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그대는 조연인가 주연인가 ?

장백산-1 2012. 11. 14. 10:58

 

 

 

 

  당신은 助演인가 主演인가    

                                   
장마철에 별고들 없는지,
해마다 치르는 季節的인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새롭게 여겨지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겪는 현재의 삶이 그만큼 現實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울물이 줄어들 만하면 다시 비가 내려 그 자리를 채워주고,
넘치게 되면 날이 들어 스스로 調節한다.
이것이 自然의 리듬이고 秩序인 듯싶다.

이와 같은 리듬과 秩序는 우리들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모자라면 채우기 위해 氣를 쓰며 뛰게 되고,
가득 차면 넘쳐서 自身의 그릇만큼만 지니게 된다.
그 以上의 것은 過慾이며 남의 몫인 줄 알아야 한다.
山中에서 혼자 오래 살다 보면 聽覺이 아주 예민해진다.
바람소리나 개울물 소리 새소리만이 아니라,
숲속으로 지나가는 짐승의 발자국 소리며 벌이 붕붕거리는 소리,
곤충이 창호에 부딪치거나 기어다니는 소리,
꽃이 피어나는 소리,
한밤에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의 날갯짓 소리까지도 낱낱이 잡힌다.

自神을 에워싼 外部世界를 먼저 聽覺을 通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다가 날카롭거나 귀에 선 소리에는 動物的인 防禦 本能이 發動한다.
山에서 神經을 곤두세우게 하는 가장 역겨운 소리는
마을에서 주인을 따라 올라온 개가 짖을 때,
경운기가 딸딸거리며 고갯길을 올라올 때.
그리고 전투기가 느닷없이 찢어지는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을 할 때 등이다.

요즘 이곳 산골에서는 감자꽃가 싸리꽃이 한창이다.
감자꽃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고장에 와 살면서 그 아름다움을 비로소 알았다.
남녘에서도 감자꽃을 본 적은 있지만 스치고 지나쳤다.
大單位로 耕作하는 이 고장에서 드넓은 밭에
가득 감자꽃이 피어나면 아주 볼 만하다.
연한 보랏빛에 노란 꽃술을 머금고 있는
그 올망졸망한 꽃도 귀엽지만 은은한 꽃香氣도 여느 꽃에 못지않다.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드넓은 감자밭이 있는데,
나는 요즘 밭머리에 서서 한참씩 귀여운그 꽃에
눈을 씻고 그 香氣로 숨길을 맑히곤 한다.
감자를 먹을거리로만 여겼는데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서는 고마운 農作物이라는 生覺이 들었다.

유리컵에 한 송이 꽂아 식탁 위에 두고
끼니 때면 마주하는 잔잔한 즐거움이 있다.
"호박꽃도 꽃이냐?"라는 말이 있는데,
어째서 호박꽃은 꽃이 아니란 말인가.
얼마 전에 길을 가다가 한 밭 그득히
호박꽃이 피어 있는 걸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이슬을 머금은 진초록 잎에 노란 꽃이 환하게 피어
호박꽃은 우리 시골에 어울리는 淳朴한 꽃임을 실감했다.
해질녘에 피는 박꽃의 가녀림에 비해 호박꽃은 아주 健康한 꽃이다.
둘 다 겸손한 꽃이라서 눈부신 햇볕 아래서는
그 아름다움을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그러니 호박꽃을 제대로 보려면 이슬이 걷히기 前에 보아야 한다.
우리는 굳어진 固定觀念 때문에 旣往에 알려진 것만을 받아들일 뿐
새로운 世界에 대한 經驗과 認識이 不足하다.
固定觀念의 틀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生命의 神秘가 바로 우리 곁에 수없이 깔려 있다.

싸리꽃만 하더라도 산골 어디를 가나
地天으로 피어 있어 지나치기 일쑤인데,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펴보면 紅紫色을 띠어
좀 쓸쓸하게 보이는 꽃에 가을의 입김이 배어 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 때 그 가지에 달렸을 꽃을 生覺한다면
뜰에 싸리꽃 香氣가 번지지 않을까 싶다.

冊은 그 읽는 時期와 場所에 따라 感興이 아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冊을 對하는 마음가짐이 뭣보다도 重要하다.  
소로우는 그의 <월든>에서 말한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讀書는
우리의 知的 能力을 잠재우는 讀書이며
따라서 참다운 讀書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讀書,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時間들을
바치는讀書만이 眞正한 讀書다."

不一庵에서 몇 장 들추어보다가 시들하게 여겨져
그만둔 冊을 이곳 오두막에서
다시 펼쳐보고 커다란 感動을 받는 일이 더러있다.  
나카무라 고지의 <淸貧의 思想>에서 그 청빈한 삶을 극구 찬양한
양관 화상良寬和尙(1758~1831)이 있는데,
그 스님이 써 놓은 시가詩歌를 中心으로 엮은 一話集으로
<양관이야기 良寬物語>가 있다.

그가 한 山中의 보잘것없는 초암草庵인 오홉암五合庵에서 지낼때다.
오홉암이란 하루 다섯 홉씩 한 사람이 겨우 살아갈 만한 食糧을
本寺에서 대준 데서 온 이름이다.
그러나 양관이 이곳에서 지낼  때는
그 다섯 홉의 食糧마저 供給이 끊겨
손수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해다가 근근이 延命을 해야만 했다.

이런 가난한 암자에 하루는 도둑이 들었다.
낮에는 깔고 앉아 좌禪을 하고 이불이 없어 밤에는 덮고 자는데,
도둑은 그 방석을 훔쳐 가려고 했다.
스님은 도둑인 줄 알면서도 그가 놀랄까봐 모로 돌아누워
그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다.
이와 같은 事實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나온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불짐을 메고 스님을 찾아온다.
사나이는 몇 해 前 가난한 암자에서 방석을 훔쳐 간 도둑이
바로 自身이라고 하면서 容恕를 빈다.

그때 그는 스님이 일부러자는 척하면서
방석을 손쉽게 가져가도록 한 事實을 알고
더욱 가책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분이 어떤 스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불 대신 몸에 두른 방석을 훔쳐 온
自身을 두고두고 自責하면서 몇 해를 두고 벼르다가
아내와 의논하고 이불을 한 채 만들어 왔단다.
그의 淸貧과 너그러움이 말없는 가운데 도둑을 감화시킨 것이다.


慾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求하는 바 있으면 萬事가 窮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

양관의 詩다.
修行이란 말은 곧 世俗的인 欲望이 없는 狀態를 가리킨다.
그리고 欲望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瞬間에 사는 것을 뜻한다.
修行者는 部分的이 아니라 全切的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는 完全히 그것에 沒入한다.
아무것도 그의 뒤에 남겨 두지 않는다.
그는 결코 分離되지 않는다.
먹고 있을 때는 먹는 行爲 그 自體가 된다.
일을 할 때도 또한 일 그 自體가 된다.
따라서 그는 精神的으로는 누구보다도 豊饒롭게 살며,
그의 삶은 活力의 源泉이기도 하다.

양관은 32세 때 스승에게서 깨달음의 認定을 받은 後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퇴락한 빈 암자만을 골라 가면서,
그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한낱 가난한 탁발승으로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삶의 方式은 73年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變함이 없었다.
그가 원통사라는 절에서 스승을 모시고 수행중일 때
그 절에서 30년을 두고 묵묵히 일만 하는 한 스님을 보고 큰 感化를 받는다. 
그는 다른 스님들처럼 參禪도 하지 않고
經典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밥짓는 일과 밭일만을 할 뿐이다.
묻는 말에나 마지못해 對答을 하는 그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自身이 가꾼 채소로 맛있는 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大衆이 禪室에 들어가 參禪할 때
그는 혼자서 넓은 食堂과 廚房을 깨끗이 쓸고 닦는다.
남들이 싫어하는 변소 淸消도 자신이 맡아서 한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면 밭가에서건 供養간에서건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 뿐
결코 허리를 바닥에 대고 눕는일이 없었다.

바보처럼 여기던 양관도 뒷날
그가 眞情한 修行者였음을 알아 차리고 그의 德을 기린다.
양관의 意識 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늘 어른거렸을 법하다.
한 사람의 人間 形成에는  이렇듯 이름 없는 助演者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助演者는 主演者의 삶을 通해서 거듭 꽃피어난다.
 
당신은 조연인가 주연인가.   1993

 

                                         -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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