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불자님, 이제 다섯 발의 대포 중에서 네 발 째 대포를 쏘아 올리려 합니다. 이 네 발 째 대포에서는 우리 불자들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 것이지, 그 삶의 원형을 밝히고자 합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불교는 삶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삶을 사신 분이고, 삶을 보이신 분이고, 삶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어떤 삶입니까? 온갖 고통을 여읜 삶입니다. 온갖 고통을 벗어나 무너지지 아니하는 평온과 행복의 삶입니다. 그 삶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홀로 가는 삶이아니고, 함께 가야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교리교학(경전공부), 수행법(참선, 위빠사나, 염불독경...)은 무엇입니까? 이것들은 바로 이런 삶을 實現하기 위한 方便들입니다. 병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전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고통받는 삶 속에서 그때 그때 바르게 써야할 方便이고, 처방전들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이 방편 저 처방을 잘 써서 부처님이 우리에게 밝혀 보이신 무너지지 아니하는 平穩과 幸福의 삶을 우리들 日常의 生活現場에서 實現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하루하루 우리들 삶의 現場에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함께 苦悶해 보고자 합니다. _()_ .... 두 손 모아 부처님께 歸依하면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
이것은 수행이 아니다. 깨닫기 위해서, 견성 성불 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아니다. 이것 自體가 깨달음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 그 自體가 이미 깨달음이고 견성 성불 해탈 열반이다. 하루하루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現場이 곧 많은 사람들이 함께 깨달음을 꽃피우는 만인깨달음 만인행복의 現場이다. ..... 깨닫겠다고 몇 년 몇 십년 앉아있는 것, 이것은 수행 아니다. 執着이고 嚴重한 삶의 회피이다. 위빠사나 ‧ 참선,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순간순간 生命을 기울여서 嚴重한 삶으로, 日常의 삶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이다. 무엇을 또 깨닫겠다고 하는가? .....
namas - dāna - sati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
친구여, 부디 다시 또 무엇을 구하지 말라. 다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라. 그것으로 이미 완성이고 실 현이다. ....(본 문 내용 중에서...)
(혹시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① ② ③ 자료를 보시지 않은 분은 본 게시판에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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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강의 – 대중견성론>
희망의 출구 –「우리 함께 깨닫기」 – 우리도 부처님같이 –
김재영 (불교학박사, 청보리회 법사)
[강의 4] 「우리 함께 깨닫기」, 어떻게 살까?
1. 왜 보지 못하는가?
1) ‘와서 보라.'
'눈 있는 자는 볼 수 있는 것‘ ‘눈앞에 現實로 펼쳐지는 것‘ ‘지금 여기서 現實的으로 體驗할 수 있는 것’ 이것이 法의 現實이다 緣起의 現實이다 삶의 現實이다. 서로 無數한 條件으로 얽혀서 한 生命의 흐름으로 살아가는 연기의 현실이고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이 現實을 있는 그대로 보고 보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서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自由롭게 平和롭게 神命나게 살아가는 것이 見性이며 解脫 涅槃 成佛이다. 淨土의 世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눈뜬장님들인가? 아니, 시각장애인들도 다 볼 수 있는 것이 緣起의 現實 - 삶의 現實인데, 왜 우리 는 두 눈 멀건히 뜨고도 보지 못하는가? 보지 못하고 방황하며 끝없는 苦痛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가? 두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남편이 아내를 害치고 아내가 남편을 害치고 자식이 부모를 害치고 부모가 자식을 害치고 어른이 아이를 害치고 아이가 어른을 害치고 남이 북을 害치고 북이 남을 害치고 동이 서를 害치고 서가 동을 害 치고– 그러면서 우리가 모두 苦痛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끝없는 爆力과 戰爭으로 서로 죽 이기에 熱中하고 있는가?
고따마 부처님은 이렇게 說하고 있다. ‘바라문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法답지 못한 欲望에 물들고 비뚤어진 貪慾에 압도되고 삿된 敎理에 빠져있다. 그들은 法답지 못한 欲望에 물들고 비뚤어진 貪慾에 압도되고 삿된 敎理에 빠져서 예리 한 칼을 쥐고 서로의 生命을 뺏는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앙굿따라니까야, A ⅰ159)
2) ‘欲望과 貪慾과 삿된 敎理 때문에 예리한 칼로 서로 죽이고 – ’
부처님의 觀察과 批判은 역시 예리하다. 지금 부처님은 우리들의 慾心이 家庭과 社會 ‧ 人類를 苦痛으로 몰고가는 本質的 原因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慾心 때문에 – ’ ‘慾心으로 눈이 멀어서 – ’, 우리는 緣起의 現實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곧 우리가 모두 서로 얽혀있는 한 생명의 흐름이라는 生命의 現實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를 害치는 끝없는 惡循環에 빠져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관찰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의 現場에서 수없이 겪고 있는 단순한 사실이다. 식탁에서 식사할 때 나만 맛있는 음식 먹겠다고 수저를 이리저리 놀려대면 다른 사람들이 금세 불쾌해하고 화를 낸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것이 쌓이면 원망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어리석은 고집이 생기고 갈등 투쟁이 벌어진다.
이것이 탐진치(貪瞋癡) 三毒이다. 탐욕과 분노 ‧ 어리석은 固執이다. 나 자신과 가정 직장 사회 지구촌을 병들게 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가는 세 가지 독(三毒)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도처에서, 탐진치가 문제다. 탐진치 삼득을 소멸하라, 그리하면 해탈 열반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설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慾心이 문제다. 이 慾心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욕망(慾望, kāma)' '탐욕(貪慾, rāga)' '욕구(慾求, chanda)' '갈애(渴愛, tanhā)', 경전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이들 용어들은 모두 이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욕심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 ‘慾心 때문에 – ’ ‘욕심에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고 – ’
이 慾心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아니, 이 慾心을 왜 끊지 못할까? 욕심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왜 이 욕심 끊지 못할까? ‘끊어야지 끊어야지’ 수없이 다짐하면서 왜 끊지 못하는 것일까? 어느 성(性)범죄자는 ‘욕심을 도 저히 끊을 수 없으니까 거세시켜 달라’고 했다는데, 왜 이렇게 끊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慾心이 우리들의 자아의식(自我意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慾心이 우리들의 뿌리 깊은 潛在意識 – 自我意識에서 發生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自我意識이란 곧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는 生覺이다. 좀 더 깊이 말하면, ‘나’라는 生覺, ‘자아(自我, atta, myself)'라는 生覺이다. 우리는 주변의 사물을 볼 때, ‘이것은 내것이다’ ‘내 몸이다’ ‘내 물건이다’ ‘내 재산이다’ ‘내 남편이다’ ‘내 名譽이다’ – 이렇게 끊임없이 ‘나의 것’ ‘내 것’이라는 潛在意識으로 生覺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내 것을 침해하면 화를 내고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기를 서슴치 않는다. 慾心은 바로 이러한 自我意識 - ‘나의 것’ ‘내 것’이라는 潛在意識에서 發生한다. 안 뺏기고 굳게 지키고 검어 쥐려고 하는 强力한 自我意識에서 貪瞋痴 三毒이 發生하는 것이다.
친구여, 그대 마음속을 한번 들여다보라. 온통 ‘나의 것’ ‘내 것’이라는 生覺으로 가득 차 있지 아니 한가? 한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아니 한가? 누가 침범해오면 가차 없이 쳐부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아니 한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남의 것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지배하려고 하는 어둔 이기적 생각이 숨어 있지 아니 한가? 그래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수천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면서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교리‘ 때문에, ’내 교리‘ 때문에 지금도 이라크 ‧ 아프간 ‧ 레바논에서 서로 죽이기를 계속하고 있다. ’삿된 교리에 빠져서 예리한 칼을 쥐고 서로의 생명을 뺏는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 들이 죽어간다’, 부처님의 문명비판이 얼마나 예리한 것인가를 새삼 절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自我意識이고, 慾心은 바로 이 自我意識에서 生겨나는 利己的 潛在意識이다. 그래서 뻔히 이치를 알면서도 이 慾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버리기가 죽기 보다 더 힘들다. 무수히 죽 이고 죽어가면서도 이 慾心, 이 敎理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인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 두 어리석은 집단의 교리전쟁으로 滅亡할지 모른다.
4) 맘속에 뿌리 깊이 潛在해있는 이 어둔 自我意識, ‘나의 것’’이라는 生覺
모든 욕심과 분노, 어리석은 교리의 원천이 되는 어둡고 이기적인 自我意識, ‘나의 것’ ‘내 것’이라는 生覺, ‘나’ '자아‘라는 生覺 –
부처님은 이 自我意識을 ‘오온(五蘊, paṅcaskhandha)‘이라고 불렀다. 般若心經 첫머리에 나오는 五蘊이 바로 이것이다. ’오온이 모두 빈 것임을 비춰보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 어났다‘(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오온, 곧 어둔 자아의식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보고, 그렇게 해서 자아의식을 치유하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런 뜻이다. 초기불교나 부파불교, 대승불교를 통틀어서 五蘊, 곧 自我意識을 治癒하는 것이 가장 本質的인 問題라는 事實을 여기서 새삼 깨닫고 있다. 부처님은 五蘊, 곧 自我意識의 深覺性에 관하여 다시 이렇게 警告하고 있다.
칼날이 몸에 와 닿는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感覺的 快樂의 慾心을 버리고 수행자는 올바른 마음통찰(sati)로 편력하라.
칼날이 몸에 와 닿는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五蘊이 實體라는 見解를 버리고 [나의 것이 實際 있다는 生覺을 버리고] 수행자는 올바른 마음통찰(sati)로 집을 떠나라.‘ (쌍윳따니까야 - ’칼날‘, Sⅰ13)
2. namas - dana - sati로 살기
1) 어떻게 살까?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뿌리 깊은 自我意識 – 이 慾心의 病을 치유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함께 깨닫기」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실현함으로써 광명찬란 우리 생명의 빛을 발하는「우리 함께 깨닫기」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오랜 부딪침과 探究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希望의 出口를 찾게 되었다.
namas - dāna - sati (나마스 – 다나 – 사띠)
namas - 두 손 모아 부처님께 歸依하면서 dāna -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고 섬기면서 sati - 담담하게 지켜보며 마음통찰하면서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적 삶의 現場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이 自體로서 大衆見性이다. 「우리 함께 깨닫기」이다. 깨달음 해탈 열반 견성 성불이다. 이렇게 熱心히 살아가면, 이것이 自我意識을 治癒하는 삶이고 慾心을 치유하는 삶이고 慾心 憤怒 어리석은 敎理 - 貪瞋痴 三毒을 치유하는 삶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면 이것이 自身을 確立하는 것이고, 이것이 自燈明 法燈明이다. 바로 이것이 佛敎의 정체성(正體性)이다.
2) namas - dāna - sati
두 손 모아 부처님께 귀의하면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
이것은 수행이 아니다. 깨닫기 위해서, 견성성불 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아니다. 이것 自體가 깨달음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미 깨달음이고 견성성불 해탈 열반이다. 하루하루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現場이 곧 많은 사람들이 함께 깨달음을 꽃피우는 만인깨달음 만인행복의 現場이다.
修行이란 本來 삶이다. 삶 그 自體이다. 무엇을 求하기 위한, 이루기 위한 準備過程이 아니다. 깨닫기 위한 演習過程이 아니다. 삶에는 연습이 없는 것이다. 연습하고 사는 것 아니다. 연습하고 나고 연습하고 죽는 것 아니다. 연습해서 깨닫고 연습해서 견성하는 것 아니다. 瞬間瞬間이 엄중한 삶이다. 瞬間瞬間이 엄중하고 치열한 깨달음의 現場이다. 깨닫겠다고 몇 년 몇 십년 앉아있는 것, 이것은 수행 아니다. 執着이고 嚴重한 삶의 廻避이다. 위빠사나 ‧ 참선,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瞬間瞬間 生命을 기울여서 엄중한 삶으로, 日常의 삶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이미 깨달아 있는 것이다. 무엇을 또 깨닫겠다고 하는가?
3) namas - dāna - sati
두 손 모아 부처님께 歸依하면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通察하면서 –
친구여, 부디 다시 또 무엇을 求하지 말라. 다만 이렇게 熱心히 살아라. 그것으로 이미 完成이고 實現이다. 담장 곁에 하늘빛 나팔꽃은 활짝 피어있고 노랑새 한 쌍이 즐겁게 노래하며 숲속을 나르고 있다. 工場 모터는 힘차게 돌아가고 外航船은 기적을 길게 울리며 太平洋을 힘차게 달리고 있다. 또 무엇이 더 필요할까?
3. 오늘 하루 어떻게 살까?
① 光明起床
‘마하반야바라밀 光明燦爛 광명찬란
희망찬 새날이 밝았도다. – ’
아침 잠자리에서 눈이 뜨이면,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서 벌떡 일어난다. 창문으로 燦爛한 光明이 박차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 – 둘 – 셋 – 이렇게 헤아리며 呼吸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② 아침예불
세수하고 불단 앞에 서서 간단하게 아침예불을 올린다.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이다. 부처님 사진 한 장 모셔도 훌륭한 불단이 된다. 그것도 없으면 창문을 향해서 선다. 예불문을 외우며 절한 다. 번거로우면 삼배를 올려도 좋다. 기도한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따뜻한 미소로 부처님같이 남 害치지 아니하고 섬기고 儉素하게 살고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고 부처님 法 열심히 傳播하고 不義 앞에 물러서지 아니 하고
마하반야바라밀 광명찬란 광명찬란 만사 잘 될 것입니다. 건강할 것입니다. 성취할 것입니다. 모든 생명들이여, 부디 행복하소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부디 행복하소서. [맘 속으로 진실로 사랑하는 이들 얼굴 그리며 축원올린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잠시 석가모지불 정근. 반야심경 독송한다.] (아침예불 끝)
– 시간이 나면 호흡을 헤아리며 마음통찰 하거나, 또는 위빠사나 ‧ 참선한다. 경전을 읽으며 마음 통찰 하는 것도 좋다.
–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삼배 - 반야심경’으로 예불 올린다.
③ 작은 섬김 8正道
1. 항상 부처님같이 밝은 얼굴로 미소하며 가족들 이웃들 동료들을 대한다. 2. 항상 긍정적인 말로 그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뒤에서 험담하지 아니 한다. 3. 그들이 우울해 할 때 커피 한 잔이라도 뽑아서 따뜻하게 위로한다. 4. 동료가 업무로 힘들어 할 때 5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도와준다. 5. 독거노인 씻겨드리기 등 정기적인 자원봉사 클럽활동에 동참한다. 6. 한달 만원이라도 자동이채로 불우이웃을 돌본다. (예 ; 한달 만원이면 캄보디아 어린이 한명 학교 보내고 하루 따뜻한 밥 한기 먹일 수 있다. 계좌번호 국민은행 463501-01-197039 자비를 나르는 수레꾼) 7. 헌혈에 동참하고, 장기기증 증서를 쓴다. 8. 모든 기회에 부처님 법을 말하고, 불서선물 법회인도 등, 불연맺기에 힘쓴다.
④ 담담하게 지켜보기(마음통찰)
힘차게 역동적으로 하루 활동을 펼쳐간다. 전철을 타거나 차를 몰 때, 직장에서 일할 때, 활동하 는 짬짬이, 또 화가 날 때, 우울할 때 정신 차려서 마음통찰 한다.
– 먼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 – 둘 –… 열’까지 헤아린다.
– 이렇게 담담하게 지켜본다. ‘諸行은 無常한 것이다. 끊임없이 變하고 사라져가는 것 어떤 實體도 없는 것 물처럼 바람처럼 담담하게 지켜본다. 텅 – 빈 자리 텅 – 빈 자리 우리도 부처님같이 따뜻한 미소로 부처님같이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고 마하반야바라밀 광명찬란 광명찬란 – ‘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제행무상 제행무상 - ’. 이렇게 끊임없이 외운다.*
※ 관련 동영상 보기
▶부처님을 보라! 살아라! 전파하라! (불교진흥원 초청 특별법회 동영상/ 2010,2,18) http://cafe.daum.net/bmcbori/4VN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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