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마음을 버리라는 말

장백산-1 2012. 3. 24. 17:06

 

 

 

마음만 버리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깨달음이 온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깨달음의 실상과 어긋나는 말이다.

거짓된 깨달은 자들이 실상 속에 있는 일들을 모르고
들은 말을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앵무새처럼 전하기에
이와 같이 깨달음의 진실과 어긋난 말이 범람하는 것이다.

선가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심이 극진한 노파가 공덕을 지으려고
유망한 스님을 모셔놓고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공양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 법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홀로 있는 스님 방에 미모의 자기 딸을 보내 유혹을 하게 했단다.
딸이 스님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리니, 스님 왈,
"다 말라 죽어버린 고목에 웬 매미가 간질거리는가……!” 하면서
전혀 마음의 흔들림이 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딸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노파는 "헛고생했다"고 하면서
스님이 거주하는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그 답이 무엇인가?
아무리 깨달은 자라 해도 몸을 가진 생명체는 환경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경에 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마음이 생기고 추우면 추운 마음이 생겨야 정상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 깨달음을 얻어 명경같은 마음을 얻었다면
여자가 유혹하는 것은 욕망의 어둠이 다가오는 것이니
맑은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고
“어이쿠, 어지러워라!” 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들은 관념에 얽매여 진실하지 않은 답변을 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망상이 사라지고 의식이 명경같이 총총해져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거짓된 깨달은 자들은
깨달음은 절대 청정해야 한다는 관념에 얽매여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도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모든 인연을 끊고 멍하게 앉아 밥이나 축내면서
관념적인 소리나 하고 사는 것이다.

깨달은 자는 모든 욕망과 거짓과 아상을 버리고
오직 진실과 사랑만이 남아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공덕행에 생명을 바친다.

명경처럼 맑은 마음에 세상의 잘되고 잘못되는 일들이 그대로 비치고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기에
잘못되고 불행한 일들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공덕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았다고, 절대 자유를 얻었다고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버리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자는
저 혼자 깨달았다는 착각에 빠져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 자이지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이 참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눈앞에 있는 세상 일을 물어보면 된다.

깨달은 자는 망상이 없어
눈앞에 비친 일들과 이치를
비치는 대로 쉬운 말로 표현할 뿐이지
태극이나 무극과 같은 보이지 않는 우주적 움직임이나 관념적인 논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명,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치에 맞게 한치의 의문없이 대답을 해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실상 속에 있는 일에 대한 인과법을 설하지 않고
산속에 앉아 깨달음에 대한 관념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그는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을 얻지 못한 상태이고
세상을 위해 일할 양심과 용기가 없음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산속에 혼자 앉아 가만히 생각만으로 깨달음을 얻는 길은 없으며
보이지 않는 눈이 한순간에 보이는 이치는 절대 없다.

모든 것은 원인을 지어야 변화가 생기는 것이니
마음에 업이 있는 자가 완전한 반야심을 얻고자 한다면
길을 배우고 깨우쳐 마음을 닦는  공덕행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의 제자라면 부처님이 설한 실상의 법을 배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세상을 축복하는 공덕행을 통하여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업장을 다 태워버릴 때
비로소 업이 사라진 반야지경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공덕행을 통해 원인을 지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화두만 잡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원인을 짓지 않고서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인과법에 반하는 논리로서
가만히 앉아서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요행수로
현실에서 살아가기 힘든 근기가 허약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가장 편하고 마음에 드는 수행법인 것이다.

산자에게 마음을 버리라는 것은
현실에 부딪히며 일어나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과 같으니
결국 현실을 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하게 살라는 말과 같다.

현실을 버린 상태에서 현실에서 들려오는 모든 감각의 원천을 차단하면
마음의 변화가 없어 평안하기야 하겠지만
그 마음은 생동하는 생명체의 살아 움직이는 마음이 아니라
죽은 자의 무감각한 마음과 같이 것이니
더 이상 자신을 좋게 만드는 원인을 짓지 못하는 말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버리라는 말은 깨달음의 실상과 어긋난 말로서
주체적인 삶과 인간농사를 포기하는 거짓된 깨달음의 전형적인 허위관념인 것이다.

산자가 생명의 근본인 의식과 의식이 환경과 부딪혀 일으키는 마음을 버리면
주인 없는 자리에는 귀신 밖에 들어올게 없다.
자기의 마음과 의식을 버리고 멍한 상태에 빠지면
주인없는 몸에 유혼이 들어와 그 자리를 차지하여
그 사람은 귀신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마음을 버리라는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수많은 명상하는 자들이 마음을 놓고 함부로 신을 받아들인 관계로
갑자기 한소식하여 깨달았다고 신놀음하는 자가 많은 것이다.

마음을 버리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욕망이 난무하는 어두운 세상에서
헛된 탐욕과 집착, 망상에서 벗어나 나쁜 업과 한을 짓지 말라는 뜻이다.

즉 칠불통계와 같은 이치로
좋은 마음은 기르고 나쁜 마음은 버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법은 깨달음의 실상을 모르니 전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전하여 세상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상에 대한 가르침이며 완전한 인과법의 설파인데
지금 불법은 공사상에 빠져 사실을 멀리하고
관념적인 깨달음의 논리가 한창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참선법이다.

선법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다.
선법은 불가의 선정이 중국에 와서 도가의 좌선법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것이니
어찌 천년 이후에 나타난 참선법을 부처님의 정법이라 하겠는가?

화두는 이치에 닿지 않은 끝없는 수수께끼이니
그 속에 빠지면 그 길없는 환상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길이 없으니 더 엄청난 것이 있겠지 하는 착각에 빠져 끝없이 헤매게 되고
근기가 허약한 자들은 그 속을 헤매다 지치고 허약해져 갈망에 환상을 보게 되고
그것을 보고 진짜 자기가 깨달은 줄 알고 헛된 관념적인 소리나 귀신놀음을 하며
자신과 세상을 속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 깨달았다는 조사들의 가르침 속에는
세상을 보는 깨달음의 지혜가 없고
세상을 밝히는 사실적인 인과법을 설한 사례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성철 스님이 양심적인 것은 임종시에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친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말을 해야 그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철스님이 이러할진데
어찌 증거도 없는 과거 조사들이 깨달았다고 할 것인가?

깨달은 자가 나왔다면
모든 일은 사실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깨달았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허공 속에서 땅따먹기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직접 가르치신 초기의 실상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선법을 제일이라고 따르며 환상적인 공만 이야기하는 자들은
부처의 제자가 아니라 조사의 제자일 뿐이니
잘못된 인연에 빠져 자신의 인간농사를 망친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출처:진실의 근원

출처 :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진리의 빛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