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斗七星, 永遠의 시계바늘
손영달 ((남산강학원 Q&?)
이 글이 포스팅 될 때 쯤 아마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돌 제방을 쌓고 있을 것이다. 크레인도 지게차도 없이.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소백산 중턱을 향해 등짐으로 바위덩이를 져 나르고 있을 것이다. 현대판 시지푸스라도 되려는 건가? 찌는 삼복더위에, 대체 소백산에 돌덩이는 뭣 하러!
이 모든 일은 ‘윤달’로부터 비롯되었다. 올해는 그 유명한 윤삼월이 든 해이다. 윤달은 해와 달의 운행주기가 달라서 생긴 달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끼워 넣은 달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래 없던 달이 왔다며 윤달 내내 놀고먹으며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때를 별렀다가 ‘푸닥거리’를 한다. 수의를 맞추고, 이장을 하고, 가토를 한다. 열세 번째 달, 원래 없는 달이기에 이때는 귀신도 쉰다는 게 그 이유다. 귀신들에게는 17년에 단 3번 오는 소중한 연차인 셈. 그렇기에 후손들이 무덤을 파헤치는 금기를 범해도 너그러이 봐준다. 한 무속 한다는 우리 집안에서 이 찬스를 그냥 넘길 리 없다. 지력(地力)이 衰했다고 그동안 말이 많았던 증조부의 산소를 윤달에 이장(移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산소의 제방을 쌓으러 가는 것이다.ㅠㅠ
요것은 칠성판. 북두칠성을 표시해서 망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아주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를 이장할 때 언뜻 본 것도 같다.^^
제목이 북두칠성 이야기인데 난 또 왜 푸닥거리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건가? 난생 처음 보는 移葬 과정 중에 내 눈길을 끌었던 ‘칠성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七星板은 屍身을 누이는 널빤지이다. 2미터 정도 길이의 널빤지에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을 따라 구멍을 뚫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칠성판을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이유는 망자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기 위함이란다. 우리에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아름다운(?)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북두칠성일까? 북두칠성은 망자들의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북두칠성은 우리네 민속 신앙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별자리다. 정화수 한 사발을 떠놓고 기도를 올리던 그 옛날 어머님들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또한, 사찰에 들어서 일주문 지나 대웅전 지나 후미진 곳 깊숙이 올라가면 칠성신을 모셔놓은 三聖閣이 있다. 三聖閣이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 神을 모시는 곳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뿌리 내리며 도교 성향의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다. 이렇듯 북두칠성은 오랜 시간 동안 민중들의 삶과 함께 해 온 별이다. 왜 북두칠성은 민중들에게 그와 같은 호응을 받았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북두칠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함께 북두칠성의 일곱별을 향해 여행을 떠나보자!
삼신할미와 고인돌
신화학에서는 이런 행위를 '장소의 정령'에게 기원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우주전체가 영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는 커다란 생명체라고 봤던 것이다.
북두칠성은 생사를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우리의 삶은 북두칠성에서 시작되어 북두칠성으로 끝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네 어머님들의 정화수는 칠성신(七星神)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전래동화의 한 대목에서 이런 대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신께 비나이다! 이 늙은 부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옥동자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옛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南斗六星)의 연계 플레이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두육성은 여름철 별자리로 서양 별자리로는 “궁수자리”의 일부 별들이다. 여섯 개의 별이 마치 미니 북두칠성처럼 국자 모양으로 연이어 있다. 남쪽의 국자 별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을 南斗六星이라 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三神할머니’의 별이다. 子息을 바라는 인간의 精誠이 북두칠성에 應하면 새로 태어날 靈魂은 北斗七星의 協力業體 格인 南斗六星으로 간다. 거기서 三神할머니께 엉덩이를 찰싹 얻어맞고 어머니의 태(胎)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기 엉덩이의 몽고반점은 이때 생긴 멍자욱인데 이게 前生의 記憶을 잊게 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래서 맞을 때 시퍼런 자국이 남도록 아주 제대로 맞아 주어야 한다.
南斗六星과의 협력 하에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기도 하지만, 北斗七星의 主 業務를 굳이 따지자면 ‘죽음’이다. 북두칠성에 거하는 칠성신은 인간의 壽命을 주관한다. 이런 전설이 있다. 중국 위나라에 관로라고 하는 점성술의 대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밭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안초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얼굴을 보니 곧 죽을 운명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안초를 불러 말했다. "모월 모일 밭가 뽕나무 아래에 가면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테니, 그 옆에 앉아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들어라." 안초는 뽕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두 노인을 찾아 고이 술시중을 들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노인은 수명을 기록한 명부를 뒤져 ‘十九’를 ‘九十’으로 뒤집어 주었고, 소년은 90살까지 오래 오래 살았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노인이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의 신령이다. 남쪽에 앉은 이가 남두육성, 북쪽에 앉은 이가 북두칠성의 신인데, 남두의 신은 삶을 관장하여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의 신은 죽음을 관장하여 사망일을 기록한다. 둘이 나란히 생사의 끈을 쥐고 있지만 북두의 신이 좀 더 끗발이 셌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문제가 보다 민감한 것이었던 것. 동양인들의 정서 상 태어난 이상 수명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게 지복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기도 했으리라. 이것이 북두칠성이 그 오랜 시간 구복(求福)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다.
북두칠성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인간의 죽음과 함께 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을 살펴보면 북두칠성 별자리를 새겨 놓은 문양이 남아 있다. 고분의 무덤 천정에도 북두칠성의 그림이 있다. 이 풍습이 오늘날의 칠성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간은 북두칠성을 통해 세상에 나와 살다가 죽으면 다시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 삶과 죽음은 끝없는 循環의 고리로 잇대어 있다는 것. 億劫의 歲月 동안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공유해 온 것이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Uroboros)가 상징하듯, 宇宙는 삶과 죽음의 끝없는 循環 고리를 이루며 돌고 돈다. 그것이 우주의 시간이다. 여기서 북두칠성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사의 고리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북두칠성, 천자의 수레가 되다
언제부터 우리는 북두칠성과 함께 했을까? 그 시원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중국 최초의 문자 기록에 이미 북두칠성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우린 북두칠성과 함께 살아 온 것이다. 물론 시절이 바뀌고, 그와 함께 신봉하던 사상이 바뀌면서 북두칠성의 의미는 조금씩 변해왔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감각으로 북두칠성을 보았고, 그때마다 북두칠성은 각기 다른 색깔로 채색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늘의 핵심 별자리로 인간의 세계를 주관한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진한시대에 북두칠성은 천자의 통치행위를 상징하는 별이었다. 중원 통일의 꿈을 이룬 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시대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북두칠성은 주극성(週極星)이다. 週極星이란 사철 내내 온 밤을 밝히며 지지 않는 별을 일컫는다. 이름 그대로 北極星(極) 주변을 도는(週) 별들이다. 북극성과 북쪽 지평선을 반지름 삼아 천구에 가상의 원을 그리면 이 안에 들어오는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하는 主極星이 된다. 이 범위 안의 별들은 절대 地平線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므로 特別한 의미로 다가왔다. 동양에서는 이를 자미원(紫微垣)이라 칭했다. 북두칠성은 그 안에 속하는 별자리다. 끊임없이 사방위를 도는 이 별을 사람들은 우주 질서의 주재자라 여겼고, 정치의 모델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이 별을 천자를 싣고 달리는 수레 모양이라 생각했다. 북두칠성이 사방위를 주유하며 사시와 오행의 질서를 세우듯이, 천자는 중원 영토의 사방을 순행하며 정치 질서를 건립했다.
이 알 수 없는 글자들과 괘들의 향연. 맞다. 요게 음양오행의 정수를 한 눈에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게 정상이다.^^
북두칠성이 우주의 기틀이 되는 별자리이기 위해선 우주의 규범 원리를 아우르는 상징적 의미를 포함해야 했다. 사람들은 북두칠성을 우주론의 기본 뼈대가 되는 “음양오행”을 명시하는 별자리로 인식했다.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천체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음양은 곧 해와 달이다. 해와 달로 인해 낮과 밤의 교대가 생기고 여기서 하루라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또는 음양은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상하의 공간적 격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벼운 양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을 이루고 무거운 음의 기운은 아래에 엉겨서 땅이 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경우건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이 역동하면서 생긴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둘로 나뉘는 성질의 것이 아닌 고로, ‘1=2’라는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오행(五行) 역시 마찬가지. 오행은 하나의 태극(太極)을 조금 더 클로즈 업 해, 다섯 스텝으로 나눈 것이다. 오행은 사계절의 교대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네 국면에서 출발했다. 이것의 사상(四象)의 시간적 의미다. 오행은 이 시간적 의미에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위(四方位)라는 공간적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이때 오(五)라는 수는 그 순환운동의 회전축을 더한 것이다. 사상의 네 국면은 정지 · 분할된 각각의 컷들이 아니라 상호 순환하는 질서의 산물이다. 시간으로 보면 사계절과 각 계절 사이의 마디, 공간으로 보면 사방위와 그 중앙, 천체로는 수금화목토의 오성(五星). 이것이 곧 오행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행(行)이란 움직인다는 의미다. 그것도 삐걱삐걱 절룩이며 걸어가는 모양이다. 한 발을 들고 깽깽이로(亍) 비틀거리며 걷는 모양(彳)이 곧 행(行)인 것이다. 어긋남과 충돌, 그 많은 사건의 와중에도 우주는 쉼 없이 돌고 돈다. 그렇기에 이 역시 하나의 태극(太極)과 다르지 않다. 수식으로 나타내면 ‘1=2=5’라는 희한한 모양새가 연출된다.
자, 그렇다면 이 수만 가지 宇宙秩序를 모두 아울러 질서화 한 것이 북두칠성이 의미하는 수(數) 7이다. 럭키세븐의 그 7도 여기서 나온 건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동양에서 7이란 수는 곧 음양(2)과 오행(5)의 결합체이며, 우주 질서의 상징이었다. 이는 음양이 나타내는 상하(上下), 오행이 나타내는 사방(四方)과 중앙(中央), 즉 3차원의 시공간을 표상한 것이다. 혹은 일월(日月) 오성(五星)이 조화를 이루는 천체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수식으로 하면 ‘1=2=5=7’이다.
사마천은 『천관서』에서 “북두칠성은 이른바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 칠정(七政)을 다스림을 일컫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기옥형이란 아름다운 옥구슬로 된 저울대라는 뜻이다. 이 저울의 용도는 하늘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다. 해와 달과 오성(五星)의 질서, 하늘의 음양과 오행을 주관한다. 나아가 음양오행에 의해 행해지는 만사의 일들을 다스리기도 한다. 그래서 “칠정(七政)”을 다스리는 별이란 직함을 얻었다. 이렇듯 北斗七星은 宇宙 秩序의 根幹이었다. 자연 현상과 정치질서를 아우르는 세계 질서의 총체가 그 안에 있다. 진한시대의 사람들은 이 수레의 바가지에 탑승한 천자를 상상했다. 그는 곧 세상의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는 존재였다.
북두칠성은 일곱이 아니다
한편 한무제가 유학을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천명하면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 도가들은 북두칠성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키워갔다. 한대의 우주론은 중앙 집중형 관료시스템이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운행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인간의 현세적인 욕망이나 종교적 요구들이 제기될 통로들을 철저히 봉쇄했다. 이에 도가 사상은 한대의 지고한 정치 문화와는 다른 출구를 모색했다. 유가들의 천문학이 일종의 국가 경영 지침서였다면, 도가들은 개인의 몸과 운명을 주관하는 점성적인 의미로 나름의 우주론을 구축해 나간 셈이다. 후한이 망하고 육조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활동은 탄력을 받았다. 불교가 유입되어 도교와 서로 습합되면서 국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우주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 그 합작품이 바로 칠성신앙이다. 이와 더불어 중국 천문학은 개인의 수행과 구복이라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울었다.
北斗七星의 일곱 별 각각은 天地 宇宙의 構成 原理이다. 모든 존재들은 다 그 별들과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태어난다. 이때 일곱별의 기운을 고루 받은 존재는 그렇지 않은 존재보다 생의 지복을 훨씬 잘 누린다. 나는 그 중 어느 별의 기운을 타고 났는가? 지금 이 시대는 어떤 별의 영향 하에 굴러가는가? 이런 식으로 북두칠성의 해석은 점성학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보이시는지. 북두칠성이다. 그런데 저기 여섯 번째에 빛나는 저 별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걸 보는 능력을 시험의 과목으로 집어넣었다니. 참 사람들 하고는^^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을 표(杓)라 하고 머리 부분을 괴(魁)라 한다. 그중 괴의 첫 머리에 있는 별이 1성이 되고 자루 끝에 있는 별이 7성이 된다.
1성부터 순서대로 天樞星-天璇星-天璣성-天權星-玉衡星-開陽星-搖光星으로 불린다.
각각의 별들은 그 이름에 맞는 점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2지지에 배속되어 그 년에 태어난 사람들의 運을 주관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중 제 6성인 開陽星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한다. 이 별은 ‘북두칠성은 일곱이 아니다’라는 당혹스런 주장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의 수 7 이 얼마나 중요한 상징인지 이제껏 그토록 힘주어 주장했는데, 일곱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되냔 말이다.
고대 로마에서 군인을 뽑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장교 지망생의 시험 과목중 하나가 별 보기였다. 그들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향해서 물었다. ‘저게 몇 개로 보이니?’ 놀랍게도 일곱이라 말하면 탈락이고, 여덟이라고 말해야 합격이었다. 대체 이 무슨 일인가? 그들의 말이 맞다. 육안으로 관찰되는 북두칠성의 별은 일곱이 아니라 여덟이란다. 제 6성인 개양성, 서양에서 미자르(Mizar)라 불렀던 이 별은 단일한 별이 아니라 이중성이다. 눈 좋은 사람에겐 그와 나란히 늘어선 보성(輔星), 서양식 이름으로는 알코르(Alcor)가 보인다.
북두칠성을 북두팔성이라 개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도가들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북두칠성이 아예 아홉 개라고 주장하기 이르렀다. 보성 옆에 필성(弼星)이라는 또 하나의 별이 있다! 이 황당한 주장을 점검하기 위해 북두칠성으로 정밀한 천체 망원경을 향해보면 진짜로 개양성과 나란히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별이 관측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밀 분광기를 동원해서야 관측되는 사실, 아무리 도를 닦은 도가 수행자라 해도 맨눈으로 이 별을 분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근거로 북두칠성이 아홉이라는 북두구진 체계를 만들어 냈을까?
비결은 염력도 투시력도 아닌 고도의 상수학이다. 바로 도가들에게는 7보다 9라는 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7은 음양오행의 담지자이자 완전한 공간을 표상하는 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아직 그 자체로 완전한 수는 아니다. 동양에서 完全數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9라는 수이다. 9라는 수는 이보다 더 큰 수가 없다는 완전수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 불교사상의 영향이 가세하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는 억겁의 시간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불교의 윤회 사상의 영향으로 확장된 시간적 스케일은 3차원의 벡터 7에 선후(先後)라는 시간적 의미를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숫자 9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시공간의 벡터다. 결국 우주의 중심축으로서 일곱이 아닌 아홉 개의 별이 요구되었던 것이고, 이에 두 별을 추가해 북두구진(北斗九辰)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가들은 북두칠성을 일곱 현자와 두 명의 은자가 주관하는 칠현이은(七賢二隱)의 별이라 상상했다. 보이지 않는 두 별의 가세가 있어야 만이 완벽한 우주질서를 표상하는 별이 된다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작용하는 그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할 때 비로소 우주 질서를 올바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내재된 생명 원리를 이해하고 거기 부합하는 삶을 살려 했던 도가다운 생각이었다.
자네 오늘부터라도 생명원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보는 게 어떤가?^^
어쨌거나 여기서도 北斗七星은 宇宙 秩序의 주재자였다. 사시사철 지지 않고 밤하늘을 밝히는 週極星으로서의 지위는 이 별에게 “永遠”의 타이틀을 부여했다. 억겁의 세월을 거듭 하며 북두칠성은 저 하늘 위를 밝혀왔을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무상한 생사의 모래바람에 쓸려가지 않을 眞理 혹은 秩序를 발견하려 했다. 북두칠성의 답은 ‘거듭되는 循環’이었다. 季節마다 자리를 달리하며 우리에게 四時의 秩序를 알려주던 별자리, 이 사계절의 흐름과 더불어 동서남북의 方位를 알려주던 별자리, 매 시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밤하늘의 시계바늘 역할을 하던 별자리, 북두칠성은 시계바늘이자, 달력이자, 나침반이었다. 거듭되는 循環의 週期 속에 宇宙의 時空間을 담아내고 있었다. 영원의 별로 자리매김한 宇宙의 시계바늘, 北斗七星. 나에게 이 별은 어떤 의미일까? 북두칠성은 지금도 하늘 어딘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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