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참선의 요체 [2] 청회스님

장백산-1 2013. 1. 1. 23:42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2]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2]


제가 말씀 드릴 것이 한 시간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장황한 철학적인 깊이까지 얘기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와 같이 마음을 관찰(觀察)하는 법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이루어진 것이 오종칠파(五宗七派)라.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浍仰宗), 그런 종파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종파도 사실은 뚜렷이 그렇게까지 절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그래도 역시 조사(祖師) 스님들의 경향 따라서, 개성(個性) 따라서 또는 부처님 법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뒤에 송(宋)나라 때 참선(參禪)의 형태가 3가지로 區分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문제(問題)를 문제시 해가지고서 問題意識을 가지고서 그것을 우리가 의심(疑心)을 가짐으로써 우리 工夫를 해나갑니다.

이른바 이것이 화두(話頭)법 아닙니까.

화두(話頭)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어느 스님 네가 깨달은 도인(道人)들한테 무어라고

법(法)을 문법(問法)할 때에 깨달은 道人들이 그때그때 간명한 해답(解答)을 내립니다.

解答을 내리나 그 분들이 아 그대가 이 문제 가지고 疑心만 해라,

그런 말은 또 안했습니다. 안한 것인데 그 후인들이....

도인(道人)들이 그때그때 하신 말씀은 때 묻지 않은 말씀입니다.

상(相)이 없는 말입니다.

운문대사가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란 무엇인가?'

그 말 따라서 '똥 마른 막대기다!'

이런 말도 우리가 生覺할 때는 똥이 더럽고 막대기는 하찮은 막대기이고

그렇게 개념(槪念)으로 生覺할 때는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운문대사의 말은 그런 槪念的인 뜻이 아니라

상(相)을 떠나버린 말이기 때문에 道人들의 말은 어떻게 말하나

‘똥 마른 막대기'라고 말하나 '다람쥐'라고 말하나 하나의 '흙덩이'라고 말하나

道人들의 말은 그것은 때 묻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상(相)에 걸리지 않은 말입니다. 

 

따라서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인 화두(話頭)도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때 묻지 않은 말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하면 격외도리(格外道理)라! 격(格) 밖의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恒時 격내(格內)에서 규격(規格) 따라서 말합니다만

성자(聖者)의 말은 전부(全部)를 보는 것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하니 시방세계(十方世界) 시전신(是全身)이라!

백척간두에서 다시 발을 내 디뎌서 우리가 깨달아 버렸다고 生覺할 때는

十方世界 是全身이라.

시방삼세(十方三世) 전체(全切)가 바로 '하나'의 몸입니다.

하나의 법신불(法身佛)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들은 그와 같이 전체(全切)를 보기 때문에

全切 가운데서 어느 部分을 잡아서 말하나, 모두가 全切 가운데서 全切하고 상통(相通)해서 말하기 때문에 바로 그 全切입니다.

하나가 즉 全切요, 全切가 즉 하나입니다.(一卽一切 多卽一) 

우리 중생들은 하나를 말하면 그것에 집착(執着)해서 말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이 항시 때 묻은 것이고, 유한(有限)상대(相對)의 말밖에는 안되지만

道人들은 相對가 없는 그런 자리에서 말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格 밖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라는 것은 '이뭣고?' 화두나 무슨 화두나

모두가 다 格 밖에 道理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話頭를 우리가 疑心을 하다보면 그때는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고,

또는 우리 자성(自性)이 원래(元來) 부처가 아니라고 그러면 부처가 되겠습니까 마는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본래(本來)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본래로 법신(法身) 부처이므로 마음만 모아지면,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고 저렇게 흩어지고 산란스럽기 때문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딱 모아지고 응집(凝集)되고 그렇게

해나가면 마음이 맑아 옵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흐린 것입니다. 흐린 탁수(濁水)와 똑 같습니다.

흐린 濁水는 雜스러운 것이 섞여 있으므로 흐립니다.

그러나 가만히 놓아두면 그때는 잡스러운 앙금은 가라앉고 물이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바닥이 보이겠지요. 그와 똑 같이 우리 마음도 번뇌(煩惱)라 하는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습니다.

 


진리(眞理)에서 본다면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인데,

무명심(無明心)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라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법계(法界)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 때는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生覺하면 그때는 마음이 산란(散亂)스러워 옵니다.

산란스러워 오면 우리가 眞理를 비추어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話頭가 되던 무엇이 되던 딱 모아지면 모아져 가만히 있으면 그때는 아! 濁水가 흐린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보이듯이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드디어 本來面木 자리고 부처이기 때문에 훤히 밝은 부처가 나온단 말입니다. 

간단 명료(明瞭)한 도리(道理)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모아져 차근차근 本來面目 자리로 갑니다.

 

 

그런 式도 있고, 또 한 가지는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가 비록 眞如佛性 자리는 아직 증명(證明)은 못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나 삽삼조사(救三祖師)가 모두 하신 말씀이 本來가 다 법신불(法身佛)이다. 本來가 부처라!

이렇게 말을 했거니 가장 正直하고 조금도 거짓이 없는 말씀을 하신 불조(佛祖)가 말씀 하셨으니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本來 부처라고 했으면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確實히 믿어 버리면 새삼스럽게 우리가 무슨 疑心 할 必要가 있겠는가.

부처인가 중생인가 무엇인가 우리가 헤아리는 것은 망상(妄想)인 것이고,

아! 佛祖가 다 말씀했으면 그 말이 事實이기 때문에 꼭 믿어야지 않겠는가.

이렇게 믿고서 잠자코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잠잘 묵(默)자, 비칠 조(照)자

묵조선(默照禪)입니다.

따라서 묵조선 계통은 지관타좌(只觀打坐)라,

오직 앉으란 말입니다. 오직 단정히 앉아라!

오직 단정히 앉고서 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면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몸 신(身)자, 마음 심(心)자. 자기 몸과 마음이 그때는 딱 빠져나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란 生覺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서 한 철 공부할 셈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무슨 공덕(功德)이 될 것인가?

맨 처음에는 굉장히 아프기도 하고 괴롭습니다.

참선을 많이 하신 운수납자(雲水衲子)는 다 경험하신 것 아닙니까.

 

맨 처음에 앉아 놓으면 이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 조복(調伏) 받느라고 큰 탈입니다.

 

조금 덜 먹으면 배가 고프고, 조금 더 먹어 놓으면 소화도 안 되고

배속에서 콜콜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 밑에서 적당히 먹고, 우리가 오랫동안 앉는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이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우리가 딱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에도,

종밀선사(宗密禪師) 도서(都序)에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라.

또 육조단경(六組檀經)도 본래 부처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믿어야 합니다.

本來 부처라는 소식을 믿고 우리가 나아가야 공부가 빠른 것이지

길을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목적지(目的地)를 분명히 알아야지

어디로 갈 것인가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좀 괴로우면 괴로움 때문에 중단하고,

그러나 목적지가 성불(成佛)이라 하는 분명하고 同時에 나한테도 부처가 本來 갖추어져

있다. 이렇게 믿는다고 生覺하면 설사 괴로움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별 문제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參禪)工夫는 事實은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헛것인 것이고,

만법(萬法)유식(唯識)이라! 일체(一切)가 유심(唯心)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모두가 다 마음 뿐 입니다.

육조단경(六組檀經)에서 육조 혜능(慧能)스님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요.

물질(物質)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소식을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物質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석과학(分析科學)이 發達 못될 때는

상당히 공부한 분들도 도인(道人)이 미처 못되어 가지고서, 道人이 되어버리면

物質이라는 것도 법성(法性)을 다 지녔으므로 그대로 다 100% 믿어버리겠습니다만

道人이 미처 못된 사람들은 物質은 物質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너는 너로 보입니다.

本來 無一物이라 이런 것도 道人들이 우리한테 物質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겠지,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分析科學,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같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나온 뒤로는 物理學도 本來無一物을 알고 있습니다.

分析하면 結局은 다 비어(空) 버립니다.

 

원소(元素)로 分析하고, 원자(原子)로 分析하고, 또 原子를 소립자(素粒子)로 分析하고

그런데 素粒子 그것도 物理學的인 考察로 해서 物質이 아니라

에너지(Energy)의 파동(波動)입니다.

따라서 現代 물리학은 모두가 다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증명(證明)한 것입니다. 古典 물리학은 미처 증명 못하고서 물질은 물질, 마음은 마음 이렇게 이원론(二元論)으로 보았으나 現代 물리학은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을 증명했습니다. 얼마나 이것이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따라서 現代 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로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를 증명해 오고 있습니다. 현대 학문(學問)은 실존철학(實存哲學)이고 무엇이고

모두가 다 부처님 法에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現代 실존철학도 제 아무리 연구해 봐도 아직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철학도 모르고 물리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반야사상(般若思想)을 믿고 알 때는 그 가운데에 가장 오묘(奧妙)한 철학(哲學),

가장 窮極的인 과학(科學)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야말로 이때라야 비로소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어쩌다가 나 같은 존재(存在)가 몇 千萬劫을 헤매다가

부처님 법(法)을 만났는가 하는,

우리가 스스로 행복(幸福)을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