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生覺하는대로 살아진다
道를 올리는 일은 自己 삶을 完成하는 修行이자
家族과 이웃, 世上의 幸福을 發願하는 福된 일입니다.
大部分의 佛子들은 꾸준히 절을 찾아 기도와 수행을 이어가지만,
간혹 신도님들 중에 바쁘거나 일이 있으면 안 나오는 등
들쭉날쭉 하는 분들이 계세요.
조금 바빠도, 피곤해도, 일이 있어도 祈禱法會 時間만큼은 지키는게 좋습니다.
工夫하려는 마음을 냈다가 한 두 번 게으름을 피우면
다음에 미안해서 안 나가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하기 싫어지고,
이런 식으로 수행이 흐지부지 되기 때문이에요.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시간이 부족해서 초하루,
지장재일, 관음재일 등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佛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한 달 중 특정한 날을 정해
그 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겠다고 發願을 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관음재일만큼은 빠지지 않겠다',
'지장재일만큼은 꼭 참석하겠다'
하는 願力을 세우고 實踐하라는 거예요.
원력을 세우고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야 마음에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흔히 修行은 '管理' 라고 말합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卽 신구의(身口意) 三業을 잘 관리하는 것이
修行의 基本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이면,
時間을 잘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수행도 時間을 管理하지 못하면
절대 이뤄지지 않기때문이에요.
그리고 總體的으로 因緣을 잘 管理해야 합니다.
因緣이 잘 엮어져야 삶이 便安하고 修行에도 成就가 있어요.
結局 時間과 因緣을 잘 管理하는 것이 修行의 核心입니다.
특별하게 3000 배를 하고 용맹정진을 몇 번씩 하는 것,
이것만이 수행을 잘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철야정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철야정진을 하고 나면
3~4 일 정도 리듬이 깨져서 후유증이 오래가기 때문이에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회복이 더딥니다.
그래서 저는 말뚝신심으로 철야정진을 하는 건 젊은 불자들에게 권장하고,
나이가 있는 불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해 수행을 이어가는데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씀드려요.
수행하다 11시 30분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 30분쯤 일어나 다시 수행하는 식으로 정진하라고 일러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꾸준한 修行을 通해 마음의 平常心을 지속시키는 일이에요.
절집에서는
'참회하라' , '발원하라' , '기도하라' 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말의 核心은 마음을 내려놓는데 있어요.
그런데 놓으라고 해서 모든 걸 깡그리 다 놓아버리면 안 됩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란 잘못된 生覺을 놓아 妄想이 없는 狀態에 든 것이지, 좋은 生覺마저 모조리 비워버리라는 뜻은 아니에요.
참선할 때도 모든 雜念을 버리지만
오직 하나, 話頭만큼은 끝까지 붙들지 않습니까?
그렇듯 하나의 올바른 生覺을 놓지 않고 참구하는 것이 삼매(三昧)이지,
아무 生覺 없이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을 三昧라고 말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삶의 모든 것이 決定됩니다.
저는 우스갯 소리로 우리가 태어날 때 精神없이 태어나는 것은
죽을 때 精神없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요.
이 말은 '늘 깨어있으라' 는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깨어있다는 것은 올바른 生覺을 가지고 있는 것을 意味합니다.
말하자면 죽기 前에 바른 生覺을 가지고 죽으면,
다음 世上에 태어날 때
올곧은 生覺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現在의 一念이 가장 重要합니다.
<成功의 法則> 의 저자 맥스웰 몰츠는 이런 말을 했어요.
"人間의 뇌는 미사일의 誘導 裝置와 같아서
自身의 目標를 定해주면 그 目標를 向해 自動으로 誘導해 나간다."
어떤 生覺을 머릿속에 품고 있으면 그 生覺대로 삶이 展開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人間은 生覺하는 대로 산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精神없이 살면 精神없이 살아지는 겁니다.
살아지는 것이지 主體的으로 사는 것이 아니예요.
올곧은 生覺을 지켜내고 잘못된 慾心, 執着, 煩悶을 비워내는 게 重要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祈禱는 '뭐 해주세요' 하며 바라는 게 아니라, 求하고 채우는 것입니다.
바른 生覺, 願力, 信心, 智慧를 求하고 채우는 作業이에요.
反面에 懺禪은 잘못된 生覺을 버리고 비우는 作業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나의 生覺을 유지해 나가는 게 看話禪의 基本이에요.
바른 生覺과 願力을 잘 지키려면 나머지 것들은 덜어내고 비워야 합니다.
특히 모든 病과 괴로움의 原因이 되는 執着을 버릴 수 있어야 해요.
일전에 法頂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世上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길 바라지만
이 世上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를 주거나, 버리거나, 양보하거나, 비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消極的인 삶이 아니라 智慧로운 삶의 選擇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空間이나 餘白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空間과 餘白이 本質과 實相을 떠받쳐주고 있다."
채움의 前提條件이 비우기라는 말씀이지요.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分別, 妄想, 是非, 등을 비워야
새로운 깨우침이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재밌는 건 누군가 있어
우리 안에 온갖 미혹과 삿됨을 채워놓는 것이 아니라는 事實입니다.
내가 나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여러분을 不便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 어떤 하나를 집어놓고,
그것에 엮여서 스스로 不便해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늘 이런 얘기를 합니다.
"固定된 觀念을 버려라."
만약 내 안에 조금이라도 固定觀念이 있다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데
그 固定觀念의 잣대를 使用할 수 밖에 없어요.
진짜 佛子는 부처님이라는 固定된 틀마저도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한 분만 부처님으로 보면 다른 분들을 부처님으로 볼 수 없어요.
부처님과 불교라는 틀에서야 自由로워야 모두를 부처님으로 볼 수 있고,
그런 눈으로 世上을 볼 줄 알아야 진짜 佛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조 달마 대사부터 혜가, 승찬, 도신, 홍인,에 이르기까지
선종의 역대 조사들의 법문은 한결같이 '안심법문(安心法門)' 입니다.
너 스스로 自由로운 存在이니
執着만 버린다면 卽時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맛볼 것이라는 내용이에요.
같은 뜻을 담은 남악 회양 스님과 석두 희천 스님의
재밌는 일화가 하나 전해 옵니다.
두 스님은 육조 혜능 스님 이후 최고로 잘 나가는 선지식들이었는데,
동시대를 살아가며 중국에 불법을 펴나갔어요.
두 스님은 서로의 그릇을 잘 알기에 서로 尊敬하고,
또 시자들을 통해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 회양 스님이 석두 희천 스님에게 시자를 보냈어요.
시자가 석두 희천 스님께 말하길
"스님, 저희 스님이 여쭤보라고 해서 왔습니다."라며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석두 희천 스님이
"누가 그대를 束縛했는가?"
라고 되물었다고 해요.
이에 다시 시자가
"어떤 것이 淨土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누가 그대를 더럽혔는가?"
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시자가
"어떤 것이 涅槃입니까?"
라고 묻자, 스님께서
"누가 너에게 生死를 주었느냐?"
라고 답했어요.
얼마나 시원합니까?
아무도 너를 束縛하거나 不便하게 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 그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共感이 가시죠?
다들 집에 가서 그러잖습니까?
남편, 자식과의 관계에서 괜히 조그마한 것 하나 마음에 담아두고
서로 不便해하며 말도 못하고 삐죽삐죽 하고 있잖아요.
선가에서는 숲도, 물도, 바람도 깨닫는다고 해요.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다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不便한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不便해 보이지만
平和로운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平和로운 법이죠.
내 스스로 괜히 마음속에 뭘 담아두고
불편해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거죠.
그러니까 근심과 걱정도 오늘 다 놓아버리고 가세요.
只今 여기에서 오늘까지의 執着과 分別과 是非와 미련이 놓아진다면,
只今 이 瞬間 우리는 이미 解脫한 存在입니다.
世上에 거의 모든 사람,
특히 失敗한 사람들은
'언젠가 증후군(Someday Sickness)' 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언젠가는 할 거야,
이것 때문에 다 失敗하고 안 된다는 겁니다.
그저 盲目的인 樂觀으로 삶을 虛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좌우명은 '어느 날' 이라고 해요.
하지만 그 '어느 날' 은 永遠히 오지 않습니다.
그 날을 위해 自身을 갈고 닦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지금 滿足하지 못하고 平和롭지 못하면 永遠히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 只今 놓아버리세요. 지금 자유로워지세요.
現在는 過去의 必然的 産物이고 모든 未來의 必然的인 原因이 됩니다.
그래서 現在가 가장 重要해요.
우리의 깨달음의 成就도, 平和스러움도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나 다음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내가 서 있는 삶의 現場 여기에
그대로 들어 있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 머물되 固定된 觀念과 執着을 버리는 瞬間, 우리는
이미 해탈한 自由로운 存在이며 부처님의 품속에 들어 있는 存在입니다.
승원스님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체는 자연에서 자연으로 왔다 자연으로 간다 (0) | 2013.01.07 |
---|---|
3차 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0) | 2013.01.07 |
자유로움을 빼앗는 탐-진-치 삼독 (0) | 2013.01.06 |
부(富)와 靈魂의 出口 (0) | 2013.01.05 |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0) | 2013.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