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이란???
불성 (佛性 )
보조국사는 <수심결>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고픈 줄 알고, 목마르면 마른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그것이
불성(佛性)이다.”
임제스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虛空)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그대 눈앞에 뚜렷이 홀로 밝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그것만이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 줄을 안다.”
<경덕전등록에 보리달마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견성(見性)한 이가 부처입니다.”
“스님께서는 견성을 했습니까?”
“나는 견성을 했습니다.”
“그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性品)은 작용(作用)하는 데 있습니다.”
“그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작용하고 있는 데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게 있단 말입니까?”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체(體)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 작용할 때는 몇 군데로 나타납니까?”
“그것은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그 여덟 군데를 말해 달라고 하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쥐고, 발에 있으면 걸어 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누리를 다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佛性)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었다.
----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肉體)는 지각능력(知覺能力)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불성(佛性)이라는 말은 ‘나’라는 생각이 떨어져나가고 남아있는
순수한 성품, 즉 순수의식(純粹意識)입니다.
순수의식은 비이원적(非二元的)이죠.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더럽다, 등과 같은 분별(分別)을 하지 않습니다.
순수의식이 눈에 있으면 형상(形像)을 인식(認識)합니다.
하지만 ‘나’라는 생각이 나타나 형상이 아름답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판단하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순수의식이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에고가 나타나 냄새가 향기롭다느니 역겹다느니 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냅니다.
순수의식은 우주를 감싸 안을 정도로 넓은 존재이지만 ‘나’라는 생각이 나타나
육체를 자기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유한한 중생이라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서 존재하지도 않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수행(修行)을 하는 것입니다.
순수의식은 자신을 ‘나’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스스로 강력하게 ‘나야 나!, 나 좀 알아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의식과 ‘나’라는 생각을 구별(區別)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라는 생각은 단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썽일 일으킵니다.
무지와 망상에 뒤덮여 주체와 대상을 나누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망상을 떨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납니다.
‘나’라는 생각이 육체를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이 ‘나’라는 생각은 순수의식과 육체 사이를 매개하며 활동하는 유령(幽靈)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찾아보려고 하면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歸宗和尙)에게 여쭈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아마도 그대가 믿지 않을 것이다.”
“스님의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닦아나가야(保任)합니까?”
“하나의 가리움이 눈에 있으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니라.”
이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허공꽃 : 山河大地 森羅萬像 = 夢幻泡影露電)
눈앞의 가리개는 진실(眞實=純粹意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나’라는 생각입니다.
상근기는 이런 가르침을 듣는 순간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하근기는 너무 오랫동안 ‘나’라는 생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놓아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조사하며 '바른 견해‘를 키우고 집중수행을 합니다.
옆에서 ‘나’라는 생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오직 순수의식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버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왜 그 말썽 많은 그 한 생각을 놓아버리지 못할까요?
- 무념스님 -
'삶의 향기 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있는 '불성'으로 살아진다. (0) | 2011.08.04 |
---|---|
불성을 살리는 방법 (0) | 2011.08.04 |
'생각'을 이해하기--- (0) | 2011.08.04 |
[스크랩] 사랑을 위한 7가지 필수 비타민...♡ (0) | 2011.08.04 |
[스크랩] 뜻(志) (0) | 2011.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