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금 이곳'이 대웅전이요 선방이다

장백산-1 2013. 3. 17. 11:49

 

 

'지금 이곳'이 대웅전이요, 선방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生에서 갖기 어려운 것이 네 가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렵고,
두 번째 바른 法을 만나기 어려우며,
세 번째 바른 법을 가진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네 번째 眞理를 깨우쳐 부처가 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 세 가지를 가진 幸運을 얻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韓國에 계신 많은 善知識들로부터
올바른 法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깨닫는 일만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누군가 서울을 찾아왔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혹은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만약 질문을 받은 사람이 “모릅니다.”라고 답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기 전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왜 오셨나요?
그 대답 역시 “모릅니다.”일 것입니다.
누구도 부모님께 메시지를 보내
“저는 한국에 태어나고 싶으니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말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 뱃속에서 나와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바보가 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나는 어디서 오고,  왜 왔으며, 무엇을 하러 왔는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遠大한 물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6년 동안의 수행을 거쳐,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컵 안에 들어있는 것을 미국 사람은‘워터(Water)’라고 하고,
한국 사람은‘물, 중국 사람은‘스웨이’, 스페인 사람은‘아쿠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워터입니까, 물입니까? 혹은 스웨이입니까, 아쿠아입니까?
만약 물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물’이라는 말에 執着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워터’라고 답한다면 英語에 執着하고 있는 것이지요.
 美國에 가서 목이 말라 아무리 물을 달라고 외친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침내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내가 필요한 물이다.”라고 말해도
그들은“이것은 물이 아니라 워터입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엔 물은 없고 오직 워터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모두 이름(名)과 모양(色)에 執着하는 것이지요.
워터건, 물이건, 아쿠아건 이것들이 가리키는 바는 다 한 가지입니다.
단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뱀은 호랑이의 마음을 理解할 수 없고, 호랑이는 새의 마음을 理解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자신들끼리만 이해하며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人間의 마음아주 색다릅니다.
 人間은 모든 것을 다 理解할 수 있습니다.
정글에서는 호랑이와 코끼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은 호랑이나 코끼리와 交流할 수 있으며
심지어 호랑이가 코끼리 등위에 올라타도록 훈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오직 人間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는 곧 人間의 마음이 無限함을 意味합니다.

하지만 근래 인간들은 큰 집단을 이루어 함께 행동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작은 그룹들 안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로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 몸, 즉 입과 위 사이에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지난 밤 술자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입으로는 “소주 더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분명 위에서는
“그만 들어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몸 안에서조차 見解가 달라 서로 싸우는데,
어떻게 世界平和를 生覺할 수 있겠습니까.

25년 전 LA에 있는 한국 절에 있을 당시,
숭산 큰스님께서 제가 있는 절로 오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물들에게 어떻게 하면 世界平和가 具現되는지 물어봤지.
그랬더니 모든 人間이 다 죽고 나야 世界平和가 온다고 하더군.”
모든 動物들은 人間이야말로 가장 害로운 動物이라고 말합니다.
世上天地에 가장 나쁜 것이 바로 人間인 것입니다.
人間만이 서로 싸우고, 많은 動物을 죽여 肉食을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空氣와 물을 더럽힙니다. 우리 삶에 있어 因果關係는 매우 分明합니다.
만일 自然을 계속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미래에 엄청난 문제가 닥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眞理는 말이나 글 또는 어떤 사람의 見解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개는 멍멍 짖는다, 설탕은 달콤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眞理입니다. 
卽 우리는 眞理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眞理를 바탕으로115眞情  人間다운 삶을 살도록 努力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完全히 調和를 이루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오직 그 일에만 몰입하십시오.
만약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生覺을 가지고 탔다면
분명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입니다.
生覺을 멈출 때, 비로소 모든 것이 自動的으로 일어나고 分明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暝想이라 부릅니다.
명상이란 좌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暝想의 참뜻은 어떤 일을 할 때 단지 그것에만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暝想은 우리를 生覺 以前의 狀態로 돌려놓아 分明히 보고 正確히 들으며,
眞理를 얻어 그것을 제대로 使用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남편 때문에 속상해, 애들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혹시 이런 生覺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설거지를 할 때,
이곳은 주방이 아니라 대웅전이요 선방이라고 生覺하십시오.
그 瞬間이 참된 명상의 시간인 것입니다. 즉 설거지 冥想을 하는 것이지요.
불교 수행과 일상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每 瞬間 어떻게 우리 마음을 維持할지가 重要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단지 그것에만 集中한다면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한 本性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보살님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합니다.
그분은 南便과 離魂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딸을 키워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工夫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비싼 학원도 보내고, 딸의 공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엄마는 이를 악물고 일하면서 딸이 공부에 專念하도록 뒷바라지 했지만,
 結果는 좋지 않았습니다.
딸은 不幸했고 압박을 느꼈으며 점점 더 뚱뚱해졌습니다.

그런 딸을 보면서 엄마는
‘이 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강아지를 키우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공부를 하라고 몰아붙이면 딸은 하기 싫어했지.
방 좀 치우라고잔소리하면 방 치우기를 싫어했고.
그런데 강아지 돌보는 일 만큼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잘 했었잖아?’
生覺이 여기에 미치자 엄마는 더 이상 딸을 학원에 보내지 않기로 決心했습니다.
차라리 학원비에 들 돈을 모아 딸이 졸업하면
동물병원이나 애견센터 같은 것을 하나 차려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엄마는 마음을 바꾸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딸은 조금씩 살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곧 예전의 ‘통통’한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은, 내 生覺을 붙들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生覺에 執着하지 말고 한 발짝 물러나서 다시 生覺해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生覺에 對한 執着이 없으셨기에
모든 사람들을 理解하실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지켜보면 智慧를 떠올리셨고,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아셨던 겁니다.
自身을 完全히 내려놓고 주변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眞情한 도움과 行動이 自動的으로 우러나올 것입니다.

世上의 모든 問題는 참된 本性을 되찾는다면 解決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質問을 던지면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무언가를 할 때 그냥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본성을 찾는 길입니다.
언젠가 崇山 큰스님께서는
“올바른 目標와 그곳으로 가려는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行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것들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興味로운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언젠가는 올바른 目標와 그것을 實踐하려는 마음自體가
곧 깨달음이라는 事實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냥 하면 된다.”
이 時間 以後 여러분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큰 質問 하나를 가슴에 품고 돌아가실 겁니다. 그것 하나면 充分합니다.
좋은 答이 떠오르시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하지만 答을 모르시겠거든, 그냥 모르는 채로 계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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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 스님 ː
1950년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으로, 1977년 뉴헤이븐 선원에서
숭산 스님 법문에 감화되어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화계사로 출가해 한국불교에 귀의하고,
같은 해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8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고,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 받아 전법제자가 되었다.
1999년 계룡산 국제선원무상사로 와 줄곧 수행 정진했으며,
2000년 무상사가 정식 창건된 이후 현재까지 무상사조실을 맡고 있다.
해솔님이 올린 법문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