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물들던 단풍잎들이 바람에 부스럭거린다. 한적한 산속을 달리는 차량 뒤로 낙엽들이 또르르
무리지어 뒹군다. 산사에 도착하니 낙엽 태우는 냄새로 가득하다. 저 찬란한 가을이 간다.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의 군상은 그동안 이고 있던 단풍잎들을 벗어버리고 빈가지만 앙상하다.
그 빈 가지들이 虛空에 뚜렷하게 자리를 튼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바람이 인다.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선다.
한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묻는다. “나무가 매 마르고 낙옆이 지면 어디로 갑니까?” 운문스님이 답한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구나.”
이것은 《벽암록》 27측에 나오는 구절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구나”의 한문 구절은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다.
體露는 몸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金風은 소슬한 가을바람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낙엽들은 힘없이
떨어진다. 나무들은 앙상한 빈 가지를 드러낸다.
그 동안 햇빛을 받으며 自然과 호흡했던 새파란 시절의 나뭇잎들, 가을이 오매 形形色色으로 불타오르던 나뭇잎들이 사라지고 나무는 本來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제 치장된 아무것도 없다. 부귀와 공명,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만남과 헤어짐, 이기심과 질투심, 격정과 증오, 사랑과 좌절이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本來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을 숲과 단풍잎은 나를 설레게 하지만, 이렇게 빈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의 모습은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든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런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나의 孤獨과 直面한다.
발가벗은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하나의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적나나(赤裸裸)한 모습이다.
그것은 그저 쓸쓸한 虛無가 아니다. 어떤 假飾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와 관련된 또 따른 禪語가 《벽암록》 90측과 그 밖의 선어록에 등장한다.
그 구절이 ‘정나나(淨裸裸) 적쇄쇄(赤灑灑)’이다. 혹은 ‘적나나(赤裸裸) 정쇄쇄(淨灑灑)’라고도 한다.
적(赤)이라는 말은 붉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空을 뜻한다.
아기와 같은 純粹하고 天眞스러움을 意味한다. 淸貧의 뜻도 있다. 청빈이나 적빈은 같은 의미다.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赤) 대신 깨끗한 정(淨)자를 쓰기도 한다.
따라서 赤裸裸란 거짓 없는 모습이며 밝은 모습이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쇄쇄란 아주 淸淨하여 一切의 汚染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나나 적쇄쇄’ 혹은 ‘정나나 적쇄쇄’ 우리들의 발가벗은 본디모습,
아주 맑고 투명한 모습을 일컫는다.
나무로 치자면 모든 이파리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모습이다.
우리 本來모습, 森羅萬像의 참 모습은 이렇게 티 없이 맑고 투명한 모습이다.
이러한 本모습 앞에 直面하면 事實 人生의 모든 喜怒哀樂과 疾風怒濤는 가벼운 숨소리,
소솔한 바람소리에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滿秋를 보낸 이 初겨울은 本來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는 季節이다. 빈가지만 앙상한 겨울 숲을 걷노라면
명징한 하늘에 빈가지가 고스란히 박혀 있다. 바람이 차긴 하지만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그러게 맑고 투명하다. 산 속을 흐르는 시냇물도 차디차지만 티 없이 깨끗하고 정갈하다.
그러한 명징함 속에서 드러나는 나무의 빈 가지들은 虛空 속으로 부채살처럼 퍼져 나간다.
바로 이러한 빈자리에서 어제 직장동료부터 들었던 自尊心 傷하는 얘기는 사실 자질구레한 사치에
불과하다. 사소한 일로 부딪혔던 아내와의 말다툼과 부끄러운 記憶도 피식 너털웃음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겨울 숲을 거닐어 볼 일이다. 그런데 그 많은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을 진데 낙엽 역시 本來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
어디로 돌아간 것일까? 바람이 휑하니 지나간다.
落葉 하나가 虛空을 떠돈다. 맑은 겨울 하늘이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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