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금강경 독송 백일기도 설법들/법상스님

장백산-1 2011. 9. 20. 18:02

 



오늘이 백중, 우란분절입니다.
저도 오전에 법회와 천도를 하고
조금 전에 법당이 조용해 졌습니다.

모처럼 시끌 시끌하던 법당이
갑자기 썰물 빠지듯 쏴~ 하고 가시고 나니까
이제 다시 침묵과 정적이
나른하게 찌는 오후 햇살과 함께 어우러져
마음을 짠하게 적셔주고 있습니다.

오늘이 백중이면서,
수능 D-100일이기도 하다고 들었습니다.
몰랐는데 우리 100일 기도도 바로 오늘 시작하니까
이래저래 기도를 시작하기 참 좋은 시절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도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참 행복한 가르침이구나,
참 밝고 광명에 빛나는 공부를 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알짝 꽃잎을 틔우는 듯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금강경,
경의 이름만 들어도,
내 입에서 그 경전의 제목만 흘러 나오더라도
마치 그 지혜의 광명에 녹아드는 듯,
그 가없는 지혜의 빛이 나를 감싸는 듯 평안을 느낍니다.

이 세상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세계가
더 드넓고 광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다인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혜롭게 살피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와 허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야,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잘 나오고,
열심이 일하면 돈도 잘 벌고,
인과적으로 딱딱 떨어져야 하는데,
사실 모든 것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를테면 열심히 일해도 돈벌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대충 대충 하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 잘 사는 사람도 있어요.
멀쩡한 사람이 하루 아침에 큰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잘 나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추락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냥 그냥 살던 사람이
어떻게 인연을 만나 하루 아침에 성공시대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진급하는 것은 당연하고,
간교하게 술수를 잘 쓰는 사람은 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착한 사람이 잘 살고,
남들 괴롭히며 이기적인 사람이 못 살아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치로만 따진다면
그래야 하는데,
이 세상이란 곳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단편적인 시선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세상 그 깊은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진리가 숨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려면
몸과 말과 생각으로 업을 잘 지으면 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의 주인이 되려면
기도와 수행, 비움과 나눔 그리고 깨어있는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좌우하는 것은
수행이고 기도의 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수행을 하면
눈에 띄게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감각적으로 금방 무언가를 느끼거나 성취하는 것도 아니며,
때로는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도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움직이는 거다 보니까
우리의 육근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참으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면,
눈에 띄는, 눈에 보이는 어떤 변화는 쉽게 감지되지 않을 지 몰라도,
육신의 눈 그 너머에 있는 존재계의 세계에서는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감로가 샘솟는'
엄청난 존재 밑바탕에서의 본래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야,
열심히 일하면 돈 버는 게 눈에 딱 보이잖아요.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한만큼 눈에 딱 보이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이면의 세계를 깨달으신
수많은 인류의 스승, 선지식, 스님들이
왜 그렇게 수행하라고, 정진하라고, 게으리지 말라고 다그치겠습니까?

그 분들의 눈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뻔히 보이니까 수행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고 있지 지혜의 세계, 법계의 소식에는
깜깜무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수행하라고 일러줘도
조금 하다가 그만두고 조금 하다가 그만두고
발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스승들을 믿고,
수많은 역사를 거쳐가신 스님들을 딱 믿고,
수행과 정진에 내 삶을 바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움직이는 힘,
그것이 바로 수행이요 정진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굳게 믿고
게으르지 말고, 방일하지 말고 100일 동안 나아가 봅시다.

[아함경]에

"열반은 무엇으로 음식을 삼습니까?"
"열반은 방일하지 않는 것으로 음식을 삼는다.
그러므로 방일하지 않는 것을 타고 무위에 이르느니라."

모든 착한 법 중에서는
방일하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방일하지 않고, 수행에 게으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 독경 소리를
수미산 같은 악업이 무너지는 소리로 알고,
부처님과 수많은 착한 선신들이 찬탄하는 소리로 알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 주인되는 소리로 알며,
내 안에 부처가 깨어나는 소리로 알고
오늘부터 밝은 마음으로 함께 정진해 나갑시다.

 

............

 

인간 세상의 50년이라야
사천왕의 하루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천왕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500년 한 것이 사천왕의 수명이다.

인간의 100년이 도리천의 하루다.
이 도리천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1,000년 한 것이 도리천의 수명이다.

인간의 200년이 염마천의 하루다.
이 염마천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2,000년 한 것이 염마천의 수명이다.

인간의 400년이 도솔천의 하루다.
이 도솔천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4,000년 한 것이 도솔천의 수명이다.

인간의 800년이 화락천의 하루다.
이 화락천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8,000년 한 것이 화락천의 수명이다.

다시 인간의 1,600년이 타화락천의 하루다.
이 타화락천의 하루에서
30일을 한 달로 하고,
열 두 달을 일 년으로 해서,
16,000년 한 것이 타화락천의 수명이다.

[중아함경]

우리가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온갖 욕심 부리고, 돈 벌고, 좋은 집 사고, 땅 사고,
투기 하고,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아둥 바둥 해 봐야
그게 사천왕의 이틀 밖에 안 되고,
도리천의 하루도 안 되며,
염마천의 12시간도 안 되고,
도솔천의 6시간, 화락천의 3시간,
타화락천의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일 뿐이다.

하늘 세계에 있다가 인간으로 윤회를 하여 내려왔더라도
일평생을 아웅다웅하며 온갖 욕심 채우고 살다 돌아가면
그것이 타화락천에서는 1시간 정도 잠시
산책 다녀 온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일평생이 어찌 생각해 보면 잠시 잠깐이고,
또 길게 느낀다면 무한히도 긴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이처럼
고정된 실체나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심리적인 시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환상일 뿐이다.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에 따라 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제각기 상대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는 일평생이 찰나와도 같을 수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일평생이 억겁과도 같이 길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시간이란,
내게 주어진 생이란,
사실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생생하게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 시간을 기도와 명상으로 온전히 깨어있게 존재했다면
그 사람에게 한 시간은
지난 영겁의 업장을 씻고
깨달음을 씨앗을 뿌려 다 거두어 수확까지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적인 시간관에서는
'돈오'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지난 억겁의 업장을 닦고 무명을 닦기 위해
시간적으로 무량한 세월 동안
끊임없이 닦고 닦아 많은 세월을 수행해야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박에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집중과 깨어있음으로 존재했다면
깨달음의 빛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게는 단박이라고 느낄지라도
법계의 시간에서는 영겁을 다 담아낼 수도 녹여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인류의 스승, 스님들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생의 전부로 알고
그 순간에 내 온 존재를  쏟아 부어 정진하라고 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은 단순한 '짧은 어느 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이 무량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한 시간 깨어있는 순간을 보내는 것은,
지금 '금강경'을 독경하는 시간은,
지금 잠시 마음을 관하는 순간은,
바로 영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량수의 시간을 가꾸는 순간이다.

그러니 하루의 바쁜 시간 가운데에서라도
잠시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마음을 관하고,
금강경을 독송하고, 염불을 하고, 수행에 들 일이다.

우리의 하루로 보자면 잠시 잠깐의 시간일 수 있지만,
그 수행의 시간이,
무량수 부처님의 시선에서는
무량한 수명의 시간을 닦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루 종일을, 아니 일평생을,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보냈다면,
빈둥빈둥 놀며 보냈다면,
산더미같은 일의 늪에 빠져 깨어있지 못하고 보냈다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남들보다 잘 살아볼까,
나를 내세워볼까 하는 아상으로 보냈다면,
그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이
온전히 깨어있는 보살의 '찰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백년을 살더라도
어리석은 중생으로 깨어있지 못한 채 사는 것 보다
비록 단 10분을 보내더라도
깨어있는 정진으로 사는 것이
법계의 세계에서는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비록 백년을 살더라도
계명을 깨뜨리고 마음의 고요를 잃는다면,
바르게 행하며 마음의 고요를 지니고
단 하루 사는 편이 더 낫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지혜롭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하다면,
지혜롭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나고 죽는 이치를 모른다면,
나고 죽는 이치를 알고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죽음이 없는 도를 모른다면,
죽음이 없는 도(열반)를 알고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가장 높은 진리를 모른다면,
가장 높은 진리를 알고
단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

내 삶에서 금강경 1독 하는 시간이,
잠시 마음을 관하는 시간이,
염불하고, 참선하며, 경전을 독송하는 수행의 시간이
비록 짧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어리석게 사는 수백생의 삶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하물며 100일 동안 금강경을 독송하고,
몇 번이고 하루에 금강경을 펴고 독송 정진하는 시간이라면
그 찰나 찰나가 모여, 그 정진의 기운이 모여
우리의 삶을 얼마나 깨어있고 아름다우며 평화롭게 바꾸겠는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짧은 시간이
법계의 시간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몸 받은 일평생의 세월보다, 백 년의 세월보다
더 값진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그런 정신으로
금강경에 내 삶의 모든 공경심과 집중의 마음을 담아
정진에 정진을 해 나갑시다.

 

...............

 

금강경 100일 기도를 맞아,
이렇게 금강경의 바다에 푹~ 빠져 있을 때,
금강경의 가르침이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기에
이렇게 너도 나도 금강경 금강경 하는지
한 번 공부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들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경은 하지만
아무런 뜻도 모르고,
그 뜻에 담긴 의미와 실천적인 가르침을 모른다면
백날을 읽더라도
국어책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지 모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누차 설명하였듯이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에도 핵심 중 핵심이며,
인류 역사상 이런 경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며 우리에게 감사한 일인지
그 깊은 의미가 우리 안에 파도쳐 흘러 들어오게 된다면
분명히 알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참에,
금강경 100일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금강경에 대한 의미를 함께 공부하는 계기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에 올려 놓았던 금강경 강의를
조금 손 보아
금강경 100일 기도 기간 동안
평균 3일에 한 분 정도를 올려드리도록 할까 합니다.

이 참에 전에 강의 해 놓았던 금강경 텍스트를
저 또한 다시 한 번 훓어 보면서
수정할 부분은 수정도 하고,
조금 더 매끄럽게 하여
100일기도의 회향에 맞추어
'금강경 강설' 을 책으로 내어 회향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까 합니다.

그러면 총 32분이니까
금강경 100일 기도의 회향에 맞춰
금강경 32분을 모두 공부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금강경은 한 번 봐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전에 보셨던 분이시다라도
다른 도반들과 함께
이번 금강경 기도의 시기에
다시한번 복습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앞으로 3일에 한 번씩
금강경 강의를 한 분씩 끊어서 올려드릴테니,
각자 공부를 하시고,
도반 법우들과 함께 피드백하며
경전 강의를 토의하고 마음나누기 한다는 마음으로
경전강의 아래 댓글란에
'경전 공부 나눔'의 토의의 장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에 대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의문나는 점도 나누고,
삶 속에서 깨닫게 된 점도 함께 나누며,
그 가르침이 주는 실천적 의미도 함께 공유하여,
금강경 공부와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좋은 기회에
금강경 기도 함께 하시는
혹은 함께 하지 못하시는 분들이라도
동참하셔서 '수행일기'와는 별도로
이 곳에 '금강경 강설의 안거'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금강경 경전의 제목과
금강경 제1분 법회인유분에 대한 강설로 시작합니다.

[금강경 강설을 시작하며]

[금강경]은 많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에서도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가섭과 아난 등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여
그동안 부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수많은 법문들을 결집하게 됩니다.
처음 결집할 때는 글로 남기지 못하고
부처님 법문을 옆에서 가장 많이 들은 아난 존자를 비롯하여 한 사람이 먼저 말하고
다른 대중들이 부처님 가르침이 틀림없다고 결정한 게송들을
모든 대중들이 함께 합송하여 외움으로써 결집을 이루었으나,
후대에 오면서 글로 남기어 온전한 결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외고 합송한 것들이
후대에 경전으로 편집이 되었으니 이것이 [아함경]입니다.
아함경이 부처님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부처님 열반 이후 약 500여 년이 지나면서
[아함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다른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대승경전들 가운데에서 가장 초기에 성립된 경전이
600권이나 되는 [반야경]입니다.
이 반야경을 토대로 하여
[법화경], [화엄경] 등 다른 여러 대승의 경전들이 성립된 것이지요.

[금강경]은 600권의 [대반야경] 중 577부에 들어있는
[능단금강분]을 말하며 그 구체적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혹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이 금강경은 600권이나 되는 반야경 가운데에서도
경의 중심이 되는 사상인 반야사상, 공사상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짧고 간략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방대한 분량인 반야경을 공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널리 두루 읽혀지는 경전인 것입니다.

이 금강경도 중국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지만
현재 우리들이 독송하며 공부하고 있는 [금강경]은
요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번역본입니다.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지요.

앞으로 전개될 금강경 강의에서도
물론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기본으로 하여 설하게 될 것이지만,
구마라집의 번역본은 산스크리트 원전과 비교해 볼 때
다소 미흡하거나 내용이 빠져 있는 부분도 더러 있기 때문에
경전의 내용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면
산스크리트 원문 및 현장스님의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경전을 강의 해 가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해석면에서
기존의 구마라집 본 해석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들도
눈에 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스님의 번역을 비교해 가면서
그 이유를 밝히면서 강의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그동안 이기영 박사님을 비롯하여
두어 분께서 구마라집본과 함께 비교하기 쉽게 해석을 해 놓았으며,
특히 송광사, 칠불암 등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시다가
10여 년 인도에서 유학하여 산스크리트와 빠알리, 아르다마가디를 배우고
돌아오셔서 빠알리 삼장의 번역작업에 몰두하고 계신
각묵스님께서 ‘01년 9월 금강경 산스크리트 원전 분석 및 주해를
구마라집본 및 현장본과 함께 비교 분석하여 설명해 놓은
‘금강경 역해’라는 책을 내어 놓으셨기에
그 원문을 비교 분석하여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금강경은 전체 32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은 아니고
인도의 무착이나, 세친 중국 양나라의 소명태자 등이
세분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따로이 분을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지금의 32분 분류는 양나라의 소명태자의 분류법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중국의 육조 혜능 스님, 우리나라의 함허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금강경에 주석을 달고
쉽게 해석을 한 책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만큼 금강경은 불교를 공부하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저 언덕에 이르는 뗏목과도 같은 소중한 경전인 것입니다.

수많은 금강경 강의 책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글자에 얽매인 해석보다는
전체적으로 금강경의 큰 뜻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금강경의 가르침이 생활 속의 실천 수행이 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깨달음을 어떻게 구체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하고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금강경을 아무리 잘 읽고 외고 해석하여 공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생활 속에 생생히 뿌리내려
삶을 변화시키고, 마음의 평화로움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금강경의 깨달음은 많이 희석될 것 같습니다.

이번 금강경 강좌를 통해
생활 속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이 어떻게 실천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마음 공부를 함께 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쪼록 앞서 반야심경과 보왕삼매론 강의에 이어
금강경 또한 많은 법우님들께서 함께 공부하시고 실천하셔서
마음 공부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길 발원합니다.

마침 100일 금강경 독송 기도를 함께 하고 있느니만큼
금강경 강의가 우리의 기도 수행에
더 큰 힘이 되고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가르침의 세계' '금강경' 편에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전 제목과
제1분 법회인유분에 대한 강설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저희 도량에서도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사시가 되면 금강경 기도가 한창입니다.

오늘도 금강경 기도를 마치고
앉아서 공양을 하는데,
보살님들께서 금강경 기도에 한참 신이 나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3독 하기도 힘들다고 하시더니,
몇 몇 분께서 5독, 7독, 혹은 10독 이상을 하시니까
또 경책이 되어
다른 보살님들도 함께 열심히십니다.

작년에 했던 것 처럼,
매일 금강경 100일 기도 기록표를 만들어 두고는
매일 몇 독 했는지를 기록할 수 있게 해 두었더니
100독을 훌쩍 넘어 200독에 가깝게 독송을 해 나가시는 분도 계시고,
처음에는 전혀 생각을 못하셨던 분들께서도
조금씩 금강경 기도에 재미를 붙여 가고 계신 것 같습니다.

법우님들의 금강경 독경은 어떠신지요?
처음 시작하려던 그 마음이
이제 많이 식어가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또 혹 열심히 하시다가도
주말만 되면 못 하게 되고,
그렇게 되다보니 더욱 힘들어져
벌써 아주 포기를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실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하루, 이틀, 혹은 한 일주일 정도
그냥 못 하고 아주 포기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더라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벌써 포기한다면
그게 내 근기가 그것 밖에 안 됩니다 하고
자책하는 것 밖에 되지를 못합니다.

한 일주일 이상 못 하셨더라도 좋고,
몇 일 빠지셨더라도 좋습니다.
하루 이틀 빠지셨다면,
아직도 80여 일이 더 남아있으니까
남은 기간 동안 조금씩 더 열심히 하면 됩니다.

법당에 한 보살님께서는
이번이 기도라는 것을 처음 해 보신다면서
처음에는 금강경을 독송하는 방법을 몰라
그 두꺼운 법요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독송을 하셨다는 분이 계세요.

금강경을 한 번 독송하는데 처음에는
한문으로 해도 한 시간이 꼬박 넘게 걸리셨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25분으로 단축이 되셨다고 하세요.
그런데도 처음에는 한 3독 정도를 하시다가,
금강경 기도에 푹 빠지셔서는 계속 늘려가시더니
이제는 매일 7독 이상을 하시고,
또 한 몇 일은 10독을 넘게 금강경 삼매 속에 빠지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무더운 한낮에 오히려 에어콘도 다 끄고
혼자 조용히 점심 먹고 앉아 밤이 될 때까지 계속하신다며
계속하니까 하루 10독이 넘더라도 하시며 수줍게 웃으시데요.
그러면서 금강경 독송하는 시간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더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처음 독송하시는 분들은
아직도 한 독 다 끝내는데 20분 이상 걸릴지도 모르지만,
계속 꾸준히 독송하다보면
한 10분 내외면 한 독을 다 끝낼 수도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금강경 하루에 10독 이상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라는 것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면
그게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고 같고 하여
밍숭 맹숭해 지다가도
그냥 어느 때 뭐랄까요 탄력이 딱 붙고
힘이 붙어서 계속 하게 되다보면
금강경 기도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하루 10독 이상 하는 것도 오히려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포기하시려는 분들
그 마음 딱 접으시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100일 중에 반도 못 해보고 포기하면 안 되지요.
하루 이틀 못 했더라도
그 부담스런 마음 탁 놓아버리고,
그저 100일 동안 하루 7독씩 해서 700독 이상 하겠다거나,
아니면 500독, 300독, 혹은 1,000독을 하겠다거나 하고
딱 정해 놓고서는 하루 이틀 빠진 것 개념치 말고
그냥 되면 되는대로 하고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꾸준히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중심을 잡게 해 주는 지 모릅니다.
금강경 기도 독경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재앙들을 다 좇아준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밝고 원만하다는 뜻입니다.

금강경 독경 기도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닥쳐올 지 모르는
우리 삶의 난관이나 어려움, 괴로운 경계들을
미리 미리 닦아 나갈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우리 삶이 언제 어떻게 될 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 미리 미리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되요.
하기야 미리 미리 닦는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매 순간 순간 닦지 않으면 안 되니 말입니다.

금강경 기도를 하다가 느끼신 분도 많으시겠지만,
금강경 독경을 집중해서 하다보면
이런 저런 재앙과 어려운 일들도
신기하게 밝게 잘 되어 가는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금강경 독경 수행의 밝은 기운이
우리 삶의 험난한 일들을 밝게 돌려줍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다거나, 힘든 일이 있다거나,
누가 말썽을 피운다거나, 심리적으로 어렵다거나,
혹은 몸이 좋지 않다거나, 인간관계 때문에 어렵다거나,
그 어떤 일, 어떤 경계라도 좋으니
여여한 평상심을 깨는 그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 마음에 대고 금강경 독경을 계속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경계로 휘둘리는 마음을
그냥 무시하시고, 그냥 그건 오니까 오는대로 와라,
올테면 와라 하고는 턱 내맡겨 놓고는
다만 금강경만을 꾸준히 독경하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금강경 진리의 가르침이,
진리의 법신이 알아서 다 밝게 밝게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다만 금강경 독경을 할 뿐!'
이런 저런 분별이나 번뇌를 다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금강경 독경에 나를 내맡기고 가라는 것입니다.

금!강!경!
이 한 마디 말만 들어도
우리 내면에서는 텅 비어 밝고 원만한
지혜의 소식이 봄꽃 사태 터지듯 피어오릅니다.

하물며 금강경 그 밝은 지혜의 가르침을
수지독송, 신수봉행, 위타인설 하는 공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할까 말까 하고 고민되는 마음,
잘 되지도 않는데 그만둘까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장인 줄 잘 아시고,
또 그 마음이 고마운 스승인 줄 잘 아시고,
잘 되건 안 되건
상관하지 말고 '그냥'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잘 될 때도 공부가 잘 되는 것이고,
잘 안 될 때도 공부가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분별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분별 없이 다만 그냥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고민하지도 말고,
되면 되는 대로 더 열심히 정진하고,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그 마음 관하면서 조금씩이라도
놓치지 말고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냥 정진 합시다.

 

............

 

새벽 우풍이 차
어제부터는 보일러를 조금씩 돌리고
잠에 들었습니다.

날씨라는 것이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칩니다.

하늘도 그렇고,
구름도 그렇고,
바람도 그렇고,
숲도 그렇고,
제 계절이 오면
어찌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새벽 찬 바람이
마음 한 켠을 짠하게 훔치고,
밤 공기도 제법 가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기도 할 때도
앞뒤 좌우로 활짝 열어 둔 문 사이로
제법 싸늘한 바람이
뼛속 깊은 곳까지 씻고 가 주는 듯
싱그러운 깨임의 여운을 남기곤 합니다.

계절이 이렇게 변한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몇 번이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기도하기, 정진하기
이보다 더 좋은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낮에도 법당에 앉아 문을 활짝 열고 있으면
가을의 깨어있음을 알리는 바람이
수행자의 정신에 맑고 청량한 감로를 선사해 주는 듯 합니다.

법우님들의 이 가을 정진은 어떠하신지요?

금강경이 되었든,
대비주가 되었든,
화두나 염불이 되었든 간에,
어떤 하나의 방편에 집중하고 관하다 보면
처음에는 잡념도 생기고,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올라오곤 합니다.

그러나 잡념이 생기고 집중이 안 되는 것은
전혀 우리가 상관 할 바는 아닙니다.
잡념이야 생기려면 생기고 말려면 말아라 하고는
그냥 무시하고,
다만 '잡념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전혀 잡념이 많다고, 집중이 안 된다고
걱정하거나, 고민하거나, 자신을 채찍할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잡념이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는 잡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들도 나처럼 집중이 잘 안 될까?' 궁금할텐데요.
물론입니다.
누구라도 잡념이 안 생기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그 잡념으로 인해
두 번째 화살을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잡념으로 인해 괴롭고,
잡념이 생겼다고 자신을 채찍하며,
'나는 왜 이렇게 잡념이 많은거야'
'한두시간을 해 놓고도 잡념하고만 있었으니 하나도 안 한 것 같잖아'
'남들은 안 그럴텐데'
이렇게 스스로 잡념으로 인해 자꾸만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더 위험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잡념 때문에 한 번 화살을 맞고는
잡념으로 인한 괴로움과 분별심 때문에 또 한 번 화살을 맞곤 합니다.

잡념하고 싸우려 들지 마세요.
잡념을 이겨내겠다고 하면 도리어 지고 맙니다.
잡념을 이기겠다는 생각은
잡념과 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싸우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내가 내 안에 환상을 만들어 놓고
내가 만든 환상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니 잡념이 일어나면 다만 알아차릴 뿐,
시비를 걸거나, 싸우지 말고, 이겨내려 애쓰지 말고
그냥 무시하고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수행 중에 오는 잡념은
닦이려고 올라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잡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수행으로 인해
닦이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니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렇게 '다만 할 뿐'
다른 것들을 무시하며 묵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이 되고,
금강경과 하나가 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수행이 잘 되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잡념으로 수행 안 되는 느낌처럼
무시하고 놓아버리고 가야 할 경계입니다.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런 경계를 다시 한 번 느끼려고 애쓸 것도 없고,
그 때의 그런 느낌을 다시 채험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됩니다.
그건 그냥 한 때의 꿈이고 신기루일 뿐입니다.

그래서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그냥 해 나갈 것이지,
잘 된다, 안 된다 하는 분별을 일으켜선 안 됩니다.
잘 안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고,
잘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지,
거기에 '잘'이 붙을 것이 없습니다.

또 때로는 독경하면서 온갖 경계들을 보기도 합니다.
온몸이 가벼워지는 듯도 하고,
기운이 아래에서부터 퍼지는 듯도 하고,
혹은 무슨 소리가 들린다거나,
환영이 보인다거나,
눈물이 난다거나,
나도 모르는 어떤 기운에 휩싸인다거나 하는 등의
온갖 경계를 만나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와 마주하더라도
전혀 두려워할 것도 없고,
환희심을 낼 것도 없고,
잘 하고 있다고 들뜰 것도 없으며,
이러다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하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방하착' 하고, 놓아버릴 일입니다.
눈물이 난다면 그냥 흘리면 됩니다.
거기에 무슨 해석을 가져다 붙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아무 경계도 없고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서로 다른 근기일 뿐이니까
전혀 염려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금강경 독송을 하면
공덕이 될 것이라거나, 복이 될 것이라거나,
좋다고 하니까 어딘가 좋은 구석이 있겠지라거나,
그런 얘기를 하는 건
하근기 중생들에게 방편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금강경 독송을 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거나,
큰 공덕이 될 것이라거나,
그런 생각, 그런 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금강경에서도 무수히 하고 있는 법문입니다.

적당히 공덕을 얻고자, 복을 얻고자
적당히 금강경을 독송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금강경을 독송하게 되면
100일이 지나고, 1,000일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이번 생이 다 지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작은 공덕은 될 지언정,
무위의 무량한 공덕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왕에 금강경을 독송하시려거든,
또 지금까지 이렇게 한 달을 넘게 계속 해 오셨으니
'100일간 적당히 해서 100일을 채우자'
하는 그런 안일한 마음을 이제는 비우고
한번 내 생사를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한 번 크게 정진 해 보자 하는 대장부의 마음으로
수많은 선지식들이 걸으셨던 출격장부의 길을 내딛어 보시기 바랍니다.

금강경을 독송할 때도
1독을 하고, 혹은 2독, 3독을 하고,
적당히 견딜수 있을 만큼 독송하지 마시고,
내 힘에 붙인다 싶을 만큼,
내가 3독, 7독 정도 하면 힘에 붙인다 싶으면
거기에서 다시 몇 독을 더 추가로 하시라는 말입니다.

‘하기 싫은’ 마음을 조복 받아가면서
마음을 조금 더 집중하고, 조금 더 관하면서 정진할 때
정작 참된 수행은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독송과 하나되어
온몸으로 공부가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에도 집착하여,
‘나는 아무리 해도 왜 그렇게 안 되지’ 하고 답답해 하지도 말고,
그저 묵묵히 정진해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100일기도에 동참하신 한 법우님께서는
이번이 금강경 독송수행은 처음이라 처음에는 3독하기도 어려우셨고,
3독에서 시작하셨었는데, 몇 일 되어 5독, 7독을 하시더니
얼마 전에는
‘하루 종일 금강경 수행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고 하시고
최소한의 해야 할 일을 하는 이외의 시간은 계속 금강경만 독송하신다면서
하루에 20독 30독씩 그 이상을 꾸준히 독송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뭐랄까 요즘 금강경 독송수행의 재미에 흠뻑 빠지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 법우님께서는 매일같이 금강경 독송수행을 하다보니
마음가짐도 바르게 바뀌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투에서부터 따뜻함이 넘치며,
가족에 평화가 깃들고,
무언가 생각지 못한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금강경 수행할 때의 일상과
그 이전의 일상에서 큰 변화가 찾아오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서
많은 축복같은 믿지 못할 일들도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수행은 우리 삶과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삶이란 것이 마음을 쓰는 일상이듯이,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때에는 삶에도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다보면 생각지 못한 일상의 일들이 잘 풀리기도 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대인관계도 좋아지며,
뜻하지 않은 좋은 일들도 생겨나곤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것이 마음의 투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어떤 것을 심느냐에 따라
현실과 미래가 그대로 펼쳐지게 되어있는데,
기도 수행하는 동안에는 저절로 마음에 금강경 진리를 품게 되고,
복과 지혜를 품게 되기 때문에
그 품어진 마음이 현실과 세계에 그림을 그려내면서
내 앞의 현실이 아름답게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아름다울 수 밖에 없고,
마음 먹은 것이
현실로써 나타날 확률도 그만큼 커져 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텅 빈 마음으로 한 생각을 일으키면
법계를 움직여 법계에서부터 해답이 오지만,
복잡하고 정신 없는 마음으로 백만가지 생각을 일으킨들
그 생각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그 생각이 법계의 에너지를 끌고 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마음 내어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내 생애를 결정지을 수 있는,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내 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보리심으로
한바탕 삶을 걸고 정진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정진이 그러했듯이,
나 한 사람의 정진이 이 법계를 뒤흔들고,
나의 독경소리가 이 우주에 밝은 기운을 몰고 오며,
나의 기도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것입니다.

‘내가 이 생에 나와서 살면서 그간 한 것이 무엇인가.’
욕심을 채우고, 집착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애쓰고,
더 높은 자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고,
남들보다 더 잘 되려고, 더 부자되려고 애쓰고,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것 말고 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언제 한 번 참되게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려 했었는가.
마음의 욕심을 버리려 했었는가.
소유를 줄이고, 더 많이 베풀려 했었는가.
더 많이 만족하고, 더 많이 나를 낮추고,
더 많이 이 세상을 존중하고 존경하려 했는가.
마음을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시켜 관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청정하게 한 적이 얼마인가.

과연 텅 빈 마음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아 온 날들이
내가 살아 온 몇 십년의 해 가운데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일 년, 이 년 아니 다만 몇 달,
몇 시간이라도 참된 삶을 살아 오기는 했는가.

이 세상에서 정작 진실된 진리의 삶은
한평생 가운데 단 몇 일,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을 독송하고, 마음을 비우며, 마음을 관하는 시간
이 시간이 바로 내 삶에 그 어떤 업적보다, 이들보다
더 값진 시간이 될 것입니다.

수행하기, 정진하기 좋은 이 가을에
우리의 마음에 청량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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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
글쓴이 : 般若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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