天性)이라 천재(天才)니 소질(素質)이니 하는 것도 다생(多生)으로 많이 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12. 물체는 결합(結合)․해소(解消)의 이중작용(二重作用)을 하기 때문에 영겁(永劫)을 두고 우주는 건괴(建壞)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13. 중생(衆生)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짐승․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1)에 불려서 사생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佛(完人)이라 하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 중생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내 한 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任意)로 하나니라.

 

14. 완인(完人)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15. 천당(天堂)은 갈 곳이요, 지옥(地獄)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業緣)으로 됨이니라.

 

16. 인격(人格)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平安)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17.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輪廻)의 고취(苦趣)를 면치 못하나니라.

 

18. 우리가 느끼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19. 세인(世人)들의 아무리 진보된 이론(理論)이나 심원(深遠)한 학설(學說)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인생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명상(名相)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니라.

 

20. 이론(理論)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깨우쳐 주는 이론이라면, 그 이론은 곧 도(道)의 입문으로 인도하는 대도사(大導師)가 되는 것이니라.

 

21.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유심론(唯心論)을 말하는 자 스스로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나니라.

 

22. 세상에는 바른 말 하는 사람도 없는 동시에 그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 것이니라.

 

23. 신(神)은 아무리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최고신으로 인류화복(人類禍福)을 주재(主宰)한다 하더라도 육체를 갖추지 못한 사(邪)이니라.

 

24.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무지(無知)를 면치 못하고, 신을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라.

 

25.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萬能)을 자랑하지만 자타(自他)를 위하여 순용(順用)되지 않고, 역용(逆用)되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實利)를 주는 것보다 해독(害毒)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니, 다만 세계가 자타의 아상(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인 참된 과학 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합리적인 제도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문명(精神文明)이 사람마다 마음속에 건설하여야 잘 살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되나니라.

 

26.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생(多生)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정말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한 것이니,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체달(體達)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자가용(自家用)으로 삼게 될 것이니라.

 

27. 물질과 정신이 합치된 과학자는 영원의 만능을 발휘할 수 있나니라.

 

28. 현대 사람은 자만심(自慢心)을 본위로 한 신경만 예민하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법문(法門)을 들을 때에 신중히 생각하지도 아니하고, 부인할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반박해 버리는 것으로 쾌사(快事)를 삼는 일이 많으니, 그것은 암흑의 길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니라.

 

29. 아집(我執)은 배타적 정신이라, 남이 곧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를 점점 더 축소시키는 무지이니라.

 

30. 중생들은 잘하고 착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잘하고 착하게 하는 사람, 곧 나를 찾는 공부는 할 생각을 못하나니라.

 

31. 중생들은 인간이 만물(萬物)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색(思索)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사색하는 그 자체를 알아 볼 생각은 하지 못하나니라.

 

32. 중생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면서 학자(學者)인양 종교가(宗敎家)인양 하여 제법 인생 문제를 논하는 것은 생명을 잘라 놓고 생명을 살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나니라.

 

33. 이론(理論)이 끊어지고, 학론(學論)이 다한 곳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는데, 내가 나를 찾기 전에는 인생 문제의 해결은 결코 불가능하나니라.

 

34. 인생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연이나 희망이 아니요, 진아(眞我)를 체달하여 이사(理事)에 임의로 처리하게 되어야 하나니라.

 

35. 중생들은 알 줄만 알고, 모를 줄은 모르나니라.

 

36. 알지 못함을 알면 철저히 아는 것이니, 정말 아는 법은 알지 못할 줄을 능히 알 때에 비로소 진아에 체달되나니라.

 

37. 지구(地球)라는 한 모태(母胎)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同胞)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니라.

 

1. 佛法이라고 할 때 벌써 佛法은 아니니라.

 

2. 일체의 것이 그대로 佛法인지라 佛法이라고 따로 내세울 때에 벌써 잃어 버리는 말이니라.

 

3. 물질은 쓰는 것이요, 정신은 바탕인데, 물질과 정신의 一單化를 佛法이라 하나니라.

 

4. 佛法은 어느 시대 어떤 인간의 호흡에도 맞는 것이니라.

 

5. 佛法을 듣고 생명의 중심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니라.

 

6. 佛이라는 것은 마음이요, 法이라는 것은 물질인데, 佛法이라는 名相이 생기기 전에,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이미 존재한 것이니라. 질그릇 같은 나를 버리면 七寶의 그릇인 法身을 얻나니라.

 

7.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손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하고 일하는 그 정체를 알아야 참된 말과 일을 하는 정작 인간이 되나니라.

 

8. 佛法은 육체나 영혼의 책임자이다. 책임자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 얼마나 불안한가. 이것을 알면, 곧 佛法에 돌아오게 될 것이니라.

 

9. 世間法과 佛法이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하나니, 이 不二法을 證得해야 참 인간이 되나니라.

 

10. 佛法을 알면 俗人이라도 중이요, 중이라도 佛法을 모르면 이는 곧 俗人이니라.

 

11. 여러 가지의 자물쇠를 열려면 여러 가지의 열쇠가 필요한 것같이 百千三昧의 無量妙理를 解得하려면 백천만의 지혜의 열쇠를 얻어야 하나니라.

 

12. 佛法을 否認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否認하는 것이요, 佛法을 배척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니, 이는 곧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이니라.

 

13. 소리소리가 다 법문이요, 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의 眞身이건만, 佛法 만나기는 백천만겁에 어렵다고 하니, 그 무슨 不可思議 한 도리인지 좀 알아 볼 일이니라.

 

1. 중이라 함은 일체 名相法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중이라 하니, 萬有의 주인이요, 天上 인간의 스승이 바로 중인 것이다.

 

2. 修行人인 중은 부모 처자와 일체 소유를 다 버림은 물론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나니라.

 

3. 중은 운명의 지배도 아니 받고, 염라국(閻羅國)에도 상관이 없어야 하며, 남이 주는 幸․不幸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나니라.

 

4. 修道生活을 하는 것은 성품이 白蓮같이 되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니라.

 

5. 짧은 일생을 위하여 하는 세속 학문도 반평생을 허비해야 하거든, 하물며 未來世가 다함이 없는 前程을 開拓하려는 그 공부를 어찌 천년을 멀다 하며, 만년을 지루하다 할 것인가?

 

6.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소극적인 학교 교육도 필요를 느끼거든, 하물며 생사윤회를 永斷하고 참된 인간을 완성시키는 參禪교육은 참으로 필요하다. 전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니라.

 

7. 세상 사람은 有爲로 법을 삼지만 중은 無爲1)로 법을 삼나니라.

 

8. 세상 사람은 무엇이든 애착심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중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끊고 일을 하나니, 부처님이나 조사에게까지도 애착심을 가지지 말 것이니라.

 

9. 세상에서는 血統으로 代를 이어 가지만, 중은 자기를 깨달은 정신, 곧 道로 대를 이어 가는데, 세상에서도 조상의 香火2)를 끊게 되면, 그에서 더 큰 죄가 없다는데, 불자가 되어 중으로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는다면 그 죄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10. 예전에는 항간(巷間)의 부녀자 중에도 불법을 아는 이가 있어 종종 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있었건만 지금은 민중을 교화할 책임이 있는 중이 도리어 불법을 모르니, 어찌 암흑 시대라 하지 않을 것이며, 시대가 이토록 캄캄한데 민중이 어찌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11. 불교의 흥망이 곧 인류의 행․불행이니라.]

 

12. 언제나 불교의 幸運과 함께 세상에 平和가 同行해 오게 되나니라.

 

13. 공부하는 스님의 누더기는 임금의 용포(龍袍)로도 능히 미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임금의 용포 밑에서는 갖은 業을 짓게 되지만 중의 누더기 밑에서는 업이 녹아지고 智慧가 밝아지나니라.

 

14. 중으로서 속인의 富貴를 부러워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설움과 恨이 남았다면 게서 더 부끄러운 일이 없나니라.

 

15. 이 우주 전체가 곧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體達)된 인간을 중이라 하나니라.

 

16. 중은 자신의 노력으로 수입되는 물질이라도 사용하지 못하나니 중의 것은 다 三寶之物3)이기 때문이니라.

 

17.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중의 名目으로 施物을 얻어 쓰는 것은 사기취재(詐欺取財)니라.

 

18. 중 노릇을 잘못하면 三家4)에 죄인을 면치 못하나니라.

 

19. 자성이 더럽혀지기 전인 어렸을 때에 출가하여 평생을 무애(無碍)하게 중노릇을 잘하여 마치는 이는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 福이니라.

 

20. 요사이는 施主의 밥만 허비하는 중이 많기 때문에 진실하게 공부하는 중의 생활을 보증해 주는 신도가 없게 되었으나, 道를 위하여 하는 노력은 곧 道가 되나니, 道를 위하여는 至惡의 경지에서도 용기 있게 노력하여 정진해야 하나니라.

 

21. 思想的 방향은 精進에서만 確定을 하게 되고, 사상적 방향을 정하게 되어야 인생의 正路를 걷게 되고, 인생의 정로를 걷게 되어야 인생의 永遠劫에 장래를 보증할 수 있나니라.

 

22. 세속 일은 잠시라도 쉼이 있지만, 중은 精進하는 일을 꿈에라도 放心할 수 없나니, 털끝만한 틈이 벌어져도 온갖 마장(魔障)이 다 생기나니라.

 

23. 百千萬人을 죽인 殺人囚라도 허심탄회(虛心坦懷)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정진하는 중만 되면 백천 만인의 怨結을 푸는 동시에 백천 만겁에 지은 죄업이 몽땅 소멸되나니라.

 

24. 중생이 보고 듣고 일하는 것이 모두 허무하게 되는 것은 妄我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25. 중생은 時空間에 의하여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집착된 까닭에 시공의 제재하(制裁下)에 六道輪廻를 면치 못하나니라.

 

1. 불교라고 주장할 때 벌써 불교 교리와는 어긋난 것이니, 불교 교리는 아집(我執)을 떠난 교리이기 때문이다.

 

2. 불교의 종지(宗旨)가 악(惡)을 징계하고 선(善)을 장려하는 종교가 아니라, 선악(善惡)이 다 불법인 까닭에 천당(天堂)․극락(極樂)의 즐거움이나, 반대로 지옥의 극고(極苦)한 세계가 다 나의 창조물인 까닭이니라.

 

3. 먼저 대가(代價) 없이는 얻어지지 않고, 노력 없이는 성공이 오지 않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니라.

 

4. 일체는 그대로 불(佛)이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나 조직을 세워서 가르치지 않고, 기류 차제(機類次第)로 가르칠 뿐이니라.

 

5. 불교의 유심(唯心)이란 유물(唯物)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니라.

 

6. 허공[虛空: 自我․自性]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 代表的인 人格者를 佛이라 함]을 낳고, 인격은 행동[現實]을 낳나리라.

 

7. 세상에는 물심양면이라면 우주의 총칭(總稱)인 줄 알지만,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나니라.

 

8. 불교에서는 신(神)을 초월하여 법신(法身)이 있고, 영혼 위에 진인(眞人)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증득하는 것으로 구경(究竟)을 삼는데, 육신(肉身)과 신(神)과 영혼(靈魂)의 근본이 법신이요, 그 근본을 잃어버린 육신과 신과 영혼이 서로 교환 이동하는 생활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간이니라.

 

9. 불교는 전인류의 자아(自我)를 완성시키는 교육 기관이니, 다종(多宗)․각법(各法)의 종교가 다 진아(眞我) 완성의 가교(架橋)요 과정이니라.

 

10. 불교 교리의 오의(奧義)는 표현할 수 없는 법이지만, 각자가 다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할 수 있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되 주고 받을 수 없는 그 법을 전불(前佛)․후불(後佛)이 상속(相續)하여 가나니라.

 

1. 중은 반드시 대중(大衆)에 처(處)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하여야 하나니라.

 

2. 중은 당파(黨派)를 짓지 않아야 하나니, 우리라는 구분이 있다면 벌써 중의 정신을 잃은 소리니라.

 

3. 중은 물질 본위로 사는 동물적(動物的) 인간계(人間界)를 떠나야 할 것이니, 너와 내가 하나인 정신세계의 집단 생활이 중의 생활이니라.

 

4. 대중 시봉(大衆 侍奉)이 곧 부처님 시봉이니라. 5. 속연(俗緣)을 끊고 출가하여 동수정업(同修淨業)하는 도반(道伴)을 서로 존중히 여겨야 함을 알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어른에게는 공대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6. 이미 사좌(師佐)의 의(義)를 맺었거든, 스승은 상좌를 지도하고, 상좌는 스승을 존경해야 하나니라.

 

7. 중은 먼저 시비심(是非心)을 끊고 지내되, 남이 나를 시비할 때를 당하여 나의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반성하여 고치고, 만일 나의 허물이 없을 때는 나의 일이 아니니 상관치 말라. 이와 같이 대중에 처하면 불안한 시비가 없고, 항상 편안하리라.

 

8. 중은 일이나 물건을 대할 때 나의 이해를 생각하지 말고, 일의 성취와 물건의 보존이 대중에게 공익(共益)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나니라.

 

9. 동무의 허물을 볼 때에 나의 잘못으로 느끼면 그 허물을 다른 이에게 알릴 수 없나니라.

 

10. 어려운 일은 내가 하고, 좋은 음식은 남을 줄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1. 마음은 무한대(無限大)한 것이니, 마음의 사자(使者)인 몸의 능력도 제한되지 않은 것이니라.

 

12. 중은 공익심(公益心)과 평등심(平等心)으로 누구나 포용(包容)할 수 있어야 하나니라.

 

13. 중은 곤충(昆蟲)에게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용심(用心)을 가져야 하나니라.

 

14. 횡재(橫財)를 기뻐하지 말라. 잃어버린 임자의 슬픔이 있나니라.

 

15. 중은 먼저 인욕(忍辱)할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16. 대중의 욕됨을 내가 혼자 받을 마음을 가지며, 대중을 위하여서는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게 되어야 하나니라.

 

17. 대중에 처하여 각자가 자기의 임무만을 잘 충실히 지켜 가면 대중 질서에 조금도 어지러운 일이 없나니라.

 

18. 공적(公的) 일을 당하여 괴로움을 면할 생각을 한다든가 자기 욕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타락(墮落)이니라.

 

19. 누가 내게 역량(力量)에 못 미칠 노력을 요구하더라도 원망(怨望)을 말 것이니, 못 미친다는 것은 나의 정신력이 못 미친 까닭이다.

 

1. 숨 한 번 마시고 내쉬지 못하면, 이 목숨은 끝나는 것이니,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정진력을 못 얻으면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에 내 정신이 아득하여져서 인생의 길을 잃어 버리게 되나니라.

 

2. 죄(罪)의 원천(源泉)은 노는 것이니라.

 

3. 자기면목(自己面目)을 찾는 정진(精進)은 아니하고 재색(財色)에 눈부터 뜨게 된다면,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제도할 수 없나니라.

 

4. 조그마한 나라를 회복하려 해도 수많은 희생을 요(要)하는 것이니, 전우주(全宇宙)인 나를 도로 찾으려 할 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예산을 각오해야 하나니라.

 

5. 누구나 물건을 잃어버린 줄은 알게 되지만,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은 모르나니라.

 

6. 미물(微物)을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후일(後日)에 나도 미물이 되나니라.

 

7.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정말 내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정말 나에게 고리(高利)의 저금(貯金)이 되나니라.

 

8. 내 잘못을 남에게 미는 것은 가장 비열(卑劣)한 일이니라.

 

9.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실행함만 못하나니라.

 

10. 방일(放逸)은 온갖 위험을 초래하나니라.

 

11. 말하기 전에 실행부터 할 것이니라.

 

12. 총과 칼이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업이 사람을 쏘고 찌르나니라.

 

13.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貪)․진(嗔)․치(痴)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14. 함이 없는 곳에 참 일이 이루어지고, 착함을 짓지 않는 곳에 정말 착함이 있나니라.

 

15. 참된 말은 입 밖에 나가지 않나니라.

 

16. 허공(虛空)이 가장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17. 네가 네 생각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

 

18. 허공(虛空)이 뼈가 있는 소식을 알겠느냐?

 

19. 귀신 방귀에 털나는 소식을 알겠느냐?

 

20. 등상불(等像佛)이 법문(法門)하는 소리를 듣겠느냐?

 

21. 생각이 곧 현실이요, 존재니라.

 

22. 생각이 있을 때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나타나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 바탕은 곧 무(無)로 돌아가나니라.

 

23. 토목와석(土木瓦石)이 곧 도(道)니라.

 

24. 백초(百草)1)가 곧 불모(佛母)니라.

 

25. 부처를 풀밭2)속에서 구할지니라.

 

26. 무심(無心)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스승이니라.

 

27. 알려는 생각이 끊어질 때에 일체를 다 알게 되는 것은 무에서 일체의 것이 다 발견되기 때문이다.

 

28. 허수아비가 사람에 지나는 영물(靈物)임을 알아야 하나니라.

 

29. 얻는 것이 없으면 잃는 것도 없나니라.

 

30. 유용(有用)한 인물은 한가(閑暇)한 시간을 가질 수 없나니라.

 

《만공선사 法訓》

출처 : 진공묘유眞空妙有
글쓴이 : 원융무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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