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제도하려고 설법한단 말인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實際는 내가 죽지 않고
恒常 여기서 法을 설한다.
이 句節의 뜻은,
부처님께서 무량이승지겁 前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滅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恒常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시는 곳은 全部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 千白億 化身으로 나타내어
十方法界에 안 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 것을 常住不滅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 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一切 萬法이 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永遠토록 화장찰해, 무진법계,
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過去,
現在, 未來를 通해서 부처님은 恒常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森羅萬像 一切가 다 過去로부터
現在, 未來 할 것 없이 恒常
無盡法文을 說하고 있으며
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을 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바위가
항상 무슨 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有情 즉 생물은 으레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恒常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虛空까지도
恒狀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濟度하고
누구를 求援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根本要는 本來面目,
本來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
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하나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生覺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가 불국토에 살고,
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 하니 노력할 것
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혹 이렇게도 生覺하겠지만 이것은
根本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本來 부처이고, 本來 불국토이고,
本來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은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 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맑은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나는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눈뜰 필요 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 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것
그런 자신은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 눈만 뜨면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哲學的으로 말하자면,
'現實 이대로가 絶對다' 하는 것입니다.
卽 現實 이대로가 絶對이고 現實 이대로가
不生不滅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데, 이 不生不滅의 原理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科學이 발달함에 따라 原子物理學
에서도 自然界는 不生不滅의 原理 위에
構成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 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宇宙法界의 不生不滅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自然의 不生不滅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通하고 있습니다.
성철 큰스님 [現實이 絶對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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