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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승의제의 진리하고 우리 현상계하고
같은가 다른가를 논의해오다가 비유를 들어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까지 얘기를 했고,
오늘 얘기는 법(法)에 대한 얘기입니다.
한 번 읽어 보고 말씀드리죠.
又如一切行上 無常性,
一切有漏法上 苦性,
一切法上補特伽羅無我性,
不易施設與彼行等一相異相,
또 모든 행의 무상한 성품[無常性]과
모든 유루법의 괴로운 성품[苦性]과
모든 법의 보특가라(補特伽羅) 무아의 성품[無我性]이
그 행 등과 같은 상인지 다른 상인지 시설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고,
여기 모든 행하고 모든 유루법하고 모든 법 보특가라,
이것은 전부다 현상을 얘기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계는 제행을 얘기하고
무상성(無常性), 고성(苦性), 무아성(無我性)은 승의제를 얘기 합니다.
인(因) 연(緣)
색(色, 모양, 색깔) + 눈 → 시각 ┐
성(聲, 소리) + 귀 → 청각 ┤
향(香, 향기) + 코 → 후각 ┼ 법(法)
미(味, 맛) + 혀 → 미각 ┤
촉(觸, 촉감) + 몸 → 촉각 ┘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면 시각이 생기고,
귀가 소리를 듣게 되면 청각이 생기고,
코가 향기를 맡게 되면 후각이 생기고,
혀가 맛을 보면 미각이 생기고,
몸으로 사물을 접촉하게 되면 촉각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시각이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고
청각이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촉각이 몸을 통해서 촉감을 느끼는 거죠.
그렇게 되면 들어오는 정보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저것이 무엇이라고 아는 것,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느껴서 무엇이라고 나오는 것을 법(法)이라 그럽니다.
우리는 시각적으로 사물을 직접 인식 한다고 하지만
여기 들어온 것은 한 번 거쳤습니다.
‘색(色)’과 ‘눈’을 거쳐서 시각이 받아들인 것을 법이라고 하는 거죠.
이처럼 ‘소리’와 ‘귀’가, ‘향기’와 ‘코’가, ‘맛’와 ‘혀’가, ‘촉’과 ‘몸’이
인연이 되어서 한 번 거쳐서 들어온 게 법(法)이에요.
이 말은 법이라는 것은 인연소생이라는 겁니다.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은 인(因, 직접원인)이고
눈, 귀, 코, 혀, 몸은 연(緣, 간접원인)인데
이렇게 직접원인과 간접원인이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할 수 있고,
만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법(法)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法]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이거죠.
첫 번째,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는 나타난 정보[法]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않다면 주관적이라는 겁니다.
왜 주관적이냐 하면,
우리가 사물을 보면 사물의 영상이 망막에 맺히는데,
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 보기에 컵이죠?
그러면 앞에 거사님이 컵을 보게 되면 망막에 컵이 맺히는데
그 망막에 맺힌 것을 옆에 있는 거사님이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잖아요.
단지 망막에 맺힌 것은 자기만이 알아요.
그렇다면 이것은 서로가 공유가 안 되기 때문에 주관적인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것은 주관적인 거예요.
그런데 주관적인 것을 바깥에 대상[색성향미촉]하고 동일시하는 겁니다.
벌써 인연에 의해서 태어났는데
비슷할 뿐이지 동일하지 않습니다.
남[因], 여[緣]가 결혼을 해서 아이[法]가 태어났다면
부모의 얼굴을 닮을 수는 있지만 똑같지는 않죠.
전혀 다른 인격체입니다.
우리는 이 법을 의식이 인식을 하고 ‘있다’, ‘없다’, 이렇게 분별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법을
첫 번째, 일체행(一切行)은 무상한 성품[無常性]이고,
두 번째, 일체유루법(一切有漏法)은 괴로운 성품[苦性]이고,
세 번째, 제법(諸法)은 무아(無我)다.
이때 일체행(一切行), 일체유루법(一切有漏法), 제법(諸法)은
법(法, 아이)을 얘기하는 겁니다.
실제로 들어온 정보가 사실 알고 보면 주관적인 겁니다.
그런데 있다고 늘 착각하고 있는 거죠.
일체행(一切行), 일체유루법(一切有漏法), 제법(諸法)을
통 털어서 얘기하면 ‘모든 것’을 얘기 합니다.
‘모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들어와서 나타난 정보에요.
잘 생각을 해보시고 이것만 제대로 알면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게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삼법인(三法印)을 얘기한 거예요.
삼법인은 잘 아시다시피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인데
제행(諸行), 일체(一切), 제법(諸法) 이 세 개는 모든 것, 모든 존재, 제행(諸行)이고
무상성(無常性), 고성(苦性), 무아성(無我性)은
승의제, 진리, 본질, 본성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제행, 승의제]가 같고 다른것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거죠.
왜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존재[諸行]의 본질은 무상성(無常性),
무상하다는 성품을 떠나 제행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둘 관계를 같다 다르다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 일체(一切)라는 것을 떠나서 괴롭다는 성품[苦性]을 찾을 수 없고,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諸法]를 떠나서
무아라는 성품[無我性]을 찾을 수가 없는 거죠.
이 둘은 같다고 해도 틀렸고 다르다고 해도 맞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내용은 이런 얘기인데,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겨보면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시죠.
그래서 설명을 조금 해드리겠습니다.
일체행(一切行) 할 때 행은 조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행(諸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 이런 뜻이에요.
만들어진 것은 시간상으로 변한다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면 아주 곤란해요.
시간적으로 매 순간 계속 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재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싫어해요.
왜 싫어하느냐 하면,
현재순간은 스쳐가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내’라고 하는 자아(自我)가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재순간을 봤을 때 싫어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아를 불멸(不滅)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변하는 것에 대해서 싫어하는 거죠.
이 싫어하는 마음에서 현재순간에 저항하다보니까
현재는 빠지고 어제에서 내일을 바라보는 거예요.
과거나 미래를 기웃 기웃하는 겁니다.
현재순간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는 거죠.
우리는 자아관념에 의해서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는데,
이랬을 때 괴로울 고(苦)를 만납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無常性]은 과거, 현재, 미래로 변해 가는데,
이런 변화를 보다보니까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이것이 무상관찰이에요.
그래서 현재 매순간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나’라고 하는 고집을 타파하는 방법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보고 듣고 하는 매순간 이것들이 머물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매순간 바꾸기 때문에 사물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재순간 변하는 것을 피할 수 없죠.
피할 수 없으니까 두 번째, 모든 것은 괴롭다[苦] 이거죠.
괴로움을 만나다 보니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죠.
괴로움을 만났을 때 비로소 과거나 미래에서 벗어나서 현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현재순간을 인정하면서 고(苦)에서 벗어나려면 변화가 필요한 거죠.
그게 희망이고 무상(無常)이에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괴로움이 변화라는 것을 알게 되면
괴로움 속에는 자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졌구나,
그게 제법(諸法)이에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자아라는 게 없구나,
무아(無我)를 얘기하고 무아의 성품[無我性]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로 보면 그런데,
우리가 수행을 하면,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을 매순간 알아차림 해보니까
현재 순간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를 느끼고, 고를 느끼지만 그 속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
이것을 삼법인이라 그럽니다.
여기 내용이 법을 비유를 들어서 같고 다름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할 때 무아는 법무아(法無我)가 아니고 인무아(人無我)를 얘기 합니다.
그리고 사람 인(人)을 여기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했는데
보특가라라는 말은 윤회의 주체를 얘기합니다.
윤회의 주체는 없다는 거죠.
又如貪上不寂靜相及雜染相,
不易施設此與彼貪一相異相,
또 탐욕의 고요하지 못한 모습[不寂靜相]과 잡되고 물든 모습[雜染相]이
저 탐욕과 같은 모습인지 다른 모습인지 시설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탐욕의 특징을 부적정(不寂靜)하고 잡염(雜染)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부적정(不寂靜)이라는 것은 고요하지 않다는 거고
잡염(雜染)은 잡되고 물든 것을 얘기 합니다.
욕심을 부리면 부적정(不寂靜),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잡염(雜染), 잡된 것에 물이 드는 거예요.
저것을 갖고 싶다고 하면 그 대상에 내 마음이 물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탐욕이라는 것이 고요하지 않다는 것하고 물드는 것이
같다고 해야 되느냐, 다르다고 해야 되느냐?
탐욕 속에는 고요하지 않고 물드는 게 항상 있기 때문에
같다고 해도 틀렸고 다르다고 해도 틀린 거죠.
그래서
如於貪上,於瞋癡上,當知亦爾.
탐욕처럼 성냄과 어리석음[瞋癡]도 마땅히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성내는 것도 그렇고 어리석음도 그렇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탐진치의 본질은 승의제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거예요.
탐진치가 어떻게 진리라고 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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