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참선의 요체-3 [청화 스님]

장백산-1 2013. 1. 2. 01:22

 

 

참선의 요체 - 청화큰스님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3]


아무튼 선(禪) 가운데서

어느 문제(問題)를 의심(疑心)하는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또는 한 가지는 그와 같이 부처님 도리(道理)를 그대로 잠자코 관조(觀照)하는 묵조선(默照禪)이 있고,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이 단박에 성불(成佛)해 버리면 좋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애쓰고 배운 것이 모두가 다 가정에서 배운 것이나 유치원에서,

대학(大學)까지 배운 것이 모두가 다 있다, 없다 하는 상(相)이 있는 것만 배웁니다.

따라서 그런 것이 지금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꼭꼭 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지혜(智慧)를 좀 배웠다 하더라도, 부처님 智慧도 누가 確實히 말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므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그렇게만 生覺합니다.

마음은 마음이고 물질은 물질이고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만 生覺합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들고 工夫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단박에 훤히 트여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고 한 10년 동안 화두 의심하고 다녀도 별로 얻은 것이 없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묵조선(默照禪)도 역시 묵조해서 잠자코 비춰본다고 해도 자꾸만 앉아 놓으면 -

그런 저런 그 어릴 때부터 배운 것, 과거 전생에 우리가 소나 돼지나 개나 사람이나 천상(天上)이나 모두 그런데서 갔다 왔다 하다가 우리 潛在意識에 쌓아 놓은 그런 觀念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이 곁들어서 - 조금만 生覺이 쉬면 그냥 딴 世界가 나옵니다.

상시(常時)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을 때는 모르지만 방선(放禪)하면 밖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있는 것뿐이고,

 

또 우리 표면의식(表面意識)이 잠들면 그때도 역시 潛在意識에서 있다는 것만 나오고

이제 과거에 싸웠던 生覺, 누구하고 좋아했던 生覺, 그런 것만 나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단박에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래저래 부처님 가르침 보다는 딴 生覺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애써서 염불(念佛)이라 하는 그런 법(法)이 있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이라는 이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하나 뿐이 없으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하는 것 하나만 하면 될 것인데, 부처가 많이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그렇게 많은 이름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生覺한 사람들도 우리 불교(佛敎)인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 스님 네 가운데도 地藏菩薩을 하면 공(功)이 더 적고 또는

觀世音菩薩을 하면 功이 더 많고  또 그 反對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스러운 문제입니다.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계(限界)가 있다고 生覺할 때는 부처가 못 됩니다.

법신(法身) 부처가 못 됩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限도 끝도 없는 것이고, 공간적(空間的)으로 시간적(時間的)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부처님 境界이기 때문에 부처하면 하나의 부처 뿐 인 것이지

이래저래 많은 부처가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삼천 가지의 부처님 이름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무애광불(無碍光佛) 등등 삼천불(三千佛) 이름이 있는 그런 경(經)도 있습니다.

그러면 三千佛이 따로따로 있는 것인가? 이렇게 生覺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般若智慧로 비추어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부처입니다. 하나의 부처님인데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無量한 功德이 있기 때문에 우리 衆生들에게 부처님의 功德을 다 말을 하려면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全部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비(慈悲)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智慧)도 있는 것이고 원력(願力)도 있고 그렇게 限도 끝도 없는 功德이 있기 때문에

慈悲로운 쪽으로 우리가 얘기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지혜 있는 쪽으로 이야기 할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원력(願力) 분야에서 말할 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저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리는 의미에서 보면 약사여래(藥師如來),

이렇게 있는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잘 모르므로 중생의 生覺은 區分해서 있는 것만 生覺하고 分別 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잠시간 이름이 붙은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意味해서 있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그런 名號도 부처님의 자비(慈悲)가 觀世音菩薩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觀世音菩薩 상호(相好)를 우리가 自細히 보면

여기 머리의 정상(頂上)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습니다.

이것은 阿彌陀佛과 둘이 아닌 阿彌陀佛의 慈悲란 뜻입니다.

阿彌陀佛은 또 무슨 뜻인가.

阿彌陀佛은 우리가 소박하게 방편설(方便設)로 해서는

저 十萬億 불토(佛土) 밖에 있는 極樂世界의 敎主라고 生覺합니다. 그렇게 말씀한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같은 경전(經典) 내에도 방편(方便)을 떠난 진실(眞實)한 말씀도 있고, 또 眞實한 말씀을 方便으로 잠시간 말씀한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일차 방편으로 해서 쉽게 알아서 거기에 들어 갈 수는 있다 하더라도 종당(終當)에는 方便을 버리고 眞實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方便으로 말할 때는 저 十萬億 佛土 밖에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敎主)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極樂世界가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떠나서 어디 저 하늘 공중(空中)에 있다고는 말씀 아니 했습니다.

極樂世界가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至今 우리가 사는 世界도 거기에 다 包含 되어야 하겠지요.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몸은 어떠한가.

아미타불의 몸은 六十萬億 나유타(那由他) 유순(由旬)이란 말입니다.

六十萬億 이라는 수(數)는 한도 끝도 없는 수(數)입니다.

유순(由旬)이나 나유타(那由他)는 數十億 限도 끝도 없는 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몸이라는 것이 우리 사람 몸과 같이 局限的으로 空間的으로 이렇게

크고 작고하는 몸이 아니라 우주(宇宙)에 가득 차 있는 몸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宇宙가 바로 부처님 몸입니다.

 

부처님 불경(佛經)이라는 것은 文字 그대로만 알아버리면 엉뚱한 오류(誤謬)를 범합니다.

그러한 無量無邊한 뜻으로 새긴다면 모두가 다 진리(眞理)에 合當한 것입니다.

바로 우주(宇宙)가 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몸입니다.

그리고 阿彌陀佛이라는 것도 또 뜻으로 解析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 수명(壽命)이 끝도 갓도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永生)의 생명(生命)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부처라는 것은 結局은 生命이라는 말이므로,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은 바로 智慧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 智慧의 빛이 끝도 갓도 없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서 온 宇宙를 감싸고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보면

그 생명(生命)이 끝도 갓도 없다고 해서 무량수불(無量壽佛),

광명(光明)이 限없이 비추인다고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상대(相對)할 수 없다고 해서 무대광불(無對光佛),

또는 갓도 없다고 그래서 무변광불(無邊光佛)

또는 청정(淸淨)하다고 그래서 청정광불(淸淨光佛), 이렇게 모든 이름이 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나 조사(祖師)스님들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고구정녕(苦口煗娡)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하나의 것에만 집착(執着)해 가지고서 거기에

딱 국집(局執)해 버립니다. 그것은 왜 그러는 것인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로 볼 때는 가상(假相), 가명(假名)은 元來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가짜이므로 진짜로 본다면 있을 수가 없겠지요.

가짜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元來는 이름도 없습니다.

 

아! 저 같은 存在도 이제 過去에 청화(淸華)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未來에 있겠습니까.

이 몸뚱이가 이만큼 이렇게 나왔으므로 여기다가 임시(臨時)간 청화(淸華)라고 이름을 붙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몸뚱이 이것도 역시 각 세포(細胞)가 모여서 진동(振動)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그것은 그대로 恒時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瞬間瞬間 변(變)하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10년이 지나면 이제 주름살만 더 늘어나기 때문에 변화(變化)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우선 瞬間瞬間 사람들이 봐서는 잘 모릅니다.

分明히 瞬間瞬間 變하는 것이며, 어느 한 瞬間도 같은 모습이 지금 없습니다.

어느 순간(瞬間)도 같은 모습이 없다고 生覺할 때는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순간(瞬間)도 어느 공간(空間)을 占有하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어느 瞬間도 어느 空間에 없다고 生覺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物理學的)인 도리(道理) 아닙니까.

따라서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 그대로 바로 공(空)이라,

 

분석(分析)한 뒤에 空이 아니라 바른 눈으로 보면

宇宙의 정기(精氣)인 불성(佛性)의 次元에서 보면 이대로 바로 공(空)입니다.

이대로 공(空)이라고 生覺해야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般若心經 가지고도 充分히 깨닫는 것입니다.

나도 空, 너도 空, 色도 空, 소리도 空, 또는 맛도 空, 모두가 空입니다.

이것들이 原來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병(病)이 發生하여 아프다는 것도 本來는 공(空)입니다.

우리 육감(六感)이 바로 못 보아서 아프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 六感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바로 본다면 내 몸뚱이가 없거니

세포(細胞)도 원래 공(空)하거니 아픔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르나 다 限도 끝도 없는 그런 실상(實相) 그 자리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해서 조금 못하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없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해서,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좋고 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해서 더 낮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보살(菩薩) 지위(地位)라는 것은

우리가 이(理)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따라서 地藏菩薩을 좋아서 외운다 하더라도 다른 부처나 보살하고 圓融無碍하게

둘이 아니고 圓滿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圓滿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자리,

우리 중생이 부처님의 그런 功德 가운데서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引導하는 그 자리, 또는 우리 地球의 이 大流圈 속에 갖추고 있는 부처님 功德, 이것을 보고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는 것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名號를 우선 그와 같이 絶對로 區分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 하더라도 다른 것도 거기에 다 들어 있고,

어떤 것이나 모두가 벌써 菩薩, 부처 자리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圓融無碍라,

일즉다(一卽多)라, 하나 가운데 다(多) 一切가 들어 있고(一內有一切),

다즉일(多卽一)  다(多)一切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一切外包一)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4]


보살, 부처 자리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 자리도 역시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인데 우리가 미처 못 느낀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의 生命 가운데 내가 없으면 관세음보살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그럽게 미워하는 독사 한 마리라도 그 속에 없으면 관세음보살이 못됩니다.

宇宙에 存在하는 어느 것도 티끌 하나라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그 보살 부처 가운데 包含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 가운데도 宇宙 全切가 다 들어 있고 또는

個別的인 모든 것들 가운데도 宇宙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지 않습니까. 화엄경(華嚴經)까지는 아직 못 배웠다 하더라도

法性偈 道理는 華嚴經의 大要를 말한 것입니다.

法性偈 道理는 일중일체(一中一切)라, 하나 가운데 一切가 다 들어 있습니다.

一切 가운데도 하나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이런 道理를 알아야 비로소 반야(般若)의 道理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공(空)이거니, 모두가 다 本來가 空이거니,

하나 가운데 全切가 안 들어 있고 全切 가운데 하나가 안 들겠습니까.

다 空이라는 소식만 안다고 生覺할 때는 그런 道理가 다 通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가 全切요, 全切가 하나요.

 

物質이라고 生覺할 때 하나 가운데 全切가 다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나, 物質이 아니라고 生覺할 때는 겨자씨 가운데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들어가는 것이고 또는 한 덩이의 흙더미 가운데도 宇宙가 다 들어갑니다.

이렇게 物質은 눈곱만큼도 없고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말씀대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物質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本來 아무 것도 없거니 우리가 좋다, 궂다 나쁘다, 그르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를 느끼고서 그런 자리에서 스승을 生覺하고, 제자를 生覺하고, 아들을 生覺하고, 자기 재산(財産)을 生覺하고, 지위(地位)를 生覺해야 그래야 우리가 그르치지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딸을 사랑하고 해야

自己 아들 딸 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금방 깨달아 버리면 오랫동안 苦生할 것도 없고 우리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할 必要가 없지만 우리 마음이 그렇게 깨닫지를 못합니다.

나쁜 버릇 때문에,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화두(話頭)라는 그런 問題를

들고서 우리가 이제 때 묻지 않은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오랫동안 의단(疑團)도 하는

것이고 참구(參究)도 하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를 들고서

生覺 生覺에 하마 그런 나쁜 習慣性이 나올세라 우리가 工夫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염염상속(念念相續)이라,

生覺生覺에 우리가 工夫하는 때 묻지 않은 그런 生覺을 하여 나아가야,

우리의 그런 때 묻어 버린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잠재의식(潛在意識)같은 것이 차근차근

힘을 못 쓰고 이제 줄어져 갑니다. 本來 그런 潛在意識같은 것은 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結局 바른 生覺만 하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림자가 있다 하더라도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우리 번뇌 망상(煩惱妄想)은 그와 똑 같습니다. 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存在가 아닌 그런 그림자만 두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그림자에 속지 않고서 그림자의 노예(奴隸)만 안 되고서 정말로 바른 生覺만 쌓아 나간다고 하면

그런 것은 흐트러지고 맙니다. 그런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습관(習慣)을 붙여 놓아서 갑자기 안 나가므로 우리가 바른 生覺을 하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 그 問題는 여러 가지 것이 많이 있으나 육조단경(六組檀經)에서 한 가지 규범(規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시삼마(是甚徼) 선(禪)이라!

한문(漢文)을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시심마'라.

이 시(是)자, 심할 심(甚)자, 어찌 심(甚)이라고도 합니다. 어찌 마(徼)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심할 甚자를 중국식 발음을 하면 '삼'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같은 뜻이지만 중국식 발음을 할 때는 시삼마, 우리식 발음은 시심마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六祖壇經식으로 말하면

'나한테 한 物件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도 더 밝고

- 우리 중생들의 생각에는 해와 달보다 더 밝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

검기는 칠(漆)보다 더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恒時 조금도

나와 떨어짐이 없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내가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生覺할 때는 우리가 그것은 내내야 불성(佛性)이 아닌가. 그냥 짐작이 되시겠지요.

 

따라서 따지고 보면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법계(法界)가 무엇인가란 말입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그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시심마'라는 것과 똑 같은 뜻입니다.

나한테 한 物件이 있는데 그것은 해와 달보다 더 밝고 또 검기는 칠 보다 더 검고,

그러므로 제일 밝고 제일 검고 하므로 모든 것이 無限한 可能性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있다는 말은 천지(天地)를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天地를 두루해 있는 그것이 나와 恒時 같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성(佛性)이 아니고 따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佛性 道理를 그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佛性입니다'

그래버리면 간단히 끝나겠지요.

 

그러나 그건 佛性 道理를 우리 중생들이 보고 體驗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성(習慣性)이 다 나가버려야, 習慣性이 다 걷혀버려야 佛性을 우리가 증명(證明)할 수가 있는 것이지 習慣性이 남아 있을 때는, 쉬운 말로 약해서 말하면 습기(習氣) 아닙니까.

갖추어 말하면 習慣性이고, 習氣가 녹아지기 前에는 우리가 이치(理致)로만 알 뿐이지

증명(證明)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證明해서 알아야만 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이 無限의 功德인데

그 無限의 功德을 自己도 좀 맛보고 좀 쓸 수가 있는 것이지 그냥 理致로 해서는 내내야

무어 밥 좀 덜 먹으면 배고프고, 또 욕계(欲界)에 있어 놓으면 이성적(理性的)인 慾心

이것저것 다 못 떠나고 그럽니다.

습기(習氣)가 빠져버려야 욕심(慾心)도 빠지고 진심(瞋心)도 빠지고 다 빠져 버립니다.

불성(佛性) 가운데는 세간적(世間的)인 慾心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이 미처 證明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는 알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내야 '불성이 무엇인가?'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宇宙에 충만(充滿)해 있고 바로 宇宙가 佛性이다.

이런 道理야 불교 初步인도 대부분 알 것이지만 증명(證明)은 못 해 있습니다.

證明을 못 한다고 生覺할 때는 괴로운 것은 괴롭고 남이 自己를 좀 구박(驅迫)하거나 自己를 비방(誹謗)하면 성을 내곤 합니다. 죽을 때는 자기(自己) 몸뚱이 아까워서 죽기 싫고 말입니다. 이래 버리면 結局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고통(苦痛) 가운데 가장 至毒한 苦痛이 죽음에 대한 苦痛 아닙니까.

불교(佛敎)라는 것은 죽음을, 생사해탈을,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위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불법인데 우리가 그냥 이치(理致)로만 알아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증명(證明)을 하기 위해서 그 佛性 道理와 自己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추스리는, 마음을 統一시키는 方法이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고 話頭를 참구하는 것이고 또는 참선(參禪)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話頭)를 들고 어느 문제(問題)를 '이뭣고?'라든가, 또는 조주(趙州) 스님께서 말씀하시 무(無)자라든가, 보조국사(普照國師)나 그런 어른들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제일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화두문중(話頭門中)에서는 무문관(無門關),

즉 제일 먼저 無字話頭를 말씀했습니다.

 

無字話頭는 어떤 것인가 하면은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 조주 스님은 당나라 때의 위대한 대선사(大禪師)입니다. -

'개에도 佛性이 있습니까?'.

부처님 경전에 개나 소나 사람이나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性品), 부처가 되는 性品이 있다고 말했으므로

어렴풋이 그 분도 믿었겠지요.

 믿었으나 自己가 보지 아니 했으므로 確實히는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개 같은 막나니 짓도 많이 하고 판단도 못하고 자기 먹을 것만 좋아하는

그런 중생이 무슨 놈의 불성이 있을 것인가?

 

 

佛性이라는 것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인데 그런 개 따위에 무슨 佛性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疑心을 품어가지고 이제 조주스님한테 가서 '개도 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때 조주스님 말씀은

 '무(無)'라. '없다'.

어째서 없다고 했겠습니까? 한 번 生覺해 보십시오.

개한테는 佛性이 개 안에만 있고 밖에는 없다고 보겠습니까.

또는 그 佛性이 개 머리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가슴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佛性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佛性이 있다고 生覺할 때는

그 佛性이 우리 발에가 있습니까? 머리에가 있습니까?

 

그 佛性이라는 것은 바로 宇宙의 성품(性品)인데 우주(宇宙)의 법계성품(法界性品) 이것이 佛性인데, 법계성(法界性)이나 불성(佛性)이나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宇宙의 본성(本性), 宇宙의 정기(精氣)입니다.

그런 것이 佛性인데 佛性이 개 안에가 있고 밖에가 있고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로 본다고 生覺할 때는 부처님 말씀으로 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性品이 있다. 이러해서 잘 몰라서 잘 못보고 안에가 있는가? 밖에가 있는가? 그렇게 의심이 나서 그렇게 물었지만 적어도 理致라도 안다고 生覺할 때는 밖에가 있고 안에가 있고 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도처(到處)에 개 몸 全切에 개 몸 全切가 佛性 덩어리고 또는 밖에도 역시 佛性 덩어리고 또는 우리가 現在 이와 같이 있는 우리 분위기(雰圍氣) 내에도 結局은 佛性 덩어리 뿐 입니다.

 

 

이런 道理를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물리학적(物理學的)으로 맡겨버려야,

물리학은 실험(實驗)을 통한 것이므로 事實로 믿겠지요.

물리학적으로 믿어버리면 확신(確信)이 더 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분위기 가운데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각

원소(元素)가 있다는 것은 시인 하겠지요. 산소나 수소나 질소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분위기가 못됩니다. 저 진공(眞空) 상태까지 올라가 버리면 모를까,

또 이 대기권(大氣圈) 내에는 희박(稀薄)하고 농(濃)하고의 差異는 있다 하더라도

산소, 수소, 탄소, 질소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混合 내지 結合되어 있습니다. 

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산소나 수소 그런 것은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들이 적당히 結合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은 電子나 陽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소립자(素粒子)라 하는 알갱이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素粒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에너지」라는 이것은 물질(物質)이 아닌 것입니다.

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따라서 現代 물리학은 宇宙를 構成하는 장(場)에너지가 

卽 宇宙에는 마당 장(場)자, 장(場)에너지가 충만(充滿)해 있다고 봅니다.

場 에너지 속에는 그야말로 전자기장(電磁氣場) 에너지가 거기에 가득히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生覺할 때에 우리가 電子나 陽子나 그것도 역시 에너지라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같은 -- 그야말로 物質인가 아닌가 모르는 가장 微細한

것이 중성미자(中性微子)라는 것인데, 中性微子(뉴트리노)는 공간성(空間性)이 없습니다. 空間性이 없으므로 物質이라 할 수도 없겠지요.- -

그런 것들이 이렇게 쌓이고 저렇게 모이고 해서 電子가 되고 陽子가 되고

또는 電子, 陽性子가 모여서 酸素가 되고 했습니다.

酸素나 水素나 그런 元素가 적당히 結合하여 분자(分子)가 되어서

이렇게 우리 세포(細胞)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에너지 차원(次元)에서 보면 내내야 우리 몸뚱이도

에너지의 형상화(形象化) 에너지의 상(相)에 불과하고

나무나 흙이나 다이아몬드나 모두 다 하나의 에너지의 相에 불과합니다.

상(相)을 떠나서 볼 때는 무엇인가? 相을 떠나 버리면 에너지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한 번 돌이켜 봅시다. 색즉공(色卽空)이요, 공즉색(空卽色)입니다.

色은 바로 物質 아닙니까. 物質 바로 空이요, 내 몸 바로 空입니다.

허나 인연(因緣)이 익어져서 이루어져서 因緣이 모아지면 그때는 역시 상(相)을 낸단 말입니다. 相을 나투므로 그때는 空卽色입니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