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법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서 그 사실을 사실대로 굴리는 것이다

장백산-1 2013. 1. 26. 00:27

 

 

 
 

佛法이란 事實을 事實대로 알아서 그 事實을 事實대로 굴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아픕니다. 그러나 아픈 건 몸뚱이지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 다만 몸뚱이가 아픈 걸 代身해서 내가 알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설법을 듣는 것도 전생, 전생, 전생에서부터 크나큰 因緣이 있어서 오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人生 問題를 반드시 解決해야 합니다.

人生問題를 解決하는 데는 머리털 하나라도 틀리면 안됩니다.

마치 비행기의 작은 部品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비행기가 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말할 때는 보는 것은 눈 自體가 아닙니다. 눈에 비치긴 해도 눈이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自體는 다만 거울 역할을 할 뿐 보는 놈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도 거울(鏡) 自體는 智慧가 없기 때문에 나를 모르는 것과 같습 니다. 마찬가지로 귀에 소리가 들려도 귀 自體가 듣는 것이 아니며, 혀도 혀自體가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죽비를 손으로 잡고 있는 데 손은 잡고 있는 걸 모릅니다. 이 보고 듣고 맛보는 놈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여러분에게 있어요.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것도 이 자리가 몸뚱이로 하여금 앉게 한 것이에요. 이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냐는 말이 성립이 안됩니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以前부터 있어요.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 여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몸뚱이를 나퉈서 人生놀이를 하는 겁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짜 '나'모든 걸 나툰 겁니다.

 

 

이 細胞로 이루어진 몸은 自體의 性稟, 自體의 슬기가 없는 無情物입니다. 눈에 自體 슬기가 없고 귀에 自體 슬기가 없고 혀에 自體 슬기가 없고 나아가 몸뚱이 전체에 自體 슬기가 없는 것으로서 다만 因緣에 따라 變할 뿐입니다.

 

진짜 나의 분수로 보면 生과 死도 써 보는건데 이 써보는 作用의 相은 實다운 것이 아닙니다. 이걸 모르고 불교공부를 한다면 전혀 말이 안됩니다. 염불이든 예불이든 참선이든 이걸 알고 해야되지 아무것도 모르고 앉기만을 위한 좌선은 안되는 것입니다.

 

몸뚱이의 所有主는 細胞를 비롯한 적혈구 백혈구 등입니다.

따라서 내 管理物은 될 지 언정 내 所有의 몸뚱이는 아닙니다.

눈이란 器管을 通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지, 귀라는 기관을 通해 듣는 놈이 무엇인지,

자꾸 疑心해 보세요

 

마음자리는 눈이란 器管을 通해서 보기도 하고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라는 器管을 通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라는 기관을 通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며 손을 시켜 물건을 잡게도 하지만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虛妄한 肉身이 나가 아니라 빛깔도 소리도 냄새가 없는 이 자리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것부터 알아야 다른 說法이 먹혀들어갑니다.

 

工夫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肉身을 내버리고 아울러 지금까지 알던 知識도 싹 내버려야 합니다. 내버리라는 건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눈이란 기관을 通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지 귀라는 기관을 通해 듣는 놈이 무엇인지 자꾸 疑心해 보 십시오.

이 마음 자리는 有에 속하지도 않고 無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유와 무를 超越한 자리입니다. 모습이 없어서 찾을 수 없으니 있는 데(有) 속하지도 않고, 보고 듣고 울고 웃고 하는 놈이 있으니 없는 데(無) 속하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虛空과 꼭 같습니다 . 虛空은 命字는 있지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어서 걷어잡을 것이 없으니 있는 데 속하지 않고, 虛空에서 太陽이나 地球같은 萬物이

나왔으니 없는 데 속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가 虛空이기 때문에 크다면 온 누리를 덮고 작다면 바늘귀도 뚫습니다.

 

마음자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虛空부터 걷어잡아야 합니다.

虛空부터 잡지않고 마음을 알았다면 거짓말입니다. 虛空을 잡기 前에는 마음을 모릅니다.

또 虛空을 알려면 마음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虛空과 마음이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色身은 내 管理物은 될지언정 實際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으로써 눈을 삼지 말고 보는 놈으로 눈을 삼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虛空性이 보는 것이니까요. 귀로써 귀를 삼지 말고 듣는 놈으로 귀를 삼으라는 것도 虛空性이 듣기 때문입니다. 虛空性 自體가 내몸이라는 認識을 주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이 虛空안에 살면서도 우리는 虛空을 걷어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虛空을 否認하겠습니까? 虛空은 智慧가 없지만 여러분의 마음자리는 智慧가 있으니 바로 여러분이 虛空의 主人公 누리의 主人公입니다. 슬기자리가 바로 누리의 主人公인데 이 자리는 여러분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당장의 마음이 누리의 主人公이라 生覺해서 항상 몸가짐을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眞如本性 - 여김(念) - 無明 - 알음알이로 굴리어지는 것을 마음이라 하고 있어요.

話頭를 疑心해 들어가다 나중에 어떤 계기 -이 계기는 여러분의 마음가짐새예요- 가 닥치면 境界에 닿찔린 마음을 넘어서서 마음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릇 法을 말한다는 것은 衆生心을 일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衆生이 있으므로 해서 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누리의 主人公인데 이 事實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뼈대에다

살을 바르고 옷을 걸친 이 肉身만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누리의 主人公이 못되는 것입니다.

슬기는 무엇이냐 지금 내 말을 듣고있는 바로 그 자리가 슬기입니다. 물론 이 슬기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걷어잡질 못하지만 내 말을 들어서 認識하는 그 놈이 슬기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슬기도 이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당장의 마음'은 億年前에도 이 마음 그대로 입니다. 물론 億年前의 몸뚱이는 지금과는 달라요. 하지만 境界에 닿찔리지 않는, 變하지 않는 그 마음은 억년前이든 억년後든 같습니다 (물론 이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일으키는 千差萬別의 分別心은 별문제입니다.) 그래서 당장의 마음이 하늘땅의 임자가 되는 것이며, 지금 갖고 있는 그 몸 그대로 하늘땅의 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아닌 一體의 마음입니다. 부처님도 우리들도 축생들도

욕계 색계 무색계도 이 마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니 여러분은 絶對의 存在입니다.

 

진여본성(眞如本性: 淸淨한 本心)에서 한가닥 여김(念)을 일으켜 그 여김이 境界와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데서 無明이 일어나는 데 그 無明이 알음알이를 낳는 이것을 業識이라고 합니다. 普通 사람이 내마음이다 네마음이다 하는 것은 이 알음알이가 몇 차례나 굴리어진 現狀인데 世上 사람들은

이걸 全部 마음이라고 해요.

 

虛空이 하나니 지도리(樞)가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입니다. 이 지도리(누리의 알맹이)는 絶對의 자리이며 虛空이 하나라는 것도 絶對에 속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도 絶對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자리, 生命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이 가죽부대인 몸뚱이를 끌고 다니니 絶對자리 아닙니까? 김서방, 박서방하며 모습을 나투는 것은 因緣과 時節에 따라 다르지만 온누리는 生命이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絶對性자리가 그대로 의젓하건만

그 本來의 마음은 여러분의 알음알이가 分別을 해서 까마득히 숨겨져 있습니다.

 

虛空에 機微를 나투면 이것이 性稟이며, 性稟에서 기미를 거두면 虛空입니다. 虛空에 기미를

나툰다고 해서 기미가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며, 性稟에서 기미를 거둔다고 해서 이 기미를 다른 데로 갖고 가는 것이 아니니, 全部 우리 마음의 作用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虛空과 나의 性稟은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虛空이라는 것도 하나의 말마디에 불과하므로

호호막막한 이 虛空도 남의 것이 아닌 나의 虛空, 卽 나로서인 虛空입니다.

 

이 모습을 끌고 다니는 그 자리가 虛空이며 지도리며 목숨입니다. 여러분은 숱한 知見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에 이 絶對性 자리를 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知見의 當處도 비어있음을 안다면 바로 여러분이 말하는 그 자리가 絶對性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極樂이든 天堂이든 地獄이든 다 같이 어울려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불빛과 저 불빛이 어울려

있으면서도 서로 衝突이 되지 않는 것과 같아요. 衝突이 되지 않으면서도 嚴然히 같이 있습니다.

우리의 性稟자리는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고 착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으며

깨친 것도 아니고 미혹된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眞情 우리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以前의 소식에 앉아 있습니다. 이 우리의 마음자리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나거나 죽는 자리도 아니고, 깨쳤다거나 미혹한 자리도 아니고 正道니 邪道니 하는 자리도 아니고  알거나 모르는 자리도 아니고, 밝은 것 도 어두운 것도 아닌 자리예요.

 

죄와 복이 서로 相殺가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만약 相殺가 된다면 이미 죄는 죄가 아니고 복은 복이 아닙니다. 그건 죽도 밥도 아니지않습니까? 죄와 복은 嚴然한 것입니다. 티끌만한 죄라도 복과 相殺되지 않는다는 事實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죄의 소멸도 스스로가 없애야 하는 겁니다. 없앤다는 것은 죄의 당처가 비었음을 뼈져리게 느끼는 데에서, 아울러 다시는 그런 煩惱를 하지 않는 데서 自然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완전히 녹여 없애려면 견성(見性)을 해야 합니다. 見性을 해야만 그 당처가 비었음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니까요.

 

境地에 오르면 生死도 쓰고 善惡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善을 굴려서 惡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하고 惡을 굴려서 善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절을 하면서 禮佛을 하는 데 그 예불은 내가 이 몸뚱이를 시켜서 내 마음속에 모셔진 부처에게 하는 겁니다. '나'로서인 백봉이 '나'로서인 부처님에게 하는 거예요.

이 '나'를 떼놓고는 부처님이 있을 수 없어요. 나의 슬기속에 부처님의 名號가 모셔져 있거든요.

 

내가 阿彌陀佛 하게 되면 내가 바로 阿彌陀佛이 되는 겁니다. 이건 法性身分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관세음보살 하거나 아미타불 하면 그 자리엔 내가 없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色身도 관세음보살이 나툰 여러분의 色身입니다.

또 문수보살 하면 여러분이 바로 문수보살이예요. 문수보살이 나툰 色身이예요.

 

어떻게 해야 이 習性에 이끌리지 않겠습니까?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그것과 妥協하지 않고, 귀로 무슨 말을 듣든 그것과 妥協하지 않아야 합니다. 妥協하지 않는다는 건 거기에 들어앉지 않는 것입니다. 一體萬法이 虛妄한 虛空인데 거기에 是是非非를 따지면서 들어앉을 필요가 없어요.

 

慾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가 두 뿔의 토끼라는 데 이거 무슨 말입니까? 이건 누리의 眞理를 그대로 뜻하는 말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도 實답지 않는 거짓이고 우리의 몸뚱이도 實답지 않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名字는 있어요! 한 生覺으로 太陽을 地球를 만들어 내도 實다운 것이 아니며,

모습이란 생겼으면 반드시 없어지는 것입니다. 實다운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은 서울에서 여길 왔어요. 하지만 온 것은 헛것인 여러분의 몸뚱이인 모습이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자리가 오고 가는 것이 있다면 뭔가 머리털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데 그 자리는 터럭 하나 없는 깨끗한 자리거든요. 뭐가 있어야 가고 오는 것이 있죠. (本來無物/虛無物也)

 

여러분은 지금 生死問題를 解決하려는 마당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어야 되겠습니까?

먼저 나의 몸뚱이는 느낌이 없는 가짜이고,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마음자리로서 虛空과 한가지이며 永遠한 主體性이란 걸 믿어야 합니 다.

 

참된 眞理는 무엇입니까? 이 참된 眞理를 말하는 者는 여러분입니다.,

이 여러분의 아는 자리, 여김(念)자리가 참된 眞理예요.

슬기로운 사람은 이 자리가 텅~ 비었다(虛空)는 事實을 잘 압니다.

그래서 般若心經에서는 5溫, 12處, 18界도 없고 나아가 苦集滅道의 四諦도 없다고 하는 것이예요.

苦集滅道도 假有고 부처도 假有고 衆生도 假有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 등도 全部 假有이예요.

무명도 있고 범부도 있고 극락도 있고 열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모습으로 있는 것은 事實이나 假有예요. 全部 거짓으로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고 설법하신 것입니다.

無明  生死  涅槃이 다 가짜라도 그 가짜를 無視하는 法이 아니예요.

가짜인 名字를 걷어잡고 우리가 行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몸뚱이도 거짓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工夫를 지어가는 立場에서는 거짓인 이걸(肉身을 말함) 방하착(放下着: 내려놓다)하라는 거예요 이걸 放下着하기 前에는 千萬年 工夫해 봤자 안됩니다. 그리고 이 放下着은 슬기있는 사람이라야 되는거예요. 슬기없는 사람은 지금 내가 말한 걸 納得 못하기 때문에 이 色身을 걷어잡고 모습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如來는 글자 그대로 '온 듯'입니다. 태양도 온 하고 바람도 부는 하고 山河大地가 온 해서 一切의 모습이 모두 '듯'이예 요. 미운 , 예쁜 , 죽은 , 사는 , 밥을 먹는 , 오는 가는 어느 것 하나 '듯'아닌 것이 없어요. 眞如'참인 ' 해서 도저히 끌어 잡을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인 이므로 부처님이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理由가 여기에 있습니다 .

'듯'을 잘 굴리면 三千大千世界의 眞理가 여러분 손바닥 위에서 놀게 돼요.

'듯'을 여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짜놀이를 안하면 되는데 - 그 性稟자리를 놓치지 않으면 가짜놀이를 안하게 되는데 - 어떤 方法으로 가짜놀이를 避해야 할까요? 바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滅盡定에 들어가기 前에는 어떤 마음씀씀이를 가져야 할까요? 어두울 땐 밝은 것을 生覺해야 하고 밝을 땐 어두운 것을 生覺해야 합니다. 어두울 때 밝은 걸 생각하고 밝을 때 어둠을 생각하면, 어둠은 어둠이 아니고 밝음은 밝음이 아니면서 平等하게 됩니다. 이 말은 어둠에도 머물지 않고 밝음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生覺한다는 건 물론 내 마음을 조복(調伏)받는 方便의 말이예요.

진정으로 밝은 性稟과 어두운 性稟을 안다면 生覺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惡으로 十方聖賢을 濟度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무나 惡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惡을 쓸줄 아는 사람은 善도 쓸 줄 알아서 삼악도의 중생을 제도합니다. 이 惡을 쓸 줄 모르는 것도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이예요.

 

어떻든간에 여러분은 '虛空으로서의 여러분'이라는 것을 參究해 주십시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虛空으로서의 여러분이 아니라면 平生가도 工夫되는 法이 아닙니다.

虛空으로서의 여러분을 다른 말로 하자면 空劫人입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별별 法을 다 굴리는 이 空劫人 자리는 虛空과 꼭 같기 때문에

지구의 생성이나 욕계 색계 무색계의 생성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문제가 되지

않으며, 時空間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몇 살이니 하는 것이 成立이 되지 않습니다.

 

一體萬法이 이루어진 것을 否認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認定을 하면서도 이 일체만법이  恒常 變化하는 實답지 않은 虛空性으로서 인생살이의 놀음놀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무는 나무대로 認定을 하면서도 나무가 아니고, 땅은 땅대로 認定을 하면서도

땅이 아니라서  全部 나의 인생살이 놀음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事實을 發見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 라도 名字에 들어앉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虛空이 말하는 것이고, 虛空이 듣는 것이고, 虛空이 보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입은 器管일 뿐 '진짜' '나'는 虛空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도 虛空性이기 때문에 法則에 따라 어린애에서 어른 노인으로 變하는 것이예요.

따라서 우리 몸은 相對的으로 쓰는 器管이며 나의 主人公은 虛空이라고 生覺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納得이 안가고 實感이 오지 않는데, 그때는 눈, 귀, 입에 性稟이 없다는 걸 자꾸 疑心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도 얻지 못하고 중생도 버리지 못하는 이 虛空性 , 法身 자리를 實感해야 합니다.

 

유(有)인 事物을 공(空)으로 보되 空에 들어앉지 말아야 해요. 有와 空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온누리에는 별도 있고 태양도 있고 내 몸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空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無視하고 空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인 모습으로 認定을 하고서 空으로 보라는 것이니,

이것이 有와 無를 둘로 보지 말라는 뜻이예요.

 

온누리에 벌어진 一體萬法이 各各 모습이 다른 實답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하는 데 그 實답지 않은 것의 뿌리는 하나의 虛空입니다. 事적으로 보면 나무와 땅이 있지만 헛것인 名字에 지나지 않고, 理적으로 보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진짜 나무요 땅입니다.

이 色身인 가죽주머니를 所重히 生覺할지언정 이 色身을 진짜라고 보아선 안됩니다.

法身에 앉아서 變化하는 色身을 굴릴지언정 들어앉아서는 안되니, 들어앉아서는 꼭두각시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古佛을 親見하는 道理가 여기서 나옵니다 . 이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니 恒常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죽 나가면 부처를 親見할 수 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은 모습인 몸뚱이지(肉身/色身)  法性體는 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 法性體를 깨쳐서 生死의 性稟이 비었음을 안다면 이미 生死가 없는 것이며,

이미 生死가 없다면 生死와 相對되는 涅槃도 없는 것이예요.

 

우리의 마음자리는 깨끗한 거울과 같아서 도저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데 눈을 通해 보고

입을 通해 말하기 때문에 그 存在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맑은 거울과 같은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境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짜를 붙잡고서 내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心境라는 말이 있는 것이예요. 새의 소리를 붙들고서 새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볼 수가 없어요. 새의 소리와 새의 마음은 둘이 아닌 心境一如입니다.

이 理致를 깨달으면 온누리 全切가 우리 性稟과 한가지입 니다.

 

法은 글자에 있지 않습니다. 法은 말이 없는 無言에 있어요. 그러나 말이 없는 無言을 나타내려면 말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없는 法을 나타내려면 有法이라야 하는 것이예요.

大學까지 나오며 읽은 몇千 卷의 冊과 新聞 雜誌 읽고, 先生에게서 들은 知識이 지금 어디 있죠?

境界에 닿찔려서 일어나는 마음은 相對性으로 자꾸 變하며, 그 相對性 마음은 絶對性자리인

淸淨法身에서 온 것임을 부처님은 알았습니다. 이 淸淨法身은 하늘과 땅을 앞서 있는 것이며

성을 내려면 성을 내고, 춤을 추려면 춤을 추고, 한 生覺을 일으키면 一切萬法이 벌어지고

한 生覺을 거두면 一切萬法이 고요寂寂합니다.

 

우리 一斷 一秒에도 數없이 變하는 肉身을 否認해 봅시다.

그러나 變함없는 虛空身,  '虛空으로서의 나', 

다시 말해서 이 꽃을 볼 줄 아는 이 놈, 저 목탁소리를 듣는 이 놈을 否認하겠습니까?

바로 이 性稟, 이 마음이 虛空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마음대로 따로 있고 허공은 허공대로 따로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虛空을 싸고 있는 건 아닙니다. 事實 마음이 虛空이라는 說法은 理解하기가 어려워요.

지금까지 우리는 名字놀이 모습놀이에 닿찔려서( 抵觸) 절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가 名字놀이, 모습놀이를 淸算하고 싶더라도 自己도 모르는 潛在意識 때문에 자꾸 끄달려요 . 虛空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다면 法은 둘 아닙니까? 그러나 法은 하나입니다.

 

太陽도 虛空性이요  山도 虛空性이요  돌도 虛空性입니다.

이처럼 虛空性하나입니다. 왜 虛空性에는 이 없을까요?

虛空은 아무 모습이 없으니 어찌 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科學的으로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人生問題를 解決하는 것은 問題도 아닙니다. 누리의 問題를 그대로 解決할 수 있습니다.

 

보는 그놈을 눈으로 삼으라는 말이 납득이 갈거예요. 보는 그놈을 찾아본들 못 찾습니다.

찾으려고 하는 그 놈이 보는 건데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내 마음을 내가 찾는다고 하지만 내마음을 찾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인데 어느걸 찾느냐 말예요.

그러니 보는 그 놈도 虛空性이고 내 마음을 찾는 그  마음도 虛空性이에요.

이 虛空은 永遠性입니다. 모습이 없기 때문에 永遠性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습니 다.

 

따라서 모든 걸 綜合해서 가만히 生覺해 보면 虛空은 없는 것이며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더라도 우리는 말을 나투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나투어서 虛空이란 말도 붙이고 마음이란 말도 붙이잔 말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우리가 굴리잔 말입니다.

물론 굴리는 것도 거짓이예요. 하지만 거짓인 줄 알고 우리가 굴리잔 말입니다.

 

부처님도 이 몸을 나투어서 絶對性을 굴리는 재미를 가졌고 衆生들도 이 몸을 나투어서 絶對性을 굴리는 재미를 가졌지만, 부처님은 굴리는 재미를 알아서 굴리지만 우리는 絶對性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그만 어머니가 낳아주셨다는 肉身에만 들어앉아서 다시 말해 相對性에만 들어앉아서 모든 것을 美化시키고 昇華시키려고 할 따름입니다.

 

사람 하나가 온누리의 存在이며, 온 누리와 사람이 둘이 아닙니다. 영도 앞바다 물과 태평양 물이 둘이 아닌 것처럼 공연히 우리가 分別을 가지고 이리 저리 갈라놓기 때문에 둘일 뿐입니다.

모습이 없는 虛空은 無始 無終일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虛空을 바탕으로

有情 無情의 相對性의 差別을 나누어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기자리이며,

따라서 슬기자리야 말로 虛空의 主人公인 것입니다.

 

김보살이 빙긋이 웃고 있네요. 누가 웃습니까? 虛空이 웃는 것입니다.

虛空이 웃는 것이 김보살의 얼굴가죽주머니를 通해서 웃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 자리가 어떤 모습도 없어서 걷어잡아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神性한 絶對性자리지 우리가

걷어 잡을 수 있다면 그까짓 것 무슨 價値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붙잡을 수 없는 데도 마음대로 이 입을 通해서 말을 하고 이 손을 通해서 온갖 形用을 하니,

이 걸 한편으로 生覺해보면 참 고맙고 거룩해서 절이라도 하고 싶어요. 하하

 

이 자리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도 나투고 어두운 것도 나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겁니다.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어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기 때문에 남자도 나툴 수 있고 여자도 나툴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자리도 아니고 범속한 자리도 아니기 때문에 거룩하게도 되고 범속하게도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몸뚱이를 가리켜서 '나'라고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물론 이 色身이 法身의 그림자인 건 틀림없어 法身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方便으로 이 色身을 代身 내 놓고서 '나'라고 하지만 實際로 '나'는 아니거든.

 

여러분은 事實을 事實대로 말해도 설마 하면서 실랑이를 벌여요. 이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色身은 앞엔 얼굴이 뒤엔 뒤통수가 있고 가슴과 등이 있지만

여러분의 진짜 몸(虛空)은 앞뒤 안팎이 없이 텅~ 비었습니다.

이 텅~ 빈 가운데 슬기가 있을지라도 그 슬기 역시 모습이 없으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들 잘 키우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공경하면서도 이 모든 걸 비었다고 알아야 합니다.

因緣에 따라 헛것을 나투어서 남편이다 아내다 자식이다 하더라도 이 色身에 의한 것이지

그 당처(當處)는 비었다는 걸 안다면, 자식을 키워도 잘 키울 수가 있 습니다.

이 法은 너무나 높아서 슬기로워야지 깨트리지 어리석어서는 도저히 안되는 겁니다.

 

이 슬기자리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닙니다.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을 받아들이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道理를 確實히 알면 누리가 어디서 왔는가도 압니다. 이 자리는 絶對性자리이기에

自心正覺汝佛寶, 즉 스스로의 마음을 바르게 깨친 너의 불보(佛寶)라는 겁니다.

너라는 뜻의 여(汝) 자를 놓은 것은 이 絶對性자리가 여러분에게 다 갖춰진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佛寶는 깨달은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밥먹고 일하러 나가는것도 다

깨달은 자리가 하는 겁니다. 모든 모습이 實답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법보(法寶)입니다. 온갖 法에 應하여 作用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며, 因緣에 따라 衆生을 濟度하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입니다.

 

個別的인 人格體을 나투면서 '나'라고 生覺하기 때문에 나툰 그 자리를 完全히 잊어버리고서

받은 몸뚱이에 對해 喜怒哀樂을 느끼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꿈입니다.

事實은 나가 없는 데도 그 나를 좋게 하고 어떻게 하려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懇貪心은 '나'라고 하는 데서 생긴 겁니다. 간탐심을 除去하면 我相이 없어지고 我相이 없어지면 人相  衆生相  壽者相도 싹없어집니다.

 

구리새가 날아오는 것이 정법입니까? 무정법입니까? 나는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요.

이 이상 더 말을 하면 말이 틀려버립니다.

'萬古長空 一朝風月'이 하도 좋아 '千里江山이요 萬年綠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性稟은 참으로 큽니다. 地球는 없어져도 虛空은 없어지는 法이 아니예요.

우리 生命은 虛空과 꼭 한가지입니다. 다만 그 자리는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는 데,

이 때문에 아는 것도 나투고 모르는 것도 나툽니다.

善惡도 없는 데 善도 惡도 나투고, 迷悟도 없는 데 迷도 悟도 나투어요.

사람의 몸을 받은 이 機會에 어찌 이 問題를 解決하지 않겠습니까.

解決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바보예요. 바보 중에서도 바보예요.

 

아는 것보다는 느끼는 것이 佛法입니다. 느끼면 바로 自己가

느낀 그 자리로 되어버려 그대로 느껴버리면 自己가 山河大地이고 山河大地가 自己인 것입니다.

慈悲에 철저하기란 어려운 것이예요. 왜냐하면 我相을 여의기 前에는 慈悲에 철저할 수가 없거든요.. 我相을 完全히 여의는 데서 慈悲가 철저해집니다. 머리털만한 我相이라도 있으면 慈悲에

철저하지가 못합니다.

 

工夫가 돼서 道가 높을수록 魔도 높은 거예요. 이거 참 이상한 겁니다. 어느 程度 工夫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되는데 그에 따라 魔도 높아져요.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魔 - 삿된生覺 -에 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所信을 밀고나가는 사람은 大丈夫이자 智慧로운 사람이라야 되는겁니다.

나는 여기에다 덧붙여서 福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겁니다.

 

佛法은 느낌으로 새겨야 합니다. 無量壽佛하면 無量壽佛이 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위산이 있던 시대로부터 千年 後에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 참말로 우리가 위산보다 千年後의 사람인가요? 지금 이 말을 하는 生覺, 이 生覺自體에 千年歲月이 흘렀습니까? 잘 生覺해봐요. 흐를 것이 없어. 生覺있음과 生覺없음의 妙한 그 느낌, 그 느낌이 千年前과 다른가요? 모습은 달라져도 그 느끼는 자리는 꼭 한가지입니다. 그 자리에 거래(去來)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느낌 하나 이거든요.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치니 밝음은 밝음이 아닙니다. 어둠으로 오면 어둠으로 치니

어둠은 어둠이 아니예요.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것이 本來의 消息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妙합니다. 일으키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없어요. 그러니 이 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아울러 쓰고 있어요.

 

내가 이 작대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내가 虛空 하나 들은 것 아닙니까? 세존이

꽃한송이 든 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十方 三千大千世界를 든 것이나 한가지입니다.

性稟으로 봤을 때 꽃한송이와 三千大千世界는 둘일래야 둘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꽃한송이 드신 소식은 씀이(用)을 나툰 것이며,

虛空 中에서 地球나 太陽을 나툰 것도 妙한 씀이(妙用)을 나툰 것입 니다.

 

이 몸뚱이 자체가 느낌이 있든 없든 누리의 지도리가 나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는 千年萬年 사는 것이 아닌데 그 理由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씀씀이가 굴리어 질 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嚴然히 있으며, 嚴然히 있기 때문에 그에 알맞는 씀씀이를 굴립니다.

 

여러분이 이거만 解決하면 더 工夫할 것이 없어요. 그 다음에 닦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닦는 것은 무엇을 닦을 까요? 事實 닦을 것도 原來 없습니다. 原來는 없지만,

우리는 모습에 치중한 그 버룻으로 꽉 찌들려 있기 때문에 이 習氣가 좀채로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버룻을 닦는 겁니다.

 

수보리가 텅트인 法身자리로서 부처님을 보았듯이 여러분도 지금 이 자리에서 몸뚱이를 걷어잡으면서도 - 事實 걷어잡지도 못하 지만 - 여러분의 무상신(無相身)虛空身을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無相身을 느낀다면 즉각 360도 달라집니다.

이건 머리털 같은 그 生覺 하나의 差異입니다.

 

젊은 것은 젊은 대로 보내버리고, 늙은 것은 늙은 대로 보내버리고, 남자는 남자대로 보내버리고, 여자는 여자대로 보내버리면서 관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全部 보내버리면 진짜 '나'가 말뚱말뚱하게 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生死를 쓰더라도 그 生死에 關係하지 말고 全部 보내어 버리세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本來의 淸淨法身 자리는 凡夫에도 떨어지지 않고 聖賢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하다느니 범속하다느니 하는 것도 하나의 띠끌이니까요. 어찌됐든 마음의 波濤를 일으키면 그 마음자리는 꾸정거려지게 마련인데, 그 해말쑥한 자리를 거룩하다 범속하다 하면서

꾸정거릴 필요가 어디 있겠느냔 말입니다.

 

過去 現在 未來가 過然 實在하는 것일까요 ?

우리의 몸뚱이도 이름뿐인 몸뚱이요, 生死도 역시 이름뿐인 生死입니다.

요즘엔 工夫하는 手段과 方便이 달라져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내가 說法하는 이 자리에까지 데리고 온 것도 바로 이 슬기자리, 絶對性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아는 것이 바로 見性 이며, 이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이며 보살자리에요.

여러분의 色身은 아무 智慧도 없는 虛妄한 物件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를 향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確實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서로 相殺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罪性과 福性이 그 性稟은 같을 지라도 行에 있어서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罪를 짓지 않기 위해 뉘우치긴 뉘우칠지언정 贖罪를 위해서는

罪의 當處가 비었다는 生覺을 恒常 놓치지 않고 이 色身을 通해 功德行을 이루는 길입니다.

이렇게 되면 罪의 性品은 도리어 福의 길로 바뀜니다.

 

여러분의 主人公인 昭昭靈靈한 자리, 그 絶對性자리, 그 主體性 자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자리는 지구가 생기기 前부터 하늘과 땅이 생기기 前부터 있는 겁니다.

 

時間은 모습이 나타나서 꺼질 때까지의 사이입니다.

空間은 그 모습이 꺼진 狀態에서 다시 나투는 사이를 空間이라 합니다.

結局  時間과 空間은 하나라는 걸 두고 한 말이예요.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因緣에 따라서 그 絶對性자리에서 男子몸을 받기도 하고

女子몸을 받기도 하는데  그 當處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앞소식인 자리입니다.

 

虛空은 모습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슬기의 을 갖추면 볼수 있는 것입니다.

 

出家의 진짜 目的은 좋다 나쁘다, 잘났다 못났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分別을 하지 않고

그대로 本來의 消息을 걷어 잡아서 自身의 聖胎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집에 가서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밥을 자시면서도

나에게있는 數많은 知識이 어디 있는지 자꾸 疑心해 보세요.

 

내마음을 내가 찾는다고 하지만 내마음을 찾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인데 어느걸 찾느냐 말예요.

보는 놈을 눈으로 삼으라고 하지만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事實 이거 말이 안되는 겁니다.

나도 近似하게 方便으로 하는 말이지 이 자리를 어떻게 말을 합니까?

 

부처님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 前 消息에 앉아서 하늘과 땅이 나뉜 뒤의 消息을 걷어 잡고

다시 돌아올 줄 알지만 중생들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 前 소식에 있으면서도 이를 깜박 잊어 버렸어요.  어느것이라도 이름字가 붙으면 相對性이에요.

말마디가 붙지 못하는 도저히 表現될 수 없는 言語道斷의 世界 이것이 絶對性이에요.

 

난 죽을 수만 있다면 참으로 幸福하다고 生覺합니다.

그런데 죽을 수 없는 것이 人間이에요.

우리가 畜生몸도 받을수 있고 부처몸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난 재미없어요.

 

事實 여러분은 꿈속에 있습니다.

잠자면서 꾸는 꿈은 第 2의 꿈이고  지금 눈을 뜨고 꾸는 꿈은 第 1의 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一切의 모습이 진짜가 아닌데 진짜로 알고 있으니 이게 꿈 아닙니까?

 

아무튼 난 이번 철야정진에서 이 因을 심은 것을 하나의 큰 成果라고 生覺해요.

여러분들이 도솔천에서 몸을 받을수 있는 因이 심겨졌다는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도솔회상에서 다시 만나 거기서 또 工夫합시다.

 
※ 백봉선생님 저서나 설법테이프, CD등을 구하시고자 하시는 분은 선원 담당자에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010-6332-4096 전 근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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