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한동안 어디를 좀 갔다 왔더니 지난 글과 연결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우선 시동을 다시 거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리를 해 보죠.
향후 글의 방향이기도 한데요...
*두 文明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인류문명의 始源이지만 그 흔적조차 거의 지워진 精神文明의 主體勢力인 韓民族의 源形思想을 더듬어 보고 있고요...
또 하나는 지금 우리의 몸과 정신, 마음을 거의 장악한 이 西區文明의 始源과 核心 思想이 무엇인지를 整理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精神文明은 BC2600년경 환웅천황의 신시배달국으로 부터 始作하였으나 점점 쇠락의 길을걸어 오늘에 이르렀고...
西區의 物質文明은 BC2300년경 수메르의 엔릴/엔키로 부터 始作하여 바빌론-이집트-로마-영국을 거쳐 미국을 올라타고 全世界를 그 影響圈에 넣고 있습니다.
그림과 같이 이 文明의 循環도 半極(二太極)과도 같이 陰陽運動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極에 달하면... 變化가 必緣的으로 오는것이 變化의 原理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宇宙의 週期가 이와 같습니다. 한때 世界를 全部 채웠던 찬란한 文化와 文明世界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이제 그 흔적도 찾기 힘들뿐더러 제 스스로도 正體性을 거의 忘覺한 段階에 直面했음은 물론... 外部勢力은 異民族을 끌어들여 '世界化'란 言語的 유희로 희롱하며 遺傳的 血統마저 씨를 말리려하는 多民族 多文化 프로젝트를 進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後孫된 立場으로 마땅히 우리의 核心精神이 무엇인지를 窮究해 보고 自身의 正體性을 하루빨리
定立하는것이 시급하겠다 하겠습니다.
결코 局守主義的 過張이 아닙니다. 우리의 三一思想은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抹殺直前에 와 있지만... 그 작은 한조각의 편린속에서도 웅장한 眞理의 불꽃을 내 뿜고 있습니다. 眞實과 眞理는 크기의 무게로 가름하고 評價할 수 없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이 말씀의 意味를 새겨보실 수 있겠지만... 世界의 어느 思想과 哲學, 宗敎에서 볼 수 없는 完全한 眞理의 源型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思想에 加해진 巨大한 歪曲의 問題를 벗겨내면... 그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第一 重要한 宇宙觀/宇宙誕生論/人間觀에 關한 內容으로 三一思想과 카발라(신지학)을 주로 比較해 보겠습니다. 아직 三一思想을 온전히 들어내기엔... 많은 세월과 인고의 고통이 따르는 연구작업들이 병행되어야 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思想體係는 西洋式의 辨證法的 論理展開로 單純比較 될 수 없습니다. 어차피 極明한 物質文明의 世界에 우리가 당도하여 소위 '現代化'란 槪念에 世人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야만 하는 作業이 必要하긴 합니다. 이 연재 글들을 整理해 올리며 예전에 홅어 보았던 카발라에 대해 다시 生覺하는 계기가 됩니다. 매우 정교하고 놀라운 宇宙의 通察力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하늘로 부터 傳受된 우리의 思想은 그들의 매우 傳門的인 秘傳에 비해 더욱 대단함을 알게 합니다. 카발라가 한 분야에 깊숙히 파악된 전문교재의 색채가 느껴지는 반면에... 우리의 思想은 全切的이며 含縮的이라는 生覺이 듭니다. 이러한 差異는 基本的인 出發 自體에서 나오는 文化的인 差異입니다.
위 그림은 예전에도 제가 두 文明을 비교하며 인용한 그림입니다. 우리의 文化는 말로 表現할 수 없는
言語道斷의 絶對世界에 對한 理解를 傳達하기 위해 人間의 五感에 依持한 知識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나누고 分解하지 않고 全切를 한꺼번에 傳達하기 위해 '直觀'的인 方法을 훈련시키고 그 疎通의 方法을
通해 傳하고자 하는 상을 말합니다.
反面에 西區文明은 分析하고 實驗하고 나누고 쪼개서 가급적 現在의 人間意識(영/마음이 아닌 意識次元) 속에서 理解를 求해가는 方式으로 부터 發展해 왔습니다. 東洋畵와 西洋畵의 差異를 보면 금방 이 差異를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詩/文學/音樂/춤... 등 모든 靈的인, 精神的 活動인 文化의 差異를 보면 두 文明의 差異를 理解하게 됩니다.
이런 文化的 特質의 差異로 因해서...
우리의 思想體係나 우주관/인간관의 표현은 매우 觀念的이고 含縮的이며 像徵的입니다. 저는 이런 像徵的인 體係들을 가급적 '現代的 表現'으로 이끌어 보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全切를 보는것....
한꺼번에 觀照하여 通察해 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方式이었고 이 때문에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서가 부족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부족한 부분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전개한 이론들을 보충하는 방법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科學이 오늘과도 같이 發達하지 못했던 古代에는 이러한 '傳承'이 唯一한 方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極限에 다달한 科學은... 이제 物質世界를 貫通하여 二元性을 넘는 觀念의 意識世界를 遊泳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現實은 안이 밖이고, 밖이 곧 안이되는 안과밖이 貫通한 世界로 이미 進入하였습니다.
三一思想과 카발라의 宇宙觀 比較
우선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事大思想부터 淸算합시다.
우리 고유의 훌륭한 精神資産이 있음에도 이를 애써 無視하며 하찮게 여기고 外來의 思想에 熱狂하는
노예근성을 버립시다.
우리의 三一思想을 理解하기 위해서는.지금까지 우리의 머릿골에 설치된 메트릭스부터 철거해야만 합니다.
잠시 나열해 보죠.
*天/地/人의 그릇된 解析
*性/命/精의 歪曲
*五行思想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이 글은 사실 性/ 命/ 精의 올바른 자리 찾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윗 그림은 五行思想이 만들어 낸 '웃지못할 宇宙論'입니다. 無極과 半極(二太極), 黃極을 그럴듯하게 連結시켜 놓았으나... 事實은 서로가 전혀 無關한 語不成說의 內容들입니다. 特히 黃極이란 圖形은 전혀 出處를 알지 못하는 根據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같은 巨大 歪曲의 만행은 한동석 '宇宙變化의 原理'란 冊에서 主張하고 있고 증산계열의 종교계에서 열심히 引用하고 있는 중입니다.
위의 內容을 修正하면 아래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그림은 부도지를 바탕으로 創世의 過程을 요약해 본 그림입니다.
事實 間單한 圖形이라 無視하실지 모르지만... 매우 간단하고 알기쉽게 되어있고 縮約된 漢詩처럼 이 속에서 宇宙의 巨大한 歷史가 쏟아져 나옵니다. 놀라운것은 이러한 宇宙觀이 힌두이즘이나 카발라의 核心內容들과 相衝되지 않고 우히려 相互 補完的 關係로 미진한 부분들에 대한 숨어있는 意味를 잡아내도록 案內者처럼 相互間에 補完作用을 한다는 겁니다.
三一思想과 카발라를 比較해 보면 더욱 이 關係가 明確해 집니다.
힌두이즘의 니르구나브라흐만은 우리의 表現으로 '한', 하늘, 理, 無極, 無爲, 道 등에 해당하겠네요.
一과 三의 體用關係는 아직 힌두이즘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나중에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相對界인 사구나브라흐만이 마야와 이슈와라 둘로 表現하는것이 興味롭군요.
마치 짐세(宇宙)와 마고(神)으로 表現하는 것과 一致합니다.
카발라에서는 絶對界를 아인/아인 소프/아인소프 아오르의 세 部分으로 나눕니다.
아인(AIN) : 무(無) 또는 非現顯性
아인 소프(AIN SOPH) : 無限, 顯現 以前의 絶對空間
가장 超越的인 狀態에 있으며 窮極의 根源에 해당하는 絶對空(Absoulte VOID). 이 絶對空의 狀態를
아인 소프(AIN SOPH)라고 칭한다.
아인 소프는 認識의 限界를 넘어서 있는 超越 狀態의 像徵的인 表現.
아인 소프 아오르(AUR) : 무한광(無限光) 혹은 無限한 빛
아인 소프는 아인 소프 네거티브와 아인 소프 포지티브로 나뉠 수 있는데,
아인 소프 포지티브의 처음 狀態를 보이드(VOID).
네거티브의 단계는 호아(HOA) 아이요드(I.YOD), 深淵(ABYSS), 혼돈(KAOS) 등으로 細分되며
이 호아는 가장 거룩한 太古의 存在(Ancient of Days)라고 불리는데,
이를 眞正한 宇宙의 創造라고 할 수 있다.
無, 無限, 無限光의 觀念으로 아인/아인 소프/아인 소프 아오르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호아 以後에 등장하는 創造의 세 局面으로 로고스라는 表現이 보입니다.
제1 로고스 : (意志)/카오스(혼돈)
제2 로고스 : (智慧)/에로스(사랑)
제3 로고스 : (活動性)/가이아(대지)
상기 그림에서 편의상
아인(AIN) --> 제1 로고스
아인 소프(AIN SOPH) --> 제2 로고스
아인 소프 아오르(AUR) --> 제3 로고스
로 對應시켰습니다. 하지만 카발라나 신지학에서는 우리의 一/三 三神의 이름이 不分明하며 더욱이 相對界로 나타나는 이 三神의 現顯過程에 대한 正確한 對應關係가 끊어져 있습니다. 아래 첨부한 內容은 이 過程(우주창세민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탄생과정)에 대한 놀랄정도로 세부적인 과정들의 묘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절대계의 비현현존재와 상대계의 우주/神 등의 상관관계가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反해 우리 三一思想은 표현은 간단하지만 1=3, 1-->3-->7의 創造 過程과 次元層差의 形成過程에 대한 決定的인 因果關係를 提供하고 있음이 特徵입니다. 1靈 - 3魂 - 7魄 에서 보듯이... 人間의 魂이 세가지이며 物質몸은 일곱次元의 多次元으로 構成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7의 水理는 自然에서도 나타납니다.
1 (白色光) - 3 (빛의 三元色) - 7 (빛의 산란으로 나타나는 무지개의 일곱 색깔)
三魂 (靈魂/覺魂/生魂)이 特異한데 生命界를 觀察해 보면 이 三魂의 正體를 알 수 있을것도 같습니다.
예전의 글에서
命을 설명하며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비유하였는데
1)BIOS 2) 운영체계인 OS(Operlating Software) 3) 응용소프트웨어로 비유할 수 있고...
칼융의 표현으로 表面意識, 個人無意識, 集團無意識 (저는 슈퍼에고를 靈적인 領域으로 판단합니다)으로 一魂을 나눌 수 있을것 같습니다.
아래의 神誌學 관련글은 좀 길지만... 또 三神의 자리와 잘 매칭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많은 靈感을 여러분께 선사할 겁니다. 많은 참고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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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의 宇宙旅行
肉體 밖으로
몇 년 전, 나는 작은 體驗을 하나 하였다.
冥想을 한 後 어슴푸레 잠이 들었을 무렵, 갑자기 내가 내 방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방의 한쪽 벽과 창문이 보였으며, 창문 밖으로 뭔가가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 이상한 것을 깨달았는데, 잠을 자느라 누워 있었던 내 눈엔 천장이 보여야 했던 것이다. 순간 두려움이 일었으며, 때마침 다른 방에서 나는 것 같은 짤막한 부저 같은 소리에 그 이상한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는 눈을 떴다. 물론 나는 누워 있었고, 눈앞에 있는 것은 어두운 천장뿐이었다. 창문은 고개를 들어야만 볼 수 있었다. 방금 꿈을 꾼 걸까? 그러나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고 너무나 생생했다. 더욱이 나는 내 방의 것과 똑같은 벽과 창문을 보았는데, 그런 광경을 보려면 서 있거나 상체를 일으킨 자세에서만 가능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잠시 후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는 걸 눈치챘는데, 한밤중에 불이 꺼져 있었으므로 내 방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벽과 창문도 윤곽만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야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희미하게 발광하는 듯한 비교적 밝은 벽을 보았던 것이다.
幽體離脫! 나는 비록 그 經驗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났고 몸을 완전히 떠나지도 못했지만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유체이탈에 대한 경험담을 더 많이 접하게 되었을 때, 내가 겪은 경험이 유체이탈의 초기에 일어나는 현상들과 정확하게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이런 幽體離脫, 그리고 임사(臨死)體驗과 같은 사례들은 肉體를 넘어선 또 하나의 몸 또는 靈魂의 存在를 시사하며, 同時에 肉體의 죽음과 관계없이 持續되는 永遠한 生命의 可能性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肉體를 넘어선 永遠한 生命의 存在를 認知하게 된 것과 無關하지 않다. 비록 肉身는 죽고 形態는 變하지만 生命은 持續될 것이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남아있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나 대학의 전혀 새로운 世界로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思春期 靑少年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本質的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認識의 變化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데 對한 認識의 變化도 함께 要求한다.
나는 生命이 떠나면 썩어 문드러지거나 7년마다 몸의 全細胞가 完全히 바뀐다고 하는 肉體는 分明 아닌 것이다. 냄새나 소리, 통증과 같은 感覺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여러 感覺器官이나 神經덩어리도 내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랑에 지쳐 울거나 두려워하기도 하는 이런 感情들이 나일까?
아니면 내가 나라고 生覺하는 이 生覺 自體가 나일까?
그것도 아니면 앞서 말한 生命이나 靈魂이 眞情한 나일까?
하지만 生命과 靈魂이 眞情한 ‘나’에 해당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質問은 끝나지 않는다.
아직 生命과 靈魂의 實體와 本質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유체이탈시(또는 유체이탈이 일어나려고 했던 순간)에 보았던 壁이 보통 우리가 보는 物質의 壁이 아니라는 데 注目하였다. 그림자 없이 희미한 빛을 내던 비정상적 벽의 모습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색깔도 원래의 벽과 달랐다.
추측하건대 나는 에텔 質料로 된 壁을 보았던 것으로 生覺된다. 보통 유체이탈에서 유체(幽體)란 1차적으로 에텔體를 가리키는데, 에텔體는 바로 에텔계의 여러 자극과 인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神體的 道具로 作用하기 때문이다. 즉 잠시 육체와 분리된 나의 에텔體가 意識의 채널로 作用하여 같은 振動帶(存在界)에 속하는 에텔계의 壁을 보았던 것이다.
事實 모든 物體는 그 自身과 形體가 닮은 에텔 質料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이것이 유체이탈을 經驗한 사람들이 보통의 평범한 물체를 보았다고 錯覺하는 理由이다. 例를 들어, 유체이탈 상태에서 본 탁자는 일반적인 탁자와 형태가 똑같을 뿐이지 實은 에텔 質料로 된 에텔界의 탁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체이탈과 관련해 충분히 認識되지 못하고 있는 事實은, 宇宙에 여러 次元의 存在界가 있는 것처럼 유체이탈에도 여러 次元의 等級이 있다는 점이다. 肉體를 벗어난 에텔體는 그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에텔體를 넘어서면 아스트랄體라는 또 하나의 몸이 있는데,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아스트랄體는 아스트랄界의 質料로 이루어졌다. 이 段階에서 우리의 意識은 아스트랄體를 通해 遊泳을 하며, 더 이상 物質界에서 보던 것과 닮지 않은 전혀 다른 次元의 風境을 보게 된다. 아스트랄體를 넘어서면 또 멘탈體라는
意識의 媒體가 있다. 이렇게 유체이탈은 마치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식으로 次元을 높여가며 여러 段階로 탈바꿈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意識의 體들이 서로 獨立的으로 存在하는 것은 아니고, 마치 神經係와 循環係, 그리고 임파계와 골격이 하나의 肉體 속에 重疊하여 存在하는 것처럼 하나의 커다란 水直的(次元間) 시스템을 이룬다. 바로 이 시스템이 人間이라는 한 存在를 構成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要素들이며, 넓은 意味에서의 身體이다. 다시 말해 人間이란 肉體로만 이루어졌다고 하거나 單純히 肉體와 ― 애매모호한 개념의 ― 靈魂으로만 나눌 수 있는 存在가 아니라, 肉體와 에텔體, 아스트랄體, 멘탈體 等 여러 겹의 몸이 重疊하여 이루어진 複合的인 存在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上位의 體들이 實際로 存在하고 있을까? 보통 우리는 化學原子들만이 物體와 形狀을 形成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화학원자가 아닌 亞原子 粒子나 高次元의 原素가 어떤 形狀이나 에너지 그물을 만든다는 것은 旣存 物理學의 理解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高次元은 實際的 意味가 없는,
素粒子 內部에 쓸모없이 압착된 수학적인 개념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科學이 說明하지 못하는 새로운 現狀들이 종종 發見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쉽게 否定的인 속단을 내릴 일만은 아니다. 한 例로 로버트 로그린은 분수전하를 가진 양자유체의 새로운 형태(양자 홀 효과)를 발견하여 電子들이 集團的인 行動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 업적으로 1998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또 최근에는 하나의 電子와 複數의 磁力線이 結合한 複合 페르미온(composite permions) 같은
모델이 제시되어 粒子 行動에 대한 새로운 可能性을 열고 있다.
한편 生命體와 電流의 關聯性을 깊이 있게 硏究한 헤롤드 버나 로버트 베커 같은 이는 모든 生命體에는
電磁氣的인 生命場이 存在하여 生命體를 形成하고 調節하는 一種의 틀로서 作用한다고 보았는데, 그 機能이나 電磁氣的인 性質은 에텔體 혹은 아스트랄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卽 生體電磁氣場이라고도 할 수 있는 電磁氣的인 格子構造가 먼저 形成된 뒤에 이 에너지場의 影響에 따라 物質이 離合集散한다는 것인데, 이는 生命體의 發生過程이나, 특히 일부 저급한 動物들에서 볼 수 있는 身體 一部의 놀라운
再生能力 같은 現狀들을 쉽게 說明해준다.
結局 生體電磁氣場의 存在 可能性은 生命體의 모델이 되는 ‘원형(原型)’이 存在함을 뜻하고, 이 경우 生命體의 發育과 成長이 遺傳物質(DNA)에 의한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物質은 보다 높은 次元,
즉 靈的인 次元의 作用으로 物質에 影響을 받아 어떤 特定한 形態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宇宙의 모든 現狀을 물질만으로, 또는 물리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예가 人間으로, 人間은 原子의 集合 그 以上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宇宙에 存在하는 것은 오직 物質과
意識이 없는 에너지뿐이고 生命活動이나 意識活動은 複合的인 有機物 시스템이 만들어낸 二次的인 現狀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실 이 宇宙에는 보이지 않는 部分, 卽 靈的인 側面이 있고, 이런 意識活動에 비하면 오히려 物質이 副次的인 現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靈的인 側面을 다루는 것이 이번 장의 주된 目的이다. 또 靈魂과 意識의 進化, 그리고 全進化의 過情을 通해 드러나는 意識과 形상,
또는 意識과 物質의 關係를 알아봄으로써 宇宙가 運營되는 方式을 조금이나마 더 잘 理解하게 될 것이다.
事實 이제까지 우리는 物質과 形像을 爲主로 다루어왔다. 物質의 本質은 무엇인가?
宇宙와 物質의 形成에 있어 形像은 어떤 意味를 갖는가? 이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밝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는 적지 않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의 내용에 어느 정도 共感을 하고 있다면, 物質의 基礎인 原子에 대한 槪念 역시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原子를 무엇이라고 生覺하는가? 여러 가지 答辨이 可能하겠지만,
原子는 힘의 센터라는 對答이 아마도 가장 適節한 대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찌감치 1920년대 앨리스 베일리 여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槪念은 이미 그 당시 과학계에도 생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19세기를 말함)에 原子는 分離할 수 없는 質料의 單位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電氣的인 힘 혹은 에너지의 센터로써 여겨진다." (원자의 의식, p.18)
事實 原子는 에너지와 物質의 境界에 존재한다. 에너지가 物質化된 첫 번째 構造物이 原子다.
原子는 모든 物質의 基礎이고, 에너지의 센터이자, 에너지의 形像이다.
바로 앞 장에서 보았듯이 原子와 物質은 에너지가 畿何學的 原理에 따라 形像化한 것이다.
反對로 純粹한 에너지, 卽 靈(魂)은 形償을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質料와 靈은 別個의 것이 아니며,
獨立的으로 存在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블라봐츠키 여사가 표현하였듯이 “靈과 物質은 靈도 物質도
아닌 그 하나의 두 가지 狀態이다.” 다만 우리가 보기에 質料와 靈은 分離된 것으로 나타나며, 이렇게 質料와 靈을 獨立的인 것으로 生覺하는 것이 宇宙를 記述하고 理解하는 데 오히려 더 便利할 수도 있을 뿐이다. 따라서 物質 內部에서 作用하는 側面에서 보면 靈은 形像 속을 흐르고 있다고도 表現할 수 있다.
靈은 意識 또는 生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용어는 경우에 따라 區別해서 써야겠지만 本質的으로는 存在의 同一한 側面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意識이라고 할 때에도 매우 多樣한 次元의 意識이 있음을 理解해야 할 것이다. 心理學에서 다루는 영역만 해도 現在意識(表面意識), 潛在意識, 無意識, 集團武意識 등이 있고, 人間의 意識이 있는가하면 動物의 意識, 植物의 意識, 그리고 單細胞 生物이나 細胞, 심지어 鑛物이나 原子에 해당하는 單純意識이 있고 行星 次元의 意識이나 宇宙意識과 같은 超越意識이 있는 것이다.
또 佛敎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人間 意式의 作用을 여덟 段階로 나누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 제6識), 말나식(末那識, 제7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識)으로 구분하고 있다.
前五識은 肉體의 感覺을 通하여 알게 되는 식(識)으로 사고(思考)의 過程을 包含하지 않으며,
第6識인 意識은 주로 頭腦作用과 關聯이 있는 것으로 우리가 一般的으로 表面意識이라고 말할 때의
意識과 가까운 것이다. 第 6識인 意識을 表面意識에 比喩하면
第7識인 말나識은 潛在意識에 비유될 수 있는 것으로, 나중에 언급하게 될 에고(ego)와 깊은 聯關이 있다. 말나識은 마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第8識인 아뢰야識은 아다나식(阿陀那識) 또는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스트어
아라야(alaya)에서 연유한 것으로 아(a)는 否定, 라야(laya)는 없어진다는 意味이다.
그러므로 아라야는 永遠히 存在하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繼續的으로 이어지는 輪回의 主體, 즉 중생(衆生)의 根本生命이다. 바로 이 아뢰야識이 肉體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永圓히
持續되는 生命에 對한 解答이 될 것이다.
우리가 日常的으로 認識하는 意識은 表面意識일 뿐이고, 가끔 꿈이나 豫知를 通하여 深層意識을 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해온 신비학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下位 次元의 意識과 生命의 本質은 靈魂이고 그 本體는 宇宙意識, 卽 로고스이다. 宇宙意識은 다시 파라브라만, 卽 물질과 별개일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한 超越意識에서 分化된 것이다. 物質은 로고스의 神性한 意識이 外部로 現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例를들어 演劇의 覺本이 로고스의 意識이라면, 靈은 배우들의 演技이고, 物質은 배우와 무대, 무대장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神의 生命은 形像 속으로 들어가 進化한다. 바로 이 事實이 形像이 存在하고 物質이 存在하는 理由이다. 形像과 物質을 通해서 靈은, 또는 宇宙意識은 그 自身을 表現하고 進化해간다.
결코 物質이 意識이나 生命, 靈魂 따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한편 進化하는 靈魂(意識)은 한층 進步된 自身을 表現하기 위해 낡은 形像을 벗고 새로운 形像으로 恒常
거듭나야 할 運命에 있는데, 이는 마치 旅行 중인 사람이 일정한 目的地에 到達하면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는 것과 같다. 애니 베산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주어진 宇宙 속에서 神의 生命은 形像들의 향상적(向上的)인 계열을 通한 많은 生命(體) 속으로 進化한다. (로고스의) 生命力은 에너지로서 現顯하며, 形像에 依하여 겉으로 드러나고 더욱 啓發될 機會를 갖게 된다. 그러나 生命이 啓發되기 위해서는 形像들을 繼續하여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各各의 形像은 처음에는 生命의 表出과 啓發의 手段이 되지만 나중에는 束縛의 틀로서 作用하기 때문이다. 비록 生命 ― 나무가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分離될 수 없듯이 神의 生命으로부터 分李할 수 없는 ― 속의 潛在的인 힘이
주변환경의 작용에 의해 표출되기는 하나, 有用한 탈것이었던 形像은 生命을 束縛하는 틀이 된다.
生命은 形成된 形像에 依해 窒息해 消滅할 뿐 아니라, 形像은 조각조각 分解되어 더 높은 形態의 形像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生命을 놓아주어야 한다. 形像은 分解되지만 生命은 消滅하지 않는다.
언제나 進化,擴張, 發展하는 生命을 中心으로 한 形像들의 分解는 進化를 意味한다.” (영적인 삶, p.52)
生命뿐만이 아니라 質料와 形像도 함께 進化한다는 槪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形像들 속에 進化하는 生命이라는 槪念과 自然이 보여주는 秩序整然함, 高度로 發達한 生命體들의 存在는 進化過情 속에 어떤 知性的인 要素가 있음을 暗示하고, 이는 수많은 形像 속을 흐르는 意識의 進化를 考慮하게 만드는데, 엘리스 베일리 여사는 이 進化하는 意識이 밟는 經路는 人間 以前의 意識 狀態로부터 進化하여 어느 瞬間에는 人間의 段階를 거치게 되고 이윽고는 超人間的 意識의 狀態에 이르는 것이라고 假定하였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質問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要蘇들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질 형상과 그 형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지성의 배후에 ‘나’의 기능에 해당하는 것, 혹은 인간의 자아에 해당하는 그 무엇의 進化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자의 의식, p.19)
物質과 形像의 배후에서 進化의 推進力을 提供하는 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앞서 疑問을 품었던 ‘眞情한 나’와 同一한 存在일까?
그리고 人間의 意識이란 무엇이며, 動植物의 意識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 輪回의 主體, 아뢰야識이란 構體的으로 무엇인가?
意識의 單位 모나드
게다가 意識을 지닌 것처럼 行動하는 것은 비단 電子만이 아니다.
빛의 경우를 한번 보자. 非同調性의 평범한 光源으로부터 放出된 光子들은 一般的인 常識대로라면 檢出機에 到達할 때 고른 分布를 보여야 되지만, 實際로는 무리를 지어 다발로 검출되는 현상이 있다. 이것은 마치 光子들에게 社會的 性格이 있어 저희들끼리 뭉치려는 意圖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보고 독일의 물리학자 프리츠 포프는 生物과 無生物의 差異란 量子 水準의 共有狀態가 많고 적음에 따른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림 9.3> 무리를 지어 도착하는 광자의 다발 효과
휠러가 제안한 二重슬릿 實驗에서도 빛의 特異한 性質이 드러난다. 두 개의 슬릿이 뚫린 스크린을 빛이 通過하도록 장치하고 스크린의 오른쪽에 두 개의 粒子檢出機를 그림과 같이 놓으면, 빛은 하나의 슬릿과 하나의 粒子檢出機를 향하는 限定된 通路를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粒子처럼 行動한다.
그런데 만약 이중슬릿과 입자검출기 사이에 검출을 위한 스크린을 설치하면 빛이 이번에는 波動처럼 反應한다. 빛은 두 개의 슬릿 모두를 通過하여, 스스로 干涉한 후 검출 스크린 위에 干涉무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實驗者의 行爲나 意圖 自體가 實驗結果에 影響을 미치거나, 빛이 마치 全切 實驗狀況을 알고 있는 것처럼 行動한다는 事實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림 9.4> 휠러의 이중슬릿 실험 개략도>
빛(光子)은 2장에서 언급한 粒子의 分類에 依하면 보존(BOSON)에 속하는데, 특히 이 보존들의 性質은
波動에 가깝고 同一한 空間에 重疊하여 存在하는 등 고전적인 물질 개념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自然의 粒子들을 서로 서로 이어주는 힘의 媒介役割을 하며, 同一한 量子狀態를 共有하는 보존의 性質은 어찌보면 物質이나 粒子라기보다는 오히려 意識과 類似한 것이다. 물리학과 함께 철학을 공부한 다나 조하르는 두 개의 보존이 만나서 相互作用하는 것이 意識의 가장 基本的인 段階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페르미온 역시 雙을 形成하면 보존처럼 行動하므로 이 둘을 명확하게 區分할 수는 없다고 强調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亞原子 粒子들은 意識의 特性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粒子의 屬性은 이미 앞선 장들에서 언급했듯이 事實上 物質과 意識이 別個가 아님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비록 초보적인 단계일지라도
아원자 입자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모든 萬物에 意識이 遍在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을 聯想케 한다. 사실 범신론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함께 있어온 보편적 철학사상이며, 지금과 같이 생명 없는 물질이라는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된 것은 최근 몇백년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들이 이런 범신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量子物理學者인 데이비드 봄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物質이 同一한 源質로부터 分化되었지만 原子라는 物質의 基本 單位를 갖는 것처럼,
意識 亦是 基本 單位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이 世上에는 수많은 形態의 進化된 有機體들이 있으며, 각 生命體 또는 有氣體마다 다른 有機體와는 區別되는 個個의 意識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卽, 意識 역시 根本은 하나이지만, 어느 한 地点에 초점을 맺거나 바다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처럼
個體化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가
靈魂이 ‘靈魂의 原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으며,
에피쿠로스 역시 ‘靈魂의 原子’라는 것이 온 몸에 흩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個體化를 이룬 意識 혹은 意識의 單位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앞에서 거론한 進化의 主體, 또는 物質과 形像의 배후에서 進化의 推進力을 提供하는 ‘나’에 해당하는 要素일 것이다. 바로 이 意識의 單位를 神秘學에서는 ‘모나드’라 부른다. 신플라톤주의에 影響 받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브루노는 모나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神은 하나이므로 그 神에서 變化한 바의 萬物은 일(一)이라는 存在의 兩面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萬物의 生命은 神이 主宰하는 것이다. 따라서 萬物은 分裂에 分裂을 거듭하여 極微의 것이 되면 여기에서 물심(物心) 兩面性을 띠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단자(單子), 즉 모나드다. 單子는 그 狀態에서 神을 나타내는 것인즉, 單子란 것은 바로 宇宙 自體의 映射鏡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p.176)
과거 부루노나 라이프니쯔의 哲學을 깊이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이들이 原子論者의 原子를 代替하는
意味에서 모나드(單子論)란 槪念을 만들어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학에서는 原子(窮極原子)와 모나드를 서로 區別하고 있으며, 부루노 역시 결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神秘學에서 모나드는 空(VOID)이 하나로 凝結된 点이자 제1로고스의 存在意志가 불꽃의 閃光들로 나타나는 意識의 單位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드들은 最上의 불(至高의 불)의 閃光들로, 즉 ‘神의 單片들’로 묘사되고 있다.” (原因體, p.8)
<비교>의 한 문답에서 스승의 질문에 제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머리를 들어라. 오, 라누여! 너는 네 머리 위의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불타는 하나, 혹은 수많은 빛들을 볼 수 있느냐?” “하나의 위대한 불꽃을 느낍니다. 오, 구루데바여! 저는 分離되지 않은 無數한 閃光들이 불꽃 안에서 빛나는 것을 봅니다.” (비교 1권, p.120)
하나의 偉大한 불꽃은 이쉬바라이며, 제1로고스로서 現顯해 있다. 分離되지 않은 狀態의 閃光들은 ― 인간과 다른 存在들의 ― 모나드이다. ‘分離되지 않은’이란 表現은 모나드들이 로고스 自身임을 意味한다.
“太初에 오직 唯一한 存在만이 있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太初에는 아무것도 存在하지 않았을 따름이며, 그 無의 狀態에서 宇宙가 나왔다고 말한단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存在가 어떻게 無로부터 나올 수 있겠느냐? 아니다, 내 아들아. 太初에는 오직 唯一한 存在가 있었느니라. 그가 바로 唯一한 존재였으며, 그 스스로가 온갖 많은 存在들을 내려고 生覺했단다.
그러므로 그는 그 自身으로부터 宇宙를 만들었으며, 그 自身으로부터 宇宙를 創造하고 난 後에 모든 存在들 속으로 들어갔느니라. 存在하는 모든 것은 오직 그의 안에서만 모습이 있었단다. 모든 事物들 가운데에서 그는 微妙한 바탕이었으니, 그는 眞理이니라. 그는 神이니라. 그리고 스베타케투야, 그는 바로 너이니라.” (찬도갸우파니샤드)
이렇게 無數한 意識 單位들이 태어나게 된 것은 제1로고스가 現顯하고자 하는 意志가 作用된 結果이다.
“언제나 生命을 더욱 完全하게 現顯시키고자 애쓰는 이 神性한 衝動은 自然界의 모든 곳에서 보이는데,
종종 存在意志로 이야기되고 있다. ... 擴張하고자 하는 것, 增大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存在意志에서
온다” (원인체, p.10~11)
한편 모나드가 物心兩面性을 띠는 存在라는 것은 다음 文句들에서 잘 表現되고 있다.
“하나의 모나드는 質料라는 가장 엷은 幕에 依해 하나의 個別 實體로서 分離된 神性한 生命 그 自體의 一部라고 定義할 수 있다. 그 質料는 너무나 엷어서, 비록 各各의 모나드에게 別度의 形態를 賦與하지만, 이렇게 質料에 둘러싸인 한 生命이 주위의 비슷한 生命들과 自由롭게 相互作用하는 데 아무런 障碍가 되지 않는다.” (원인체, p.8)
“모나드는 純粹한 意識, 純粹한 自我(Self), 삼빗(samvit)이 아니다. 그 槪念은 抽象的인 것이다. 構體的으로 現顯된 物質宇宙에서는 恒常 自我(Self)와 그의 집들(혹은 體들)이 ― 아무리 그 質料가 엷을지라도 ― 함께 存在하고 있어, 意識의 單位를 質料(物質)에서 分離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나드는 意識과 質料를 합친 것이다.” (원인체, p.9)
하지만 모나드가 입고 있는 엷은 質料는 最低 限度에서 個別性을 保障하는 것에 불과해서, 그것이 物質
속에서 進化해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外的 條件을 必要로 한다. 이 때문에 제1로고스의 所産인 모나드들은 두 번째 계인 아누파다카계(아누파다카계를 모나드계라고도 한다)에 머물면서 自身들을 表現할 外部 與件을 제3로고스가 調成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림 9.5는 자신들이 진화하게 될 무대인 세계가 만들어지는
동안에 자신들의 고유영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나드들을 나타낸다.
“生命의 根源이 아디界에 있지만, 모나드 자신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體들도 없이, ‘神의 아들들이 現顯할(나타날)’ 날을 기다리면서 아누파다카界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제3로고스는 物質宇宙의 質料를 形成하면서 外部的인 現顯作業을 始作한다.” (原因體, p.9)
<그림 9.5> 모나드의 출현
제3로고스가 物質宇宙의 質料를 形成하는 過程을 <原因體>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제3로고스 혹은 宇宙心은 空間의 質料 ― 물라프라크리티 ― 에 作用하여, 自神의 세 가지 屬性 타마스
(慣性), 라자스(移動性), 그리고 사트바(리듬)를 安定된 均衡狀態(대칭)에서 不安定한 균형상태(대칭성의 파괴-역주)로 만들어 이러한 狀態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의 關係를 통해서 繼續해서 運動을 일으킨다.
제3로고스는 이리하여 다섯 개의 하위계인 아트마, 붓디, 마나스, 카마와 스툴라(마나스는 멘탈계, 카마는 아스트랄계, 스툴라는 물질계를 일컫는다)의 原子들을 創造한다. ‘포하트’는 原初的인 物質 혹은 創世 前의 質料에 電氣的인 에너지로 生命을 띠게 하여 原子들을 分離(形成)시킨다.” (원인체, p.12)
<그림 9.6> 다섯 下位界의 形成
그러나 原子(궁극원자)의 形成에 관여하는 것은 제3로고스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하부계들의 質料는 現在 存在하고 있는 質料가 아니다. 그 質料를 더욱더 强하게
統合(結合)시켜서 現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形態들의 物質을 形成시키는 것은, 智慧 혹은 사랑의 側面인 바로 제2로고스의 ‘더욱 强하게 끌어당기는 凝集力이 있는’ 에너지들이기 때문이다.” (원인체, p.12~13)
제2로고스는 제3로고스에 의해 活性化된 質料 속으로 그 生命力을 下降시키며, 제3로고스에 의해 준비된 질료들은 이 신성한 생명의 두 번째 유출에 의해 섬유처럼 짜여져 장차 정묘하고 조잡한 여러 형체들로
발전하게 될 原初的인 組織들(tissues)을 形成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原子의 스파릴래를 活性化시키는 것은 제1로고스의 일이다.
“原子인 그 소용돌이 自體는 제3로고스의 生命이다. 이 소용돌이의 표면에서 서서히 形成되는 原子의 壁은 제2로고스의 生命이 下降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러나 제2로고스는, 마치 幕이 쳐진 通路를 흐르듯이 스파릴래의 外廓線을 따라 단지 미약하게만 나아갈 뿐이다. 그는 그들을 活性化시키지는 못한다.” (원인체, p.38)
“스파릴래로 알려져 있는 原子들 속에 있는 ― 소용돌이 모양으로 ― 回轉하는 흐름들은 제3로고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나드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원인체, p.13)
神誌學에 따르면 現在 4개의 스파릴래만 活性化되어 있다고 한다. 제5라운드, 제6라운드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스파릴래가 活性化된다고 하는데, 이는 모나드와 原子의 關聯性과 進化를 同時에 示唆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原子 內部에는 意識의 세 側面에 對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反應이 일어날 可能性들이 ― 必然的으로 ― 包含되어 있으며, 이 可能性들은 進化하는 過情의 原子 속에서 펼쳐져간다.” (원인체, p.13)
모든 原子의 核心에는 靈魂 또는 모나드가 있다. 原子 또한 意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비학의 관점이다. 비록 그것이 人間의 意識과는 다른 種類라 해도 原子가 意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物質을 바라보는 우리의 視角에 대한 새로운 省察을 要求한다. 原子의 形成에 로고스가 作用하는 것만 보더라도 物質과 意識을 別個로 生覺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物質의 窮極原子, p458-478에서 인용)
한편 모나드는 그 自身의 界인 아누파다카界(모나드界)에서는 전지(全知)하고 편재(遍在)하지만, 나머지 下位係에서는 無意識的인, 다시 말해 ‘知覺이 없는’ 狀態이다. 모나드는 모든 界에서 全知하고 遍在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단지 最高의 높은 界의 振動에만 反應하는 것이 아니라 宇宙에 存在하는 모든 神性한
振動들에 反應할 수 있도록(즉 下位係들을 經驗하기 위해서) 그 自身의 光彩를 가리는 質料의 옷을 입고서 下位界로 下降하였다.
먼저 모나드는 아트마, 붓디, 멘탈계(마나스계)의 窮極原子들과 차례로 結合하는데, 이렇게 모나드와 結合된 窮極原子를 ‘永遠한 原子(permanent atom)’, 또는 ‘生命 原子(life atom)’라고 한다. 永遠한 原子는 物質界로 直接 내려올 수 없는 모나드가 下位界에 影響을 미치기 위해 使用하는 좋은 媒體 겸 道具이다.
모나드는 이 아트마-붓디-마나스의 永遠한 原子를 通하여 三重的인 靈, 또는 所謂 上位의 三個組를 形成하였다. 이 上位의 三個組(아트마-붓디-마나스)는 質料의 베일에 의해 비록 그 힘이 制限되고 弱해지기는 했지만 本質上 모나드와 同一하다. <원인체>에서는 그것은 사실상 모나드라고까지 말한다.
<그림 9.7> 모나드와 상위의 삼개조 (원인체, p.31)
이 上位의 三個組를 靈的인 3개조, 天上의 人間, 지바트마(Jivatma), 上位 自我, 神性한 아들, 순례자,
모나드의 光線 등으로도 부르는데, 純粹한 靈인 모나드 및 肉體를 包含하는 下位 自我와 함께 三重으로
構成되는 人間 構造의 中間 部分에 해당되는 것이다.
나중에 상위 멘탈계에서 原因體라는 것이 形成되었을 때, 이 上位의 三個造는 에고(ego)라고도 불리며
原因體를 그 體로 使用하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人間의 靈魂(spirit &soul)은 바로 이 에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된다. 靈魂은, 純粹意識의 불꽃인 모나드조차 質料的인 側面을 갖고 있듯이, 더 높은 靈(spirit)의 下位 媒體(質料的 性格을 包含하고 있는)가 되는 人間 本性의 中間的인 部分이라고 할 수 있다.
反面에 人間의 下位 自我는 下位 마나스(하부 멘탈)계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물질계의 體들로 構成된다. 卽 幽體離脫 등의 經驗을 통해서 그 存在를 認知할 수 있는 에텔체와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이 모두 下位 自我에 속하는 것이다.
<그림 9.8> 人間의 3重的 構造
人間은 이렇게 肉眼으로는 볼 수 없지만 多樣한 體(body)들로 構成된 複合的인 存在이며,
各各의 體들을 通해서 그 體가 속한 界의 振動과 經驗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原因體라는 것은 에고와 함께 人間을 動物이나 植物 같은 다른 生命體들로부터 區別짓는 아주
重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人間만이 原因體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個體性의 確立을 뜻한다.
個體性은 進化의 産物이다. 個體性이 確立됨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自意識이 生겨났으며,
이때부터 個別 生命體로서의 永續性이 意味를 갖기 始作하였다. 예를 들어 人間은 죽어도
原因體라는 것이 남아 있어 또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더라도(즉 下位의 體들이 새로 構成이 되더라도) 다시 태어난 그 몸은 同一한 原因體의 支配를 받게 된다. 卽 前生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록 몸은 다르지만
同一한 靈魂을 所有하고 있는 것이다. 原因體는 바로 이런 返復的인 삶, 卽 輪回(循環)의 主體가 된다.
反面에 動物들은 죽게 되면 그 個體性이 사라지고 만다. 다시 말해 죽기 前과 同一한 靈魂으로서 物質界에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代身 動物들은 集團靈魂이라는 것에 連結되어 있어서, 動物이 죽게
되면 그 靈魂은 이 集團靈魂이라는 巨大한 연못 속에 녹아든다. 各各의 個體動物의 靈魂이 經驗했던 모든 振動들은 이 연못 속에서 하나로 뒤섞이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 物質的 個體의 經驗이 集團靈魂 全切에 影響을 끼칠 수는 있지만, 그 自體만으로 고스란히 保全되지는 못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動物이 태어나게 되면, 이 集團靈魂의 연못으로부터 한 바가지만큼의 물이 퍼올려져 그 動物의 靈魂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原因體라는 個別 靈魂의 貯藏裝置가 形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原因體가 形成되기 前에는
人間은 오직 모나드로서만 存在했으며, 다만 모나드는 下位界의 形成과 動植物의 登場, 그리고 動物의
集團靈魂이 原因體로 發展하기까지의 全進化過程에 걸쳐 微微하게 作用했을 뿐이다.
모나드는 人間의 出現으로 進化의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된다.
進化의 全過程을 理解하려면, 먼저 세 번으로 나누어져 이루어지는 神性한 生命力의 下降을 살펴보아야 한다. 原子의 形成에 로고스의 세 側面이 차례로 作用하듯이 宇宙 全切의 進化에도 이 神性한 生命力이
三位一體로 現顯하여 作用하는데, 各各을 제1로고스, 제2로고스, 제3로고스, 또는 로고스의 첫 번째 側面, 두 번째 側面, 세 번째 側面이라고 부른다. 비록 우리가 전자의 용어를 즐겨 쓰고 있지만,
사실은 후자의 표현이 보다 정확한 것이다.
<그림 9.9> 로고스의 세 側面
제3로고스 혹은 로고스의 세 번째 側面으로부터 비롯된 첫 번째 生命力의 流出은 下位界의 原子들을 造成하고 다른 로고스의 側面들이 下降할 수 있도록 事前 整地作業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질료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질료들이 아니며, 이를 더욱 强하게 結合시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形態들의 物質로 만드는 것은 智慧 혹은 사랑의 側面인 제2로고스의 ‘더욱 强하게 끌어당기는 凝集力 있는’ 에너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포하트가 제3로고스의 生命力을 대변한다면, 제2로고스의 生命에너지는 프라냐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普通 우리가 生命體 또는 有機體라고 여기는 生命形態가 生命을 이어나가게 하는 原動力이다.
이 生命形態는 제2로고스의 生命力이 그 形體를 維持하여 가는 동안 存續하게 된다.
이 두 生命力의 흐름은 하위계들을 通過하여 漸進的으로 下降한 끝에 鑛物界에까지 이른다.
그 後 이 두 흐름은 植物界와 動物界를 거쳐 人間界로 上昇하는데, 人間界에서 로고스의 첫 번째 側面으로부터 下降하고 있는 세 번째 流出과 만나게 된다.
<그림 9.10> 進化舞臺의 形成과 로고스의 神性한 生命力의 下降
위의 그림을 보면서 좀더 自細히 說明해보자.
제3로고스에 依해 形成된 各 存在界의 原子는 제2로고스의 生命力이 附加되어 모나드 에센스가 된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段階의 原子(모나드 에센스)가 모나드와 結合하여 ‘永遠한 原子’가 되기에
適合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原子가 모나드와 結合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모나드와 結合하여 ‘永遠한 原子’가 되지 못한 原子들은 繼續 모나드 에센스로 남아있게 된다.
한편 모나드 에센스가 멘탈계 및 아스트랄계의 分子들과 結合하여 이들 質料를 영화(靈化)시키면
엘리멘탈 에센스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獨特한 이름의 이들은 멘탈계와 아스트랄계의 質料로 이루어진
一種의 元素的 生命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自身이 속한 界의 特정한 振動에 反應하는 법을 배우면서
永劫의 歲月동안 經驗을 蓄積해나간다.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는 振動의 差異에 따라 上位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와 下位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나뉘는데, 上位 멘탈계에 속한 엘리멘탈 에센스들의 生命界를 제1엘리멘탈계라 부르고 下位 멘탈계에 속한 엘리멘탈 에센스들의 生命界를 제2엘리멘탈계라 한다. 엘리멘탈 에센스들은 먼저
제1엘리멘탈계에서 오랜 進化의 期間을 거친 後에 비로소 제2엘리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進化한다.
제2엘리멘탈계에서의 經驗을 完遂하면 이번에는 제2로고스의 生命이 아스트랄계라고 하는 더 아래 段階의 振動 領域으로 내려오는데, 이 곳에서 제2로고스의 生命은 아스트랄 質料로 된 形態들을 取하여
제3엘리멘탈계를 形成한다.
제3엘리멘탈계에서 오랜 進化의 過程을 보낸 제2로고스의 生命은 비로소 鑛物界의 에텔적인 部分에 生命을 불어넣어 鑛物界를 活性化시키는 生命이 되고,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鑛物界가 모습을 드러낸다.
鑛物 속에서는 멘탈 單位라고 부르는 一種의 멘탈 分子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물질계의 永遠한 原子들이 發見되는데, 이들은 모나드, 그리고 上位의 삼개조와 連結된 下位의 삼개조라 불리는 原子(또는 分子)들의 組合이다. 이들은 붓디계의 質料로 둘러싸인 가느다란 실로 상위의 삼개조와 連結되어 있다.
상위의 삼개조와 하위의 삼개조를 이루는 永遠한 原子들의 用度는, 振動의 힘들로서 그들이 겪었던 모든 經驗의 結果들을 그들 속에 保全하는 것이다. 따라서 永遠한 原子들은 進化하는 에고와 함께 永遠히 남아 있는 唯一한 部分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상위의 삼개조가 高度로 進化한 段階에 이를 때까지는 이들 永遠한 原子들과 連結되어 있는 모나드가 直接的으로 作用하지 않고 間接的으로 作用할 뿐이며, 그때까지
상위의 삼개조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제2로고스로부터 부여받는다.
제2로고스의 生命力 또는 두 번째 流出이 鑛物界의 中心에 到達했을 때, 下降하는 壓力은 中斷되고 進化의 물결은 上昇하는 性向을 띠게 된다. 이에 따라 신비학에서는 全切의 進化過程을 둘로 區分하는 傳統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進化過程을 下降 進化 또는 內的 進化(involution)라 하고,
以後의 進化過情을 上昇 進化 또는 外的 進化(evolution)라 한다.
內的 進化의 일반적인 計劃은, 神性한 生命의 巨大한 물결이 漸進的으로 分化되는 過程을 意味하고, 結局 返複되는 分化와 細分化의 過程을 通해 하나의 人間으로서의 明確한 個體性이 確立되는 것이다. 人間으로서 細分化가 된 後에는 더 以上의 細分化가 不可能한데, 그 理由는 人間的인 實體가 더 以上 나눌 수 없는 單位 혹은 ‘靈魂’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動物界와 植物界, 심지어 鑛物界에 存在하는 集團靈魂은
個別的인 人間의 實體들 혹은 單位(靈魂)들로서 完全한 分化에 이르기 前의 中間 段階들을 나타낸다.
最初의 集團靈魂은, 下位의 삼개조가 형성될 때 그 주위로 層을 이루며 모여든 제2엘리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와 아스트랄 모나드 에센스, 그리고 에텔 질료가 보호막을 만들면서 생겨난다. 그러나 三重의 膜으로 形成되어 있는 集團靈魂의 壁은 植物界와 動物界를 거치면서 차츰 엷어져 動物에서는 제4하위 멘탈계의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만으로 構成된 단지 하나의 層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鑛物과 그 集團靈魂의 活動領域이 主로 物質界에 局限된 데 反해 植物界와 動物界에선 아스트랄계와 멘탈계로 活動領域이 넓혀졌고, 따라서 그 自身의 에텔체 및 아스트랄체를 强化시키는 데 集團靈魂의 物質的 層이 使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集團靈魂에 속한 永遠한 原子들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비슷한 經驗을 했던 永遠한 原子들끼리는 서로 强하게 影響을 주고받는데, 이렇게 始作된 分離는 結局 集團靈魂의 分裂을 가져온다. 植物界와 動物界로 올라갈수록 永遠한 原子들은 훨씬 多樣한 振動들을 經驗하게 되고, 集團靈魂들이 分化하는 速度도
더욱 빨라지게 된다. 하나의 集團靈魂 속에 있는 하위 삼개조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게 되어, 結局에는
각각의 하위 삼개조가 별도의 자신의 體를 가지기까지에 이른다.
<그림 9.11> 동물의 집단영혼과 분리
이렇게 되면 더 以上 集團靈魂이라는 表現은 어울리지 않게 된다. 한편으로 永劫의 歲月동안 多樣한 經驗을 마친 下位의 삼개조는, 마침내 한층 더 많은 양의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段階로 나아갈 수 있을 程度로 充分히 覺性된다. 즉 세 번째 유출로 알려진 제1로고스의 生命力이 本格的으로 下降할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제1로고스의 所産인 모나드의 生命力이 크게 增大함에 따라 上位의 삼개조에 속한 永遠한 原子들 사이의 흐름 역시 增大되고, 멘탈계의 永遠한 原子가 覺性되어 振動을 發散하게 된다. 이어 다른 멘탈 원자들과
분자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어 上位 멘탈계에 소용돌이 하나가 形成된다. 이와 유사한 소용돌이 運動이
집단영혼 속의 멘탈 단위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 같은 질료 속에서도 일어나는데, 集團靈魂의 壁은 그後에 갈갈이 찢어져서 위에 있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올라간다. 여기서 그것은 解體되어 제3 下部 멘탈계의
質料로 鎔解된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가 가라앉을 때 그것은 精妙하고 엷은 膜과 같은 하나의 體로 形成되는데, 이것이 바로 原因體(causal body)다.
<그림 9.12> 原因體의 形成 (원인체, P.68)
原因體가 形成됨으로써 上位의 삼개조 혹은 靈的인 삼개조는 훨씬 더 高度로, 그리고 훨씬 더 效果的으로 進化를 繼續하기 위한 永遠한 體를 하나 갖게 되었다. 原因體는 만반타라 期間동안 사라지지 않고 永遠한 것이다. 그것은 反復的인 삶, 즉 輪回의 主體이다. 原因體를 原因體라고 부르는 것은 原因體 속에 下位 여러 界들에서 結果로서 나타나게 될 모든 原因들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現在의 人生觀과 그에 따라 取하는 行動의 原因은 原因體 속에 貯藏된 過去 生의 經驗들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로 原因體는 ‘카라나 샤리라’라고 하는데, 카라나는 原因을 意味한다.
앞에서 아뢰야識의 말뜻이 아라야, 즉 永遠히 存在하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意味를 가지고 있으며 同時에 輪回의 主體가 된다고 했는데, 이로부터 아뢰야識은 原因體, 또는 에고(에고는 靈, 直觀, 知性 이 세 가지
側面의 統合으로서, 原因體에 居住하고 있다)와 密接한 關係에 있다고 抽情해볼 수 있다.
原因體가 個體性을 지닌 永圓한 生命의 主體가 되는 反面, 人間 本性의 下位 部分, 卽 肉體를 포함한
下位 自我(인간의 하위자아를 보통 人格 혹은 人性이라고도 한다)는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먼저 肉體가 죽고 난 뒤에 에고가 各各의 體를 비워감에 따라 아스트랄체와 멘탈체가 分解되고 마침내
原因體만 남게 된다. 에고가 原因體만 입고 있을 동안에는 한때 下位自我를 形成했던 物質界의
永遠한 原子, 아스트랄계의 永遠한 原子, 그리고 멘탈 單位가 非活性化되어 原因體 內로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永遠한 原子가 非活性化되어 睡眠狀態에 들어가면, 스파릴래 속을 흐르는 正常的인 生命力의 흐름도 減小하게 된다. 上位 멘탈계에서의 삶이 끝날 때, 卽 原因體로서의 삶이 끝날 때 下位界에서의 더 많은 經驗을 願하는 에고는 다시 天界의 門턱을 넘어서 環生의 領域으로 들어간다.
<그림 9.13> 輪回의 過程 (원인체, p.147)
이렇게 에고는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탄생과 죽음의 影響을 받지 않는 不滅의 個體性이 되고, 原因體는
上位의 生命力(宇宙的 靈)을 부여받아 하나의 点으로 集中시킴으로써 分離를 일으키는 受容體가 된다.
本質的으로 人間의 靈은 宇宙的 靈(로고스)과 同一하지만,
下位界에 現顯했을 때는 個體로서 分離된다.
이런 分離 또는 個體化의 目的은, 하나의 個體가 形成되어 成長하며, 强力한 힘을 가진 個體化된 生命이
宇宙의 모든 界에 나타나며, 그 生命이 靈界에서 아는 것처럼 물질계와 다른 계에서도 알고서
意識의 連續性을 維持하며, 그 生命이 자신의 계를 벗어나서도 意識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體들을 스스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서서히 그 體들을 하나씩 淨化하여 體들이 더 以上 障碍가 되지 않고
모든 界의 知識 全部가 들어오는 純粹하고 半透明한 媒體로서 作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식물의 진화, 또는 지금까지 언급한 進化過程의 目的은 個體性을 達成하기 위한 것이라고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러나 個體性의 達成이 進化의 마지막 終着驛은 아니다. 그림 9.10에서 보듯이 人間은
‘초인(超人)’이라고 標示한 進化의 다음 段階를 向해 中斷없이 나아가는데,
그것은 自身이 나왔던 根源인 神性을 向하여 되돌아가는 過程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進化의 過程은 어느 한 方向만을 쫓아서 흘러가는 一方的인 것이거나 아무런 目的도 없이
遇然的으로 이루어지는 盲目的인 過程이 아니라, 根源으로부터 物質을 向하여 내려오는 下降의 過程과
다시 根源으로 돌아가려는 上昇의 過程이 어우러진 것이다.
이를 下降 進化와 上昇 進化, 또는 내적 진화와 외적 진화라고 구분을 하며,
개략적으로 다음 그림과 같은 단계를 밟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림 9.14> 진화의 일곱 단계 (<원인체> p.77)
生命의 물결이 下降하는 1, 2, 3단계는 점차 堅固한 物質化가 이루어지는 過程이며, 靈과 物質이 均衡을
이루는 4단계를 지나서 有機體는 다시 영화(靈化)되는 過程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靈의 狀態로 원상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진화과정에서 經驗한 수많은 體驗과 智慧를 通해 意識의 覺性狀態를 이룸으로써, 自覺을 가진 神으로 다시 태어나는 過程인 것이다.
印度에서는 靈이 下降하여 質料 속으로 들어가는 全過程을 프라브리티 마르가, 卽 떠나는 길이라 불렀으며, 그 反對의 길을 니르브리티 마르가, 卽 歸還의 길이라 불렀다.
事實 宇宙라는 活動領域은 모나드들, 卽 意識의 單位들이 質料를 通해서 進化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나드는 永遠한 原子와 에고라는 옷을 입고, 또는 下位의 여러 體들과 集團靈魂 혹은 原因體라는
宇宙船을 갈아타며 마치 宇宙旅行을 하고 있는 巡禮者처럼 보인다.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p.479-493 에서 인용)
출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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