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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저의 소견을 적어보겠습니다.
초기경의 도처에 "눈을 반연하고 형상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귀를 반연하고 소리를 반연하여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라는 정형구가 나타납니다. 초기/남방/부파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1. 마음은 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난다. 2.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다 라는 것입니다.
주석서들에 나타나는 마음의 定義는 "對相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構體的으로 "마음은 일어나서 對相을 認知하고 消滅한다. 그러면 그 다음 刹那의 마음이 條件따라 일어나서 對相을 認知하고 消滅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每刹那 條件따라 일어나서 對相과 關係하고 消滅합니다. 이렇게 每刹那 生滅을 거듭합니다.
마음은 "對相을 안다"는 것으로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每 刹那에 일어나서 對相을 認識하고 滅하는 이 한 刹那의 認識過程에 介在된 單位要素를 하나의 마음이라 한다면 마음은 不可說不可說轉으로 思量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나고 滅합니다. 북전 논서에도 손가락을 '딱'하고 한번 튀길때 960個의 마음이 일어났다 消滅한다고 말합니다.(법원주림)
嚴密히 말하면 우리가 마음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마음의 흐름(citta-santati, citta-dhaara)입니다. 이런 刹那的인 마음의 흐름을 우리는 두루뭉술하게 마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금강경도 마음을 흐름(citta-dhaara)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구마라즙스님은 단지 마음(心)으로 옮겼기에 우리가 모를뿐입니다. 현장스님은 心流注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문장이나 한단어를 읽을때, 글을 보고있는 찌따가 無量하게 많이 일어나고 滅합니다.
刹那刹那 모두 다른 마음들이 前念(찌따)을 相續하여 無限히 많은 後念들이 關與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對相을 안다는 것으로는 하나입니다.
여기서 重要한 것은 '每瞬間 지금 여기' 입니다. 過去는 이미 지나갔고 未來는 아직 닥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每瞬間 지금 여기서 生滅하는 마음을 通察할 것을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刹那生刹那滅의 마음에서 우리가 사무쳐야할 內容입니다. 남북의 수행자들이 모두 여기서 解脫의 門을 發見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즉시현금 갱무시절(隨處作主 立處皆眞 卽時現今 更無時節)을 고구정녕히 말씀하신 임제스님이나 圓覺道量何處 現今生死如是 라는 옛 선장의 가르침을 새겨봐야겠습니다.
현문우답이 아닌지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질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각묵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