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우리 함께 깨닫기 - 2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사는 삶 그 자체가 성불 견성이다

장백산-1 2013. 3. 23. 20:52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② '나홀로 견성'의 신기루를 깨시오 !!!
|마음 나누기

일행거사 | 조회 26 |추천 1 |2013.02.27. 15:52 http://cafe.daum.net/truenature/7pe3/3018 

 

..

 

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불자님,

이제 다섯 발의 대포 중에서 두 발 째  대포를 쏘아 올리려 합니다.

 

이 두 발 째 대포에서 지금까지 어느 스님네도, 불교 지도자들도 말해주지 않은

'見性, 깨달음'에 대한 놀라운 眞實을 接하시게 될 것입니다.

 

깊은 省察의 機會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_()_

 

....

實로 놀라운 現實이다.

’깨달음 見性‘ 하면 홀로 토굴에 앉아 몇 年 몇 十年 修行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법구경 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는 實로 衝激的인 情報를 提供하고 있다.

 

96,3%의 함께 깨닫는 사람들 –

’왜 불교가 「우리 함께 깨닫기」인가?‘,  ’왜 불교가 大衆見性運動인가”? 하는

質問에 對한 對答이  여기서 明快하게 提示되고 있다. ....(본 문 내용 중에서...)

 

(혹시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① 자료를 보시지 않은 분은 본 게시판에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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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강의 – 대중견성론>

 

               희망의 출구 –「우리 함께 깨닫기」

                                 – 우리도 부처님같이 –

 

                                                                                      김재영 (동방불교대 교수, 청보리회 법사)

 

 

[강의 2] 大衆見性 – 「우리 함께 깨닫기」, 可能한가?

 

 

 

1. 大衆見性 –「우리 함께 깨닫기」란?

 

1) 기원 전 544년 2월 보름, 생의 마지막 날, 피를 쏟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작은 마을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부처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을 위하여 法을 說하고 祝福하는 팔순의 노(老)부처님,

죽어서 뼛조각까지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고따마 부처님 – 저 藏嚴한 光景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깨달음’의 意味를 새롭게 發見하고 있다. ‘見性成佛’을 새롭게 發見하고 있다.

 

 

大衆見性이란 무엇인가?

 

「우리 함께 깨닫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도 부처님같이 사는 것이다.

저 고따마 부처님같이,

나누고 섬기면서 다함없는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熱心히 努力하는 것이다.

 

고따마 부처님의 그 절절한 삶과 사랑 ‧ 죽음을 보고 共感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잘 理解하고,

우리 스스로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通察하면서’ 살아가려고 다짐하고

진지하게 熱心히 努力하는 것,

이러한 過程을 通하여 이 社會를 正義롭게 變化시키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깨닫는 것,

많은 사람과 더불어 함께 利益과 幸福을 나누는 것, 이것이 大衆見性이다.

이것이 萬人깨달음 萬人幸福의 「우리 함께 깨닫기」이다.

 

 

2) 어떻게 대중견성인가? 어떻게 우리 함께 깨달을 수 있는가?

 

깨달음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같이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삶 그 自體이기 때문이다.

깨달음 見性 解脫 涅槃은 神通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같이 살아가려고 熱心히 努力하는

우리들의 日常的인 삶 – 삶의 現場 -그 自體이기 때문이다.

 

비록 끊임없이 흔들리는 별 볼일 없는 이 몸일지라도, 自己自身을 믿고 依持하고 부처님 삶과 가르침을

등불삼아,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通察하면서’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고  위없는 幸福은 눈앞에 現實로 드러난다.

기원 전 545년 죽음을 얼마 앞두고, 고따마 부처님께서 웨살리에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說하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만일 그대들이 自己自身을 등불 삼고 나의 가르침을 등불 삼고

다른 것을 등불 삼지 않고 아간다면, 내가 살아있을 때나 내가 입멸한 뒤일지라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들은 [누구든지] 最高의 境地에 이를 것이다."

 (디가니가야 16, 대반열반경 ; (D ⅱ 101)

 

 

自己自身을 등불 삼는다는 것(atta-dipa)(自燈明)은 

나 自身을 믿고 依持處로 삼아 熱心히 努力한다는 것이고,

르침을 등불 삼는다는 것(dhamma-dipa)(法燈明)은

부처님의 삶을 보고 共感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잘 理解하여 實踐한다는 것이다.

 

‘위와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누구든지 이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그 삶 自體가 – 삶의 現場 그대로가

바로 最高의 境地, 곧 깨달見性 解脫 涅槃 成佛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면,

조금만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든지 쉽게 깨닫고 解脫 涅槃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함께 깨닫기」이다.

 

 

 

2. 초기불교의 수많은 「우리 함께 깨닫기」사건들

 

1) ‘여자종  뿐나의 見性 事件’

 

「고따마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가하의 독수리봉에 계실 때이다.

 

女子從 뿐나(Punna)는 밤늦도록 등불을 켜놓고 벼를 찧고 있었다. 너무 지친 뿐나는 잠시 쉬기 위하여

밖으로 나와 땀으로 흠뼉 젖은 몸으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말라인 두바(Dubba)는 비구들의

숙박관리인이었는데, 등불을 밝혀들고 비구들을 案內하며 산길을 가고 있었다. 뿐나 女人은 生覺했다.

 

‘나는 일 때문에 지쳐서 여태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지만,

저 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그렇게 새벽이 되었을 때, 뿐나는 일을 마치고 붉은 쌀겨를 모아서 손에 쥐고 물로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 숯불로 구웠다. 그리고 女人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으로 가서 목욕하고 이 빵을 먹어야지 – ’

 

뿐나는 빵을 치마 속에 넣고 물병을 들고 강가 목욕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때 세존께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라자가하로 탁발하러 들어가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다. 뿐나는 저만큼 다가오는 부처님을

보고 이렇게 生覺했다.

 

‘나는 세존께 供養 올리고 싶다. 세존께서 이 빵을 거칠다고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 ’

 뿐나는 물병을 내려놓고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드리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거친 빵을 받으시고 제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부처님은 잠잠히 미소하며 발우를 내밀어 여인의 빵을 받았다. 그리고 여인에게 感謝의 말을 했다.

 

“女人이여, 부디 幸福하십시오.”

 

뿐나는 속으로 生覺했다.

 

‘세존께서 내 빵을 받으셨지만, 實際로 드시지는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개나 소에게 던져주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王이나 貴族들의 供養을 받으실 것이다.’

 

부처님은 女人의 마음을 짐작하고 길옆에 가사를 깔아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

그리고 여인의 거친 빵을  맛있게 드셨다. 供養이 끝나자 부처님은

지난 밤 女人이 밤 새우며 일한 것을  生覺하고 게송으로 담마(法門)를 說하셨다.

 

 

‘恒常 깨어있어 살펴보는 사람들

 밤낮으로 精進하는 사람들 

涅槃을 위하여 努力하는 사람들 

그들은 煩惱를 여의느니라.“ (법구경 226 게송)

 

이 가르침을 듣고 뿐나 女人은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길(豫流)로 들어섰다.

주변에 있던 많은 시민들도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法句經 注釋書)

 

2) 밤늦도록 쌀 방아를 찧고 있는 여자종 뿐나 

   땀으로 몸을 적시며 잠 못 이루는 뿐나 여인 

  거친 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뿐나 여인 

  그 빵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뿐나 여인 

 

거친 붉은 쌀겨빵을 드시고 法을 說하시는 부처님

法을 듣고 그 자리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뿐나와 라자가하 시민들 –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깨달음’을 새롭게 發見하고 있다.

삶의 現場에서,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 서로 나누고 섬길 때, 實로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한瞬間에 함께 깨달을 수 있다는 事實을 새롭게 發見하고 있다.

「우리 함께 깨닫기」가  한갓 理論이거나 이상(理想)이 아니라 歷史的 事實이라는 眞實을

새롭게 發하고 있다.

 

3) 한 연구에 의하면(김재영, 『붓다의 대중견성운동』), 初期佛敎 時代에는 이렇게 뿐나 女人같이,

日常的인 삶의 現場에서, 日常的인 삶을 通하여 生命의 빛을 보고 새 人生을 開拓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리 함께 깨닫기」事件들이 報告되고 있다.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法句經』(Dhammapada)을 해설한 『법구경주석서』

(Dhammapada-Aṭṭhakathā)를 分析한 결과,

등장인물 가운데 身分區分이 가능한 7,628명 중 5,787명이 性하고 있다. 75,9%가 함께 깨닫고 있다.

 

5,787명의 見性大衆 가운데 남성이 2,243명 - 38,8%, 여성 3,544명 - 61,2%이다.

출가가 3,186명 - 55,1%, 재가 2,601명 - 44,9%이다.

상류층 2,121명 - 36,7%, 류층 1,526명 - 26,4%, 천민층 2,138명 - 36,9%이다.

女性 出家 賤民出身이 함께 깨닫기의 多數를 차지고 있다.

 

전체 등장인물은 밝혀내기가 불가능하지만,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법구경 대중 가운데  12,975 + α 명이 함께 깨닫고 있다.

또 설법 총 299회 가운데 189회 - 63,2%에서 함께 깨닫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4) ‘알라위 地方 한 織造工의 딸과 아버지가 함께 깨닫는 事件’을 비롯하여(법구경 174게송),

    數많은 平凡한 보통 사람들 - 보통 시민들이 함께 깨닫고 있다. ‘해상(海商) 바히야가 아라한 되는

   事件“(법구경 101게송)을 비롯하여, 수많은 세속의 재가 대중들이 함께 깨닫고 있다.

 

’곡예사 욱가세나의 즉시 깨달음 사건‘(법구경 348게송)을 비릇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專門的 修行

이나 禪定을 거치지 않고서도 함께 깨닫고 있다. ’상깃짜와 500 도둑이 함께 깨닫는 사건‘(법구경 110

게송)을 비릇하여, 수많은 대중들이 集團的으로 함께 깨닫고 있다.

 

全切 함께 깨닫는 대중 12,975명 가운데 500명 以上이 함께 깨닫는 사건이 26회12,500명으로

96,3%이다. 거의 大部分이 함께 깨닫고 있다.

 

實로 놀라운 現實이다.

’깨달음 見性‘ 하면 홀로 토굴에 앉아 몇 年 몇 十年 修行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법구경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는 實로 衝激的인 情報를 提供하고 있다.

 

96,3%의 함께 깨닫는 사람들 –

’왜 불교가 「우리 함께 깨닫기」인가?‘, ’왜 불교가 대중견성운동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서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5) 王 王族들 貴族들 官理들 資産家들 銀行家들 브라만들 商人들 農夫들 漁夫들 牧童들 金銀細工士

들 무용수들 마부들 나무꾼들 곡예사들 머슴들 노동자들 난쟁이들 시각장애자들 나병환자들 전염

병환자들 정신병자들 도둑들 걸인들 깡패들 창녀들 하녀들 노비들 어린이들 청년들 처녀들 주부들

노인들 –이 함께 깨닫고 있다.

 

佛敎는 本來 이렇게 數많은 大衆들이 함께 깨닫는 萬人의 길, 普通 市民의 길로

활짝 열린 「우리 함께 깨닫기」다. 「우리 함께 깨닫기運動」이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 見性 解脫 涅槃 成佛은  ‘數百 數千 數萬 사람들의 길’로,

‘普遍 普通의 길’로 現實化되어 갔다.

 

누구든지 삶의 現場에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 따라 진지하고 열심히 살아가면, 그 삶에 依해서,

오로지 그 삶의 行爲에 依하여 함께 깨닫는 것이다.

기에는 어떤 前提도 없고 留保事項도 없다. 오로지 삶으로, 行爲로 함께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 見性은 철두철미 삶이고 行爲이다. 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다.

出家라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參禪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錯覺에서 깨어나라.

부처님께서 새삼 이렇게 說하고 있다.

 

‘나는 在家者들이거나 出家者들이거나 그들의 올바른 行爲를 稱讚한다. 왜냐하면,

재가자나 출가자들이거나 올바른 行爲를 하면, 그 올바른 行爲에 依하여,

들은 眞理의 길, 淸淨한 담마를 成就하기 때문이다.’ (마찌마니까야, MN ⅱ197)

 

 

 

3. 問題는 깨달음이 아니라 이다

 

1) 문제는 ‘깨닫는가?  못 깨닫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가?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佛敎는 ‘깨달음의 宗敎’가 아니다.

‘見性 解脫 涅槃 成佛의 宗敎’가 아니다.

佛敎는 ‘삶의 길’이다.

불교는 우리들의 日常的인 삶 그 自體이다. 삶의 現場 그 自體이다.

 

따라서 삶의 現場을 떠나서 깨달음을 論하는 것은 無意味한 觀念놀이이다.

 이 시끄럽고 골치 아픈 삶의 現場을 떠나서 見性 解脫 涅槃 成佛을 論하는 것은 錯覺이며 幻想이다.

고요한 곳에 앉아서, 적정한 삼매 속에서, 인생을 논하고 자성(自性) 마음을 찾는 것은

自身과 남을 속는 거짓이다.

 

2) 그런 속에서 ‘깨달았다’  ‘한소식 했다’ 해도 實際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 世上속으로 나오면, 이 急迫한 삶의 現場으로 한발자국 나서면,

十年 二十年 앉아서 修行한 것이 거의 아무 쓸모가 없다.

胞끼리 戰爭을 하고 獨裁者들이 市民을 殺傷하고 가난이 대물림 되는 이 世上의 苦痛과 모순 앞에,

땅의 道人들 善知識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말 한 마디 못하고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어떤 代案도 提示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民衆들 앞에 한줄기 希望의 등불도 밝히지 못하고 –

도대체 生死를 自在하는 그 般若智慧는 다 어디로 갔는가?

사랑 자비는 오직 구두선(口頭禪)인가?. 말로만 ‘중생제도’ 하는가?

를 나누고 장기를 나누는  몸 나눔이 없다면, ‘生死解脫’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죽을 때 혼자 便安하게 가자는 것인가?

 

생사해탈 안 해도 다  잘들 죽던데, 미소하며 잘들 가던데 –

 

3) 오래된 佛子들, 나 自身부터, 남 섬길 生覺은 엄두도 못 낸다.

적정처(寂靜處)에 習慣되어 일어설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自己들만 잘 낫다. 合理的 對話가 通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世上살이 - 世間살이를 우습게 알고, 

살아보려고 허덕이는 俗人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며 우월감을 즐긴다.

말이막히면, ‘오로지 마음을 깨달아라, 自性을 보아라’ 하고 마음타령이다. 출가도 재가도 마찬가지다.

 

生覺해보면,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數千年 風土가 그래왔고, 制度가 그래왔고, 배운 것이 그래온 것인데 – 이것은 원망도 비난도 아니다.

同業衆生의 自己批判 自己省察이다.

 

4) 그러다가 歷史의 흐름에서 밀려났다. 社會的 役轄을 다 잃고 말았다. 勢力을 잃고 주변적 집단으로 몰

락하였다. 무섭게 번지는 종교전쟁의 불길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불교의 생존자체

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심 아프간의 바미안 대불(大佛)이 이슬람의 대포를 맞고 뭉그

러지듯, 석굴암 대불이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만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말한다. ‘세력을 잃으면 도태된다.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포(大砲)가 승리한다.’

 

 

 

4. 삶의 現場으로 나오시오.

 

1) ‘아난다여, 나는 이제 여든 살 늙고 衰하였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듯 

나 또한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고 있느니라. – ‘ (대반열반경, D ⅱ 101)

 

삶의 現場에서, 많은 사람들의 苦痛의 現場에서, 그 苦痛을 問題 삼고 治癒하기 위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獻身하고 있는 노(老)부처님, 낡은 수레처럼 삐거덕거리며 굴러가면서도 社會的 獻身의 길을 멈추지 않

은 팔순의 노(老)부처님 –

 

2) 친구들,

저 부처님의 몰골을 보고 깨어나시오.

어리석은 觀念놀이에서 깨어나시오.

앉아서 깨닫겠다고 용쓰고,

한소식 하면 萬事가 다 解決될 것 같은 이 虛妄한 錯覺 幻想에서 그만 깨어나시오.

이 뿌리 깊은 허위의식(虛僞意識)에서 깨어나시오.

나누고 섬기는 社會的 獻身이 없는 佛敎는 이미 불교가 아니오.

그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오.

 

부처님도 마지막 瞬間까지 몸이 무너지도록 애쓰고 애쓰시는데,

그러면서 이 世上을 바꿔가지 위하여 노심초사하시는데,

우리가 뭐가 잘낫다고 道人인척 하겠소.

애쓰고 또 애쓰지 않겠소.

 

3) 친구들, 선우(善友)들,

이제 이 치열한 삶으로, 行爲로 나오시오.

日常의 삶 속에서 피땀 흘리며 추구하는 大衆見性의 現場으로  나오시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깨닫는 「우리 함께 깨닫기」의 現場으로 나서시오.

그래야 大乘입니다. 그래야 菩薩입니다. 그래야 직지견성(直指見性)입니다.

 

이제 希望의 出口가 보입니다. 우리 生命이 光明燦爛 빛을 發합니다.

이 땅에 증오가 사라지고 철조망이 사라집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놓고 거리를 내달립니다.

非定規職 勞動者들도 내일을 기약하며 환 - 하게 미소합니다. *

 

 

※ 관련 동영상 보기

 

- Dr.K▶ 대중견성 가능한가? - 법구경 속의 대중견성 사건들 (정각원)

                                         http://cafe.daum.net/bmcbori/4VNM/16

 

 

 

 

 

붓다 메신저 - 청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